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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협 전북 고창 미당시문학관 문학기행

이원석(문엄) 2006. 11. 21. 18:40

 

 

 

 

'천재시인' '변절한 문필가' 평가 엇갈려

 

한국문인협회 영천지부(지부장 고원구)에서는 지난해 5월 ‘청마 유치환’의 고향인 경남 통영을 다녀온 데 이어 두 번째 문학기행으로 ‘미당 서정주를 찾아서’란 주제로 지난 5일 전북 고창을 찾았다.

 

모양성제, 수산물축제, 청보리축제, 고인돌마라톤대회, 수박축제, 오거리당산제, 해풍고추축제….전라북도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동북은 정읍시·부안군, 동남은 전남 장성·영광군, 서북부 일대는 서해에 접한 고창군의 인구는 6만 5천여 명으로 지역특성을 이용한 갖가지 축제가 잘 발달되어 ‘축제의 고장’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식목일로 공휴일이었지만 한식이 겹쳐 많은 회원들이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간직한 채 대구-포항·경부·호남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 4시간 30여분만에 부안면 선운리의 미당시문학관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받은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휴일이어서 인지 원근각지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서정주 시인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문학관 식당에서 미리 준비해간 점심식사를 한 후 서동진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문학관을 구경하며 미당 선생의 생애를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불교의 인연설을 바탕으로 온갖 고뇌와 시련을 거쳐 도달한 생의 원숙경을 노래한 ‘국화 옆에서’는 미당 서정주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시로 1947년 11월 9일 경향신문에 발표된 것이다.폐교가 된 선운초등학교를 고창군에서 매입, 지난 2001년 11월 7일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은 9,461㎡의 부지에 건축물은 818㎡이다.

 

주요시설은 전시실 172㎡, 세미나실 174㎡, 전망대 및 재현실 261㎡, 다용도실 191㎡이며 전시동 건물은 재물치장 콘크리트 공법의 건축물로 자연미와 환경 친화적 요소를 살린 건축물이다.

 

원래 앞쪽이 바다였으나 개간하여 지금은 육지로 바뀌었다고 한다.이곳은 미당 서정주의 문학적 가치와 예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미당의 문학작품과 생전의 생활도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간 논란이 됐던 미당의 친일작품뿐만 아니라 서정주 시인의 육필원고, 사진과 함께 역시 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초상화 등 1만여 점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건물 5층 전망대에 올라서면 미당의 작품의 배경이 된 질마재와 갯벌 등을 감상할 수 있다.문학관 오른쪽 편으로 미당교를 건너가면 1915년 음력 5월 18일 미당이 태어난 생가가 나온다.

 

이 집은 1942년 부친이 별세한 후 친척이 거주·관리하면서 지붕을 슬레이트로 개조했고 1970년경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가 2001년 8월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미당은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서 태어났다.

 

인근의 줄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생으로 입학했고 2학년이던 1930년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퇴학을 당하고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했으나 거기서도 자퇴했다.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해 가을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함형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발간했고 몇 달간의 만주 방랑 끝에 돌아온 그는 1941년 초 첫 시집 ‘화사집’을 펴냈다.

 

이 시집에서 악마적 관능의 세계를 파고들어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려지기도 했다.1943년 9월 최재서가 운영하고 있던 친일성향의 출판사 인문사에 들어간 서정주는 잡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보며 친일 시와 종군기 등을 썼다.

 

서동진 해설사는 신념보다는 대세에 따른 것이었다고 강조했지만 이때부터 친일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8년 ‘귀촉도’, 1960년 ‘신라초’, 68년 ‘동천’,  75년 ‘질마재신화’, 97년 ‘80소년 떠돌이의 시’ 등의 시집을 내며 ‘시인중의 시인’, ‘한국이라는 부족언어의 주술사’, ‘시선’ 등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시의 최고경지를 이루며 격찬을 받았지만 일제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 시,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 후보의 찬조연사 및 당선축하 축시헌사,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발언 등으로 일제 및 독재권력에 아부했다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미당 시문학관 건립을 둘러싸고도 수많은 단체와 문학인들이 ‘변절한 문필가’라며 기념관 건립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우리말을 다루는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최고의 시인이었지만 시대조류에 영합한 기회주의자라는 오명을 남긴 서정주 시인은 지난 2000년 12월 24일 85세의 일기로 별세, 선운리 선영에 묻혔다.

 

‘천재시인, 변절한 문필가’, 미당 서정주 시인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 채 영천문협 회원들은 동백꽃이 만발, 장관을 이루고 있다는 선운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