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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문학, 전통과 함께 어우러진 문향의 고장
자연과 문학이 함께 어우러진 반딧불이의 고장.
영천문화원(원장 김종대)에서는 지난 17일 예로부터 산 좋고 물이 맑으며 인심 좋은 고장으로 충의 열사와 문인들이 많이 배출된 유서 깊은 고장인 영양으로 문화가족 문화탐방을 떠났다.
마침 화산면지회에서도 일정을 같이 해 관광버스 2대에 70여 명의 대인원이 이동, 영천과 차별된 영양의 문화를 접하며 일상에 지친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는 시간이 되었다.
경북에서 봉화와 함께 가장 오지로 손꼽히는 영양은 태고의 신비로움이 고스란히 간직된 원시의 정적과 함께 문향으로 손꼽히는 고장이다.
애국지사이며 항일시인인 오일도의 생가가 있는 감천마을,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의 고향인 두들마을….
문학기행을 떠난다는 마음으로 기사에 대한 부담감을 애써 떨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동행했다.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은 조선시대에 광제원이 있었던 곳으로 석계 이시명 선생과 그의 후손 재령이씨들의 집성촌으로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 전통가옥 30여 채와 동대, 서대, 낙가대, 세심대라고 새겨진 기암괴석을 비롯해서 궁중요리서를 쓴 안동장씨의 유적비, 장씨부인 예절관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정부인 안동장씨(1598~1680)는 조선중기 문학자, 서예가, 화가, 시문, 서ㆍ화에 능했고 자녀교육에도 귀감을 보여 후세에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추앙받은 인물로서 전통요리서인 ‘규곤시의방’, ‘전가보첩’, ‘학발첩’ 등을 남겼다.
현대문학의 거장인 이문열의 생가와 함께 지난 2001년 5월 900평의 대지에 건평 125평으로 지은 광산문학연구소는 65칸 규모로 학사 6실, 강당 및 사랑채 각 1실, 관리사(서재, 대청, 식당) 5실 및 부대시설로 정자와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다.
1948년 이 마을에서 태어나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으로 등단한 이문열은 이곳을 무대로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 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2003년 12월에 시작해 지난해 10월 마칠 예정되었던 장씨부인 예절관 건립공사가 아직 진행중이고 이금자 가옥 정침 및 방앗간채 보수공사도 오는 9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조지훈(1920~1968) 시인의 생가가 있는 한양 조씨 집성촌인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와 개화 개혁으로 이어진 진취적인 문화를 잘 간직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경상북도기념물 제78호)과 옥천종택(경상북도민속자료 제42호), 월록서당 등이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 조(趙)씨는 흔히 주실 조씨로 부른다는데 선비의 고장 유명세만큼이나 마을 전체 짜임쌔가 안정된 것은 물론, 삼각형 모양의 마을 앞 문필봉(文筆峯)은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한 진원지답게 형상이 빼어나다.
호은종택은 이 지방 주택의 전형적인 형태의 ‘ㅁ’자형이며 전면ㆍ측면 모두 7칸으로,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측 1칸에 조지훈 시인의 태실이 있다.
주실마을의 입향조는 조전으로 본래 한양에 뿌리를 둔 이 집안은 조광조 파동이 일어나는 기묘사화 때부터 이리저리 피해 다녔는데 조전이 이곳에 들어온 것이 1630년 무렵이라고 하며 증손 조덕순ㆍ덕린이 모두 대과에 오름으로써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덕린이 영조 때 사약을 받아 비운에 세상을 떠나고 역적마을이 되어 출세길이 막히자 자연히 학문에만 힘을 쓰는 문흥이 일어났다.
이 마을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용틀임하기 시작한 것은 1899년 단발령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조병희가 서울의 개화바람을 보면서 고향청년들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신문명을 접하게 했고 다음 세대들이 도쿄, 베이징, 서울 등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개화운동의 중심지가 월록서당이었고 1910년대에 종손의 자부를 재가시키는 파격을 단행했고 양반마을에 교회가 들어오는 것도 막지 않았다고 한다.신간회 도쿄지회장을 맡고 있던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이 1928년 마을의 과세를 양력으로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후손 조석걸씨는 당시 유학을 떠난 젊은이들이 좀 더 많이 고향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신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던 주실마을이었지만 마을전체가 창씨개명을 반대하며 한민족의 기개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 마을에서는 경북 북부지역의 유교문화권 사업에 포함되어 지난 3월부터 12월 말까지 담장보수 등 정비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이 사업에 포함되지 못한 영천시민으로서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조지훈은 영양보통학교를 3년 다녔고, 마을에서 소년기를 보내면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 후 마을에서 소년회가 조직되었고 꽃탑소년회 활동을 통해 문학적인 싹을 키우기 시작했다.
19세 봄에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곧 문장지를 통해 추천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상황에서도 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정서를 바탕으로 한 그의 시세계는 청록파 시인으로 일컬어지게 되고 또한 우리나라 시문학사의 주류에 서게 되었다.
20세에 문단에 데뷔했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편찬위원이 되었으나 학회검거사건으로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해방 후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 협회를 창립,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문화 수호육성에 힘썼다. 교직과 문단활동을 함께 하면서도 창작을 계속해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펴낸 ‘청록집’을 펴냈고 ‘승무’, ‘봉황수’, ‘풀잎단장’, ‘역사 앞에서’ 등 250여 편의 창작시를 썼다.
1956년에는 자유문학상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벨기에 국제시인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시단을 위해 헌신했다.조지훈은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시사를 연결해준 큰 시인이다.
주실마을 입구에는 1982년 그의 문하생 500여명이 뜻을 모아 시비를 세우고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새겨놓았으며 건너편에는 ‘국화’가 새겨진 형 조동진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절벽과 강을 사이에 두고 바위를 깎아 세운듯하나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촛대를 세워 넣은 것 같은 입암면 신구리 선바위, 또 석벽과 절벽을 끼고 흐르는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큰 강을 이루는 남이포. 선바위와 남이포는 조선세조 때 남이장군이 역모자들을 평정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국민관광지로 현재는 선바위 지구에 호텔, 음식점, 농산물직판장, 수변휴게공간, 민속박물관, 보트장 등을 설치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개발 중에 있다.
이 관광지 내에 있는 영양고추홍보전시관은 영양고추 브랜드 가치를 높여 개방농업 시대에 영양고추 경쟁력을 제고하고 고추산업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상설전시관과 영상홍보실, 직판장 코너를 갖추고 있다.
신기한 분재ㆍ수석ㆍ야생화의 세계로! 영양분재 수석 야생화 전시관은 영양군청이 15억 원의 사업비로 지난 2001년 11월 착공하여 2002년 5월 준공한 것으로 부지 2,721㎡, 건물 1,715㎡ 규모로 분재 130여점을 비롯하여 수석 50점, 야생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영양이 주산지로 검은 돌 바탕에 흰 석영석이 박혀 마치 폭포가 쏟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는 폭포석이 일품이었다.
영양에서의 마지막 답사코스는 입암면 연당1리에 자리 잡은 서석지(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로 이곳은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성균관 진사 석문(石門) 정영방 선생(1577~1650)이 만든 조선시대 민가의 대표적인 연못이다.
우리나라 조경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윤선도가 전남 완도에 만든 ‘부용원’,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과 함께 3대 한국정원으로 꼽히고 있다.
인공 건물은 경정(敬亭)ㆍ주일재(主一齋)ㆍ정문(正門) 등과 생물 경관인 목 주변의 사우단에는 소나무ㆍ대나무ㆍ매화나무ㆍ국화를 심어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데 4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로 13.4m, 세로 11.2m, 깊이 1.7m로 요(凹)자형인 서석지는 그 안에 상운석 등 물 위에 나타난 것이 60여 개, 침수된 돌이 30여 개 등 90여 개의 서석군이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여 전통 정원 조경미의 오묘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 정원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내원은 정관ㆍ사고ㆍ독서 등 사생활을 위해 인공적으로 꾸몄으며 주위의 자연과 조화를 이울 수 있도록 외원에는 앞산과 청기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스쳐 지나도록 병풍바위가 둘러쳐져 수려한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석문의 장남 익제공이 제작했다는 ‘이자서절요’ 목판각 6권 360장과 ‘임장세고’ 목판각 2권 90장이 보존되어 있다.
인근에 있는 연당리석불좌상(졍상북도유형문화재 제111호)과 거북바위를 음미한 후 이날의 공식일정을 모두 마쳤다.
인구 2만이 채 안 되는 산골오지 영양군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자연과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 신구의 조화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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