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미술관이 들어서면서부터 영천시민은 물론 외지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화산면 가상리 주민들은 이 마을이 역사 이래 숱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을 구원하러 와 보니 조선 조정에는 인재들이 매우 많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여송은 그 까닭이 조선 산수가 수려하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가는 곳마다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고 전한다.
남진했던 이여송은 삼남대로를 통해 다시 북상하며 명으로 돌아갈 때 우리나라의 산세를 보면서 좌ㆍ우의 풍수를 보아 큰 인물이 날 만한 자리라며 수많은 명산의 혈맥을 잘라버리는 행위를 했다고 한다.
모산 마을에서 화남방면으로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가상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넌 후 농로를 따라 3~4백 미터 정도 들어가면 스무곡이다.
평소에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안내를 부탁받은 터라 미리 한번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한번 찾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방황한 뒤 동네어르신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길을 찾았고, 이곳에서 다시 키 높이만큼이나 자란 우거진 나무와 풀들을 헤치며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1시간 정도 산을 오르내린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지만 골이 깊어 핸드폰 수신이 되지 않았고 인적이 뜸해 사고를 당하여도 구조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한순간 긴장이 되기도 했다.
산 정상에서는 많은 위인들을 배출한 걸출한 명당이었지만 오히려 화가 되어 혈맥을 잘린 스무골을 내려다보며 산새들을 벗 삼아 잠시나마 세상 밖의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3미터 정도의 산혈이 잘려 길로 사용되고 있었고 앞쪽에는 유래를 기록해 놓은 소박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 곳에 전하는 구전은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용연을 선물하면서 충의공(忠毅公) 권응수 장군의 관상을 본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이 그의 지관을 시켜 충의공의 조상묘소를 살펴보고 오라고 명령했다.
공의 조부 참판공 휘 란(鸞)공의 묘소를 보고 간 명나라의 지관은 충의공조부의 묘가 용이 등천하는 형산(形山)인 용비등천혈(龍飛登天穴)이라고 보고하니 이여송은 그 후손이 더 이상 발복하지 못하게 용의 꼬리 부분을 잘라버리라고 했다.
산등(山嶝)을 끊은 이곳을 혈등(穴嶝)이라 하였고, 아래 골짜기는 임란에 창의한 공의 손자 운(雲), 충의공 응수(應銖), 응전(應銓), 응평(應平), 응생(應生), 응추(應錘), 응서(應瑞) 7인과 증손(曾孫) 치렴(致㾾), 구, 우(遇), 적(迪), 을생(乙生), 명(蓂), 윤(胤), 건(建), 진(進), 일(逸) 등 10인과 손서(孫婿) 김성달(金聲達), 조축(曺舳), 정우번(鄭于藩) 등 3인의 인척을 합하여 20인의 충의의사가 임란공신에 서훈(敍勳)되어 스무골이라 전해 오고 있다.
지난 2002년 10월 임란신녕의병창의추모회에서 왜구의 잔인한 만행을 보존하기 위해 이에 표석을 세웠다고 했다.
한편,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땀을 식히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위안을 삼는 가상리 추곡마을 중앙에는 ‘풍영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느티나무가 5백여 년의 풍상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었다.
나무가 심어질 당시를 생각하며 잠시 쉬고 있으려니 한 할머니가 노구를 이끌고 나무 밑 의자로 힘든 걸음을 했다. “할머니, 혼자 오셨어요?”라고 물으니 “60여 년 간 거의 매일 찾아왔다”며 이곳은 이 마을 안동권씨 문중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백여 년이 넘은 것으로, 안동권씨 신녕 입향조인 구의헌(九宜軒) 권열(1424-1507)이 조선 연산군 2년(1496) 광주목사 재임 시 연산의 난정을 직간하고, 안동으로부터 楸谷里(추곡리)로 이거해 살면서 심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었으며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 나무아래에서 공자의 유풍에 힘입어 시와 학문을 강론하고 예절과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후손들은 임진왜란을 당해 형제숙질들이 이곳에서 창의, 이름이 청사(靑史)에 올랐으나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음은 모두 이 나무를 보호하는 뜻에서 예의와 사양(辭讓)하는 가풍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창의는 예의에서 발휘되고 무공은 활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훗날 자손들로 하여금 모두 여기에서 절문(節文)하며, 여기에서 덕행을 보게 된다면 곧, 구의헌공(九宜軒公)이 후손들에게 내려준 두터운 그늘이 이 나무와 더불어 모두 크다 할 것이다.
후일 공의 현손(玄孫) 풍영정(風詠亭) 권응도(權應道, 1616-1674)가 이 나무의 이름을 풍영정이라 하고 자신의 아호 또한 이것으로 하여, 나무주위에 배근축석(培根築石)하여, 때때로 관동(冠童)들과 시 읊고 습례(習禮)하였다고 안내판에 기술(1669)되어 있었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도를 넘고 있다. 고구려와 부여, 발해 역사를 포함해 한강유역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삼으려는 술책을 부리며 한민족의 역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일본의 망발에 대해서는 쉽게 흥분하는 한국인들이 중국의 만행에 대해서는 너무 초연한 것 같아 많은 걱정이 된다. 역사를 제대로 보고 우리 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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