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63

슬픔의 진화 - 심보선

슬픔의 진화 심보선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 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

몸의 기억 - 목탁론 木鐸論

몸의 기억 - 목탁론 木鐸論 이명수 스님이 오랜만에 절집에 돌아오셨다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치셨다 목탁이 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목탁도 자주 쳐 주지 않으면 제 소리를 잃고 만다 제가 목탁인 것을 잊은 것이다 꽹과리, 징도 쳐 주지 않으면 쇳소리를 잃고 만다 종도 사람도 그렇다 本色을 잃고 깨..

다정에 바치네 - 김경미

다정에 바치네 김경미 당신이라는 수면 위 얇게 물수제비나 뜨는 지천의 돌조각이란 생각 성근 시침질에 실과 옷감이나 당겨 우는 치맛단이란 생각 물컵 속 반 넘게 무릎이나 꺾인 나무젓가락이란 생각 길게 미끄러져버린 검정 미역 줄기란 생각 그러다 봄저녁에 듣는 간절한 한 마디 저 연보랏빛 산..

아파트가 운다 - 최금진

아파트가 운다 최금진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