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답사와 여행이야기(이원석 편집위원)

‘선정 베푼 목민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이원석(문엄) 2007. 11. 5.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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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베푼 목민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어진 이를 생각하게 하는 조양공원 ‘사현대’
2007년 11월 05일 (월) 22:36:03 이원석 기자 ycnews24@hanmail.net

“고을 사람들 괴로움이 한(限)인들 있으리요. 기병대(騎兵隊) 불공평 편입, 무당(武堂 : 병역 사무를 담당한 관청)에 부림 받고, 엉뚱하게 화를 입어 고역도 많거니와 돈조차 자주 찾네. 두회(頭會 : 사람의 머리수에 따라 내는 세금)에 시달려서 눈병조차 돌볼 겨를 없네. 우리 원님 인명(仁明 : 어질고 사리에 밝음)하사 혜택이 많기도 하다. 고질을 두루 소생시키고자 자기 몸같이 보살필 세 4,000문(文 : 돈의 단위)을 던져서 22방(坊 : 마을)에 나눈 후 이식(利息)을 불려서 저것(두회 세금)을 갚으니 그 폐단이 멎었네. 일군(부당하게 군포를 바쳐야 했던 사람)이 포덕(飽德 : 은혜를 많이 입음)하여 미칠 듯이 춤추네. 무엇으로 이 은혜 갚사오리. 이 비석아 무궁하라!”

   
 
1825년(순조 25) 정월에 대구판관으로 있다가 영천으로 와서 선정을 베푼 조재만 군수의 불망비로 1827년 11월에 세워졌다.

단풍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늦가을의 정취를 뽐내고 있는 창구동 1번지 영천조양공원 오른쪽 언덕위에는 영천을 다스린 역대 목민관들의 선정비를 가지런히 모아둔 ‘사현대(思賢臺)’가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영천보건소(구 영천군청) 입구 서편에 서있었으나 2004년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옮겨왔다.

   
 
조선 인조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목민(牧民)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관찰사(觀察使), 군수 현감들의 송덕비로 영천읍 문내동 152번지 담장 밑에 무질서하게 서 있던 것을 1972년 4월 10일 당국이 현 위치로 옮겨 배열한 후 단장하고 비군(碑群)을 통칭하여 사현대(司縣臺)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관찰사 박상공영세불망비 외 21비가 있다.

정도영씨의 글에 신억씨가 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군수의 이 장거는 정부의 문화보호책에 호응하는 동시에 선민들이 거사한 좋은 풍속을 세상에 천명한 것이니 뒤에 이 고을에 와서 성을 지켜, 이 비를 보는 사람은 반드시 본받을 마음이 있어 선정할 것을 다짐할 터인즉 신 군수의 뜻이 바로 여기 있지 않았겠나. 군수가 전번에 나에게 이일을 의논하더니, 준공에 이르러 군내의 선비들이 군수의 공적을 기리고 장차 비를 만들어 대(臺)를 표시하고자 내 집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곡식을 얻고 솥을 얻어도 그 해를 기록하고 책에 기록하여 잊지 않음을 보였거늘 지금 군수의 이 대도 곡식과 솥에 못하지 않음으로 언컨대 그대가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또한 글도 지어 주게나.” 하므로 좋게 여겨 마침내 ‘사현대’라 이름 지으니 ‘사현’은 촉(蜀)나라의 정각(亭閣) 이름이고, 여기 그 전말을 써서 영천의 고사로 삼을 따름이다.

“두시(杜詩) 노인같이 힘써 다스리고 문옹(文翁) 같이 교화했네. 그 은덕을 보답코자 하나 비석이 오히려 부족하네.”(이만직 군수 선정비)

이만직 군수는 1707년(숙종 33) 2월에 임파 현령으로서 왔다가 1709년 5월에 청주목사로 옮겨갔다. 이 군수는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나주목사와 광주(廣州)부사,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찰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념했다. 후에 형조참의까지 지냈다.

   
 
“예의는 양로(養老 : 노인을 존경하여 대접함)함을 먼저하고 은혜는 가난한 이에게 두루 베풀었다. 세금을 줄여 부담을 덜어주고 치안유지에 그 몸이 수고로웠다. 고을의 병폐를 다 없애니 백성의 숨은 사정이 시원히 풀렸네. 영원토록 경앙(景仰 : 존경하여 우러러봄)하니 그 빗돌아 높거라!”(이장용 군수 거사비)

이장용 군수는 1901년(광무 5) 8월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서 부임하여 결복(結卜 : 현 토지소득세에 해당함) 단위를 41량 6전 7푼으로 정하고 이듬해 3월에 장기군수로 떠났다. 이해 8월에 함열에서 다시 영천으로 왔다가 1905년 정월 장흥군수로 갔다. “실정에 맞도록 정치를 하였고, 남이 칭찬해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청간(청백하고 검소함)하게 몸을 던져 한결같이 3년을 보냈다.”(박봉화 현감 선정비)

   
 
박봉화 현감은 1859년(철종 10) 3월에 은진현감으로서 부임했다가 1861년 6월에 원주판관이 되어 갔다. “선비의 집에 태어나서 학문이 뛰어나 벼슬하였네. 사재를 털어 백성을 돕고 감선(減繕 : 흉년에 백성을 걱정하여 지방장관이 반찬을 줄이는 것)하여 주려 죽은 백성을 조문하였네. 백성은 걱정 없고 선비는 스승을 두었네.”

“공이 고을에 오신지 이제 몇 해던고 유림의 표준이라. 백성을 사랑하고 정성스레 다스려서 행동이 모두 격당(格當)하여 윤리와 기강을 유지하였다. 떠나심을 아낀 한 조각비는 만 가지에 하나도 은혜를 갚지 못했는데 남쪽 땅 한 모퉁이에서 다 스러져가네. 여론에 따라 비각을 세우고 여기 옮기니 공의 유덕을 사모함을 오늘에도 보겠네. 끊이지 않는 은택이 오래도록 이어지리.”(성근묵 군수 휼민비)

성 군수는 1828년(순조 28) 후릉령(厚陵令)으로서 왔다가 1831년 6월에 청송부사로 옮겨갔다.

“물이 맑아지려고 공이 오셨고, 은혜가 태산도 가벼운데 공이 가셨네. 천금으로 은혜를 베풀었는데 한 조각 비문이 어찌 말을 다하리.”(이범석 군수 거사비)

이 군수는 1902년(광무 6)4월에 김제군수로 있다가 와서 8월에 다른 곳으로 갔다. “4년의 맑은 바람(청백한 행정)에 염평(廉平 : 청렴하고 공평함)이 이르는 곳마다, 만인이 가송(歌誦 : 노래하고 칭송함)하고 백폐(百弊 : 여러 가지 쇠퇴한 일들)가 다 흥왕해졌네.”(청백군수 박세병 불망비)

박 군수는 1880년(고종 17) 7월에 남평현감으로 있다 와서 1883년 12월에 김해부사로 떠났다.

“공평하게 다스림에 청숙(淸肅 : 청백하고 엄숙함)함이 기풍이요 조정에 삼계(三啓 : 세번 상소함)하여 재해를 막아주고 10조로서 궁함을 구제하니 고마운 은혜는 바다보다 깊고 산보다 높구나. 백성이 모두 즐겁다 하니 사마온공(司馬溫公)을 다시보네.”(박제인 관찰사 불망비)

“구슬 같은 자질이요, 빙옥같이 빛나네. 훌륭하다 우리 원님, 죽도록 못 잊겠네.”

“이는 나의 외증조부 영의정 만사(晩沙 : 심지원 군수의 호) 심공의 유애비(선정비와 같은 뜻)다. 공은 숭정계유(崇禎癸酉‧1633)에 사인으로서 여기 나와 군수 질 하다가 갑술년(1634)에 중승으로 소환되었다. 원님으로 1년 있으매 후택(厚澤 : 두터운 은택)이 흡족하여 읍민이 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 뒤 82년 만에 소자가 또한 여기 고을살이하매 글자도 희미하게 마태가 끼어서 흠감(欽感 : 두렵게 느낌)함을 금할 수 없네. 비각을 짓고 다시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니 그 청덕을 감히 이어 닮기 못하지만 공을 사모하는 백성들이여, 게을리 하여 욕될까 두려워 할지로다. 실로 을미(1715) 3월일이라. 외 증손 군수 이명희 지음”(심지원 군수 청덕비)

심 군수는 1633년(인조 11) 7월에 의정부 사인으로 왔다가 이듬해 7월, 사헌부집의로갔다. 효종 때 영의정이 되고 영천의 송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외 증손인 이명희 군수도 뒤에 선정하여 청덕선정동비(淸德善政銅碑)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이 외에도 비문은 전해지지 않지만 1702년(숙종 28) 9월에 와서 조양각을 중창하고 청량당(淸凉堂 : 조양각 부속건물)의 단청을 다시 했으며 내별당(內別堂 : 군청안채의 별당)을 새로 지은 권수경 군수의 선정비와 1886년(고종 23) 12월 영천(榮川 : 현 영주)군수로 있다가 본군에 부임, 조양각을 다시 수즙(지붕을 고쳐 이음)하고 각 관청을 수선한 후 1890년 고려현감으로 전출 간 임시익 군수의 청덕비, 1848년(헌종 14) 2월에 광주판관으로서 왔다가 1851년(철종 20)에 그만둔 이계영 군수의 거사비, 김병완 군수 불망비, 박준성 군수 불망비, 철종 때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서희순 관찰자 청덕비, 이헌영 관찰자 거사비가 있다.

또, 1881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을 시찰하였고 1903년경에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이헌영 관찰자 거사비, 장승원 관찰자 선정비, 이만직 어사 선정비, 심지원 군수 청덕비, 이학래 군수 불망비, 홍순형 군수 청덕비 등이 세월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남아있다.

어진 이를 생각하게 하는‘사현대.’영천 지역민들을 편안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목민관들을 기린 21좌의 선정비가 조양공원 한편에 우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연이어진 지역 지도자들의 낙마로 12월 19일 치러지는 영천시장 재선거에 출마할 후보들에게 이분들은 아마도 이런 말이 하고 싶지 않았을까? “부와 권력보다는 나를 희생하더라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