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3.09
'섬'의 동사형 - 복효근 '섬'의 동사형 복효근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3.01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대는 저 장다리꽃을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자리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달리는 화..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2.22
너를 본 순간 - 이승훈 너를 본 순간 이승훈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시커먼 밤이었고 너는 하이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뼈저린 외롬 같은 것 너를 본 순간 나를..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2.09
酒幕 - 백석 酒幕 백석 호박닢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八모알상이 그 상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盞이 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군들을 따러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 백석의 ..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2.02
자화상 - 이수익 자화상 이수익 제 몸을 부수며 종이 운다. 울음은 살아있음의 명백한 증거, 마침내 깨어지면 울음도 그치리. 지금 존재의 희열을 숨차게 뻗으며 하늘과 땅을 건너 느릿느릿 울려 퍼지는 종소리, 종소리, 그것은 핏빛 자해(自害)의 울음소리. <<꽃나무 아래의 키스>> 이수익, 2007 그대 마음 속, 울..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1.24
긍정적인 밥 - 함민복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1.19
멍 - 박형준 멍 박형준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났던 어머니는 가을이 되어 돌아오셨다 월남치마에서 파도소리가 서걱거렸다 우리는 옴팍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해당화 한 그루가 마당 한쪽에 자..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1.12
돼지의 본질 - 최영미 돼지의 본질 최영미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그는 진주를 한 번 보고 싶었을 뿐, 두 번 세 번 보고 싶었을 뿐…… 만질 생각은 없었다고 해칠 의도는 더더군다나 없었다고 자신은 ..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1.05
바하를 들으며 시인 장병훈 siijang@hanmail.net 바하를 들으며 김성춘 안경알을 닦으며 바하를 듣는다. 나무들의 귀가 겨울 쪽으로 굽어있다. 우리들의 슬픔이 닿지 않는 곳 하늘의 빈터에서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어 죽은 가지마다 촛불을 달고 있다. 聖 마태 수난곡의 一樂句, 만리 밖에서 종소리가 일어선다. 나무들의..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8.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