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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 걸으며 늦가을 정취 만끽 - 금강산성터 일대 등산객에 인기

이원석(문엄) 2006. 11. 21. 12:03

▲ 금강산 등산로는 길이 잘 닦여져 있고 경사가 완만하며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영천 그린환경센터 앞뒷 길)

 

완연한 늦가을이다.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영천의 금강산에서 옛길을 걸으면서 옛 정취를 느끼고 낙엽을 밟으면서 가족들과 함께 늦가을을 음미하는 것은 어떨까?

 

영천시민들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는 그린환경센터 입구 체육공원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총거리 3㎞, 소요시간 1시간. 어린 자녀들의 손을 잡고 걸어도 충분히 완주할 수 있는 무난한 구간으로 맑은 바람소리와 산새소리를 들으면서 잘 정비된 체육시설에서 운동을 하며 도토리 줍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린환경센터 입구 체육공원이 출발지이다.

 

▲ 금강산성 표석비와 함께 마련된 운동기구는 시민들에게 사랑받는다.

 

주민지원협의체에서 안내판을 곳곳에 설치해둬 산행의 무료함을 해소시켜 주었고 3번 표지판에 있는 말굽바위가 황보능장 장군과 용마에 얽힌 전설을, 4번 표지판 체육시설에 지난 1995년 영천향토사연구회와 보이걸스카우트 골벌지역대에서 세운 표석비(글쓴이 노재환)가 금강산성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탄약창이 들어서면서 철조망이 둘러쳐져 1500년 전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다 걸을 수는 없지만 영천의 부족국가였던 골벌국의 중심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과 백석의 설화, 나말선초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황보능장 장군의 기개를 느끼면서 산행을 한다면 더욱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 금강산성에서 바라본 영천시내 전경

 

영천에 금강산이 있다고 하면 많은 시민들이 의아해할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영천의 금강산에 대해서 “신라에 네 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는 대신들은 그곳에 모여서 모의하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라고 해 신라의 신령한 네 땅 중의 하나로 영천의 금강산이 언급되고 있었다.


김유신은 서현 각간 김씨의 장자로 진평왕 17년(595)태어났다. 아우는 흠순이며, 맏누이는 보희, 그 아래 누이의 이름은 문희이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 많이 있었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년에 검술을 익혀 국선(호랑)이 되었다. 이때 백석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여러 해 동안 낭도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

 

김유신은 고구려와 백제를 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제가 공과 함께 저들의 나라에 들어가 정탐을 한 연후에 일을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했다.

 

김유신이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두 여자가 나타나 따라왔다. 골화천(영천 금강산)에 이르러 유숙하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김유신이 세 여자와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김유신에게 맛있는 과자를 주었다.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마음을 서로 허락하고 즐겁게 담소하면서 자신의 실정을 이야기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공이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사오나 원컨대 공이 백석을 잠시 떼어놓고 수풀 속으로 들어가시면 그때 실정을 다시 말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낭자들이 문득 신으로 변하고 나서 말을 했다.

 

“우리들은 내림(경주 낭산), 혈례(청도 오산), 골화(영천 금강산) 등 세 곳의 호국신인데 지금 적국의 사람이 당신을 유인해 데리고 가는데도 당신은 그것을 모르고 따라 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말리려고 여기에 온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자취를 감췄다.

 

김유신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을 하고 나와 골화관에 들어 유숙하면서 백석에게 말했다.

 

“지금 타국으로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어버리고 왔구나. 함께 집으로 되돌아가 문서를 가져오도록 하자” 백석을 타일러 집으로 되돌아오자 유신은 백석을 결박해 놓고 사실을 문초했다.

 

백석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우리나라 대신들에게 나는 이런 얘기를 들었다. 즉 신라 김유신의 전신은 우리 고구려 국의 복술가였던 추남이다. 한번은 국경에 물이 역류하는 일이 있었다.

 

왕은 그에게 점을 쳐 보게 했다. 추남은 점괘를 뽑아 보고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운이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왕은 놀라고 왕비는 대노하여 이것은 요괴스러운 여우의 말이라 하고 왕에게 고해 추남을 다시 다른 일로 시험해 보아 알아맞히지 못하면 죽여 버리도록 했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합 속에 감추고서 추남에게 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추남은 그 속엔 틀림없이 쥐가 들어 있고 그 쥐는 여덟 마리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한 마리 쥐를 두고 여덟 마리라고 했으니 그것은 잘못 맞힌 것이라 하고 추남을 죽이기로 했다. 추남은 형장에 나아가 맹세했다.

 

‘내 죽은 뒤에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태어나 이 고구려를 꼭 멸하고 말리라’고. 추남의 목은 베어졌다.

 

합 속에 넣었던 쥐를 꺼내 배를 갈라 보았더니 그 속엔 새끼 일곱 마리가 들어 있었다.

 

이리하여 앞서 추남이 했던 답변이 맞았음을 알았다. 추남을 처형한 그날 밤에 왕은 꿈을 꾸었다.

 

왕은 그 꿈에서 추남이 이곳 신라 서현공의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신하들에게 왕이 꿈을 얘기했더니 모두들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만, 과연 그 맹세대로 실현되나 보다고 하고, 그리고 나를 이곳에 보내어 추남의 복수심의 화신인 당신을 유인하는 계략을 쓰게 했던 것이다."

 

김유신이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세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다 현신해 제사를 받아 흠향했다.(삼국유사 ‘김유신 조’)


“신라 말 영남의 제주(諸州)가 견훤에게 함락될 때 황보능장이 골화· 도동현 등에 성을 쌓고, 이 성에 의거하여 백성을 안심시키고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게 하였는데, 태조가 나라를 세우자 귀부(歸附)하였고 현재 성지가 남아있다고 한다.”(영양지 ‘성곽조’)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는 황보능장과 같은 시기, 같은 장소인, 경애왕  2년 10월 고울부에 능문이라는 장군이 나오는데 활동시기·지역·내용을 함께 고려해 보면 능장과 능문은 동일인으로 여겨진다.

 

9월에 견훤이 이곳에 침입했을 때 약 2개월 간 견훤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을 정도로 성의 견강함과 높은 전투력을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사

 

완산동 뒷산을 일컫는 금강산은 금강골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도 대한불교 태고종인 금강사가 자리 잡고 앉아 당시의 전통을 이어주고 있다. 특히, 단풍이 물든 가을과 봄, 겨울의 운치가 일품이다.

 

고려 태조로부터 좌승이라는 관직을 받았던 금강성주 황보능장의 묘는 3사관학교 내에 있으며 경북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직경 16m, 높이 5m의 원형분 앞에 상석과 향석을 두고 우측 전방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현존하는 신도비는 1947년에 건립한 것으로 조선 영조 43년(1767)에 세운 옛 비의 비문과 일치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3사관학교를 만들면서 당시 이곳에 있던 많은 묘를 이장하면서도 군인들의 귀감이 되는 황보 장군의 묘만은 그대로 두게 되었다고 한다.


영천의 중등학교 교사로 7여 년 간 근무하면서 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던 중 지난 90년 8월, 향토문화연구회에서 발간한 향토문화 제5집에 ‘골화성에 대하여-골화소국과 관련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던 이재수(55·문학박사)씨는 “금강산은 신라삼산의 하나로 비정 되는 곳으로 안 완산동의 구릉지는 골화소국의 중심부이고 대사(大祀)를 올린 곳으로 생각된다.”며 안 완산 철길 건너편 산의 북쪽 사면에는 20여기 이상의 규모가 큰 고분들이 무리 지어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이 발굴되면 골벌국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자료가 출토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나말 여초의 대표적인 호족인 황보능장을 통해 당시 호족들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할 수 있는 이 일대에 산성공원과 옛길, 골화소국터, 고분공원 등 시민휴식공간과 역사교육 현장이 조성된다면 더없이 훌륭한 문화유적지이자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후 각 지역마다 그 지방을 아우를 수 있는 상징을 찾아 만드는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 영천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삼국통일을 이끈 김유신 장군을 구해주었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한 금강산성이야말로 ‘호국충절의 고장’ 영천의 정신을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모으고 발굴하여 영천의 중심부인 이 일대에 박물관을 지어 우리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일부 시민들만의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