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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베푼 목민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 ||||||||||||||||||||||||||||||
| 어진 이를 생각하게 하는 조양공원 ‘사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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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사람들 괴로움이 한(限)인들 있으리요. 기병대(騎兵隊) 불공평 편입, 무당(武堂 : 병역 사무를 담당한 관청)에 부림 받고, 엉뚱하게 화를 입어 고역도 많거니와 돈조차 자주 찾네. 두회(頭會 : 사람의 머리수에 따라 내는 세금)에 시달려서 눈병조차 돌볼 겨를 없네. 우리 원님 인명(仁明 : 어질고 사리에 밝음)하사 혜택이 많기도 하다. 고질을 두루 소생시키고자 자기 몸같이 보살필 세 4,000문(文 : 돈의 단위)을 던져서 22방(坊 : 마을)에 나눈 후 이식(利息)을 불려서 저것(두회 세금)을 갚으니 그 폐단이 멎었네. 일군(부당하게 군포를 바쳐야 했던 사람)이 포덕(飽德 : 은혜를 많이 입음)하여 미칠 듯이 춤추네. 무엇으로 이 은혜 갚사오리. 이 비석아 무궁하라!”
단풍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늦가을의 정취를 뽐내고 있는 창구동 1번지 영천조양공원 오른쪽 언덕위에는 영천을 다스린 역대 목민관들의 선정비를 가지런히 모아둔 ‘사현대(思賢臺)’가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영천보건소(구 영천군청) 입구 서편에 서있었으나 2004년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옮겨왔다.
정도영씨의 글에 신억씨가 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시(杜詩) 노인같이 힘써 다스리고 문옹(文翁) 같이 교화했네. 그 은덕을 보답코자 하나 비석이 오히려 부족하네.”(이만직 군수 선정비) 이만직 군수는 1707년(숙종 33) 2월에 임파 현령으로서 왔다가 1709년 5월에 청주목사로 옮겨갔다. 이 군수는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나주목사와 광주(廣州)부사,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찰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념했다. 후에 형조참의까지 지냈다.
이장용 군수는 1901년(광무 5) 8월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서 부임하여 결복(結卜 : 현 토지소득세에 해당함) 단위를 41량 6전 7푼으로 정하고 이듬해 3월에 장기군수로 떠났다. 이해 8월에 함열에서 다시 영천으로 왔다가 1905년 정월 장흥군수로 갔다. “실정에 맞도록 정치를 하였고, 남이 칭찬해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청간(청백하고 검소함)하게 몸을 던져 한결같이 3년을 보냈다.”(박봉화 현감 선정비)
“공이 고을에 오신지 이제 몇 해던고 유림의 표준이라. 백성을 사랑하고 정성스레 다스려서 행동이 모두 격당(格當)하여 윤리와 기강을 유지하였다. 떠나심을 아낀 한 조각비는 만 가지에 하나도 은혜를 갚지 못했는데 남쪽 땅 한 모퉁이에서 다 스러져가네. 여론에 따라 비각을 세우고 여기 옮기니 공의 유덕을 사모함을 오늘에도 보겠네. 끊이지 않는 은택이 오래도록 이어지리.”(성근묵 군수 휼민비) 성 군수는 1828년(순조 28) 후릉령(厚陵令)으로서 왔다가 1831년 6월에 청송부사로 옮겨갔다. “물이 맑아지려고 공이 오셨고, 은혜가 태산도 가벼운데 공이 가셨네. 천금으로 은혜를 베풀었는데 한 조각 비문이 어찌 말을 다하리.”(이범석 군수 거사비) 이 군수는 1902년(광무 6)4월에 김제군수로 있다가 와서 8월에 다른 곳으로 갔다. “4년의 맑은 바람(청백한 행정)에 염평(廉平 : 청렴하고 공평함)이 이르는 곳마다, 만인이 가송(歌誦 : 노래하고 칭송함)하고 백폐(百弊 : 여러 가지 쇠퇴한 일들)가 다 흥왕해졌네.”(청백군수 박세병 불망비) 박 군수는 1880년(고종 17) 7월에 남평현감으로 있다 와서 1883년 12월에 김해부사로 떠났다. “공평하게 다스림에 청숙(淸肅 : 청백하고 엄숙함)함이 기풍이요 조정에 삼계(三啓 : 세번 상소함)하여 재해를 막아주고 10조로서 궁함을 구제하니 고마운 은혜는 바다보다 깊고 산보다 높구나. 백성이 모두 즐겁다 하니 사마온공(司馬溫公)을 다시보네.”(박제인 관찰사 불망비) “구슬 같은 자질이요, 빙옥같이 빛나네. 훌륭하다 우리 원님, 죽도록 못 잊겠네.” “이는 나의 외증조부 영의정 만사(晩沙 : 심지원 군수의 호) 심공의 유애비(선정비와 같은 뜻)다. 공은 숭정계유(崇禎癸酉‧1633)에 사인으로서 여기 나와 군수 질 하다가 갑술년(1634)에 중승으로 소환되었다. 원님으로 1년 있으매 후택(厚澤 : 두터운 은택)이 흡족하여 읍민이 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 뒤 82년 만에 소자가 또한 여기 고을살이하매 글자도 희미하게 마태가 끼어서 흠감(欽感 : 두렵게 느낌)함을 금할 수 없네. 비각을 짓고 다시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니 그 청덕을 감히 이어 닮기 못하지만 공을 사모하는 백성들이여, 게을리 하여 욕될까 두려워 할지로다. 실로 을미(1715) 3월일이라. 외 증손 군수 이명희 지음”(심지원 군수 청덕비) 심 군수는 1633년(인조 11) 7월에 의정부 사인으로 왔다가 이듬해 7월, 사헌부집의로갔다. 효종 때 영의정이 되고 영천의 송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외 증손인 이명희 군수도 뒤에 선정하여 청덕선정동비(淸德善政銅碑)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이 외에도 비문은 전해지지 않지만 1702년(숙종 28) 9월에 와서 조양각을 중창하고 청량당(淸凉堂 : 조양각 부속건물)의 단청을 다시 했으며 내별당(內別堂 : 군청안채의 별당)을 새로 지은 권수경 군수의 선정비와 1886년(고종 23) 12월 영천(榮川 : 현 영주)군수로 있다가 본군에 부임, 조양각을 다시 수즙(지붕을 고쳐 이음)하고 각 관청을 수선한 후 1890년 고려현감으로 전출 간 임시익 군수의 청덕비, 1848년(헌종 14) 2월에 광주판관으로서 왔다가 1851년(철종 20)에 그만둔 이계영 군수의 거사비, 김병완 군수 불망비, 박준성 군수 불망비, 철종 때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서희순 관찰자 청덕비, 이헌영 관찰자 거사비가 있다. 또, 1881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을 시찰하였고 1903년경에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이헌영 관찰자 거사비, 장승원 관찰자 선정비, 이만직 어사 선정비, 심지원 군수 청덕비, 이학래 군수 불망비, 홍순형 군수 청덕비 등이 세월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남아있다. 어진 이를 생각하게 하는‘사현대.’영천 지역민들을 편안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목민관들을 기린 21좌의 선정비가 조양공원 한편에 우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연이어진 지역 지도자들의 낙마로 12월 19일 치러지는 영천시장 재선거에 출마할 후보들에게 이분들은 아마도 이런 말이 하고 싶지 않았을까? “부와 권력보다는 나를 희생하더라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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