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꽃 - 문신 빗방울 꽃 문신 남쪽에서 길을 놓치고 민박집에 들다 늦게까지 불 켜두고 축척지도의 들길을 더듬다 쩌렁쩌렁 난데없는 소리에 억장 무너지다 알고 보니 민박집 양철 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아니, 야음을 틈타 양철 지붕에 꽃잎 피어나는 소리 꽃잎 자리에 얹힌 허공이 앗 뜨거라, 후닥닥 비켜 ..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5.18
붉은 샘 - 김성규 붉은 샘 김성규 돼지의 멱을 따자 피가 쏟아진다 칼은 부드러운 살을 헤집고 더 큰 물길을 찾는다 붉은 물, 반짝이며 쏟아지는 붉은 물, 이빨 빠진 노인들이 웃는다 바들바들 떠는 돼지 혓바닥이 말려들어간다 온몸의 소리가 빠져나간다 주머니처럼 매달린 간을 삼키며 노인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5.11
슬픔의 진화 - 심보선 슬픔의 진화 심보선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 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5.04
몸의 기억 - 목탁론 木鐸論 몸의 기억 - 목탁론 木鐸論 이명수 스님이 오랜만에 절집에 돌아오셨다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치셨다 목탁이 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목탁도 자주 쳐 주지 않으면 제 소리를 잃고 만다 제가 목탁인 것을 잊은 것이다 꽹과리, 징도 쳐 주지 않으면 쇳소리를 잃고 만다 종도 사람도 그렇다 本色을 잃고 깨..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4.27
책의 등 - 고영민 책의 등 고영민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있다 빽빽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있다 등뼈가 보인다 등을 보여주는 것은 읽을 거리가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절교를 선언하고 뛰어가던 애인이, 한 시대와 역사가 그랬다 등을 보이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옷을 갈..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4.20
불면 - 박라연 불면 박라연 누군가의 손짓일 것입니다 독 속의 쌀을 싹싹 긁어 굶주린 허공에게 밥을 지어 먹이자는, 시인의 에너지는 불면에서 온다. “눈물도 식량인데” 라니, 참 기가 막힌다. 눈물도 식량이라니, 시인은 그의 또 다른 시, ‘낡아빠진 농사’의 첫 줄을 ‘눈물도 식량인데’라고 시작했다. 참, 어..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4.13
다정에 바치네 - 김경미 다정에 바치네 김경미 당신이라는 수면 위 얇게 물수제비나 뜨는 지천의 돌조각이란 생각 성근 시침질에 실과 옷감이나 당겨 우는 치맛단이란 생각 물컵 속 반 넘게 무릎이나 꺾인 나무젓가락이란 생각 길게 미끄러져버린 검정 미역 줄기란 생각 그러다 봄저녁에 듣는 간절한 한 마디 저 연보랏빛 산..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4.06
개안(開眼) - 박목월 개안 (開眼) 박목월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神이 지..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3.30
절창 - 엄원태 절창 엄원태 백합조개는 사라진 지 오래 가무락이나 바지락은 그나마 뻘길 십 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 물 들어오기 전 개흙십리 발목까지 꼬박꼬박 빠지며 돌아오는 아낙이며 사내들은 망태를 이거나 졌는데 발목 빠진 자국들, 오롯이 가늘고 긴 생의 외통길을 이루었다 방죽 오르는 허리 굽은 한 할미..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3.23
아파트가 운다 - 최금진 아파트가 운다 최금진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쳤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 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200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