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답사와 여행이야기(이원석 편집위원)

[스크랩] 성황당봉수대 통일기원 봉화제

이원석(문엄) 2007. 7. 15. 23:43

평화와 통일염원 불꽃 '활활' 타올라

 

 

시계가 탁 트여 전망이 수려한 쌍계동 봉화산 정상에 자리잡은 성황당봉수대, 지난 14일 저녁 이곳에서는 수십 발의 폭죽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활활 타올랐다.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임괄)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이날 행사는 제85회 전국체전맞이 통일기원봉화제 ‘평화와 통일염원의 불꽃으로 타올라라’의 1차 총 점검으로 경주에서 전화로 통일의 불을 받아 의성으로 전해주었다.

지난 10일 회장단의 사전답사에 이어 13일 인부들을 동원, 길을 닦아놓았지만 간간이 내리는 비로 인해 미끄러워진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전국 봉수대를 연결, 통일을 염원하는 자리였던 만큼 20여명의 향토사회원들 얼굴에는 뿌듯함이 묻어있었다.

문화사랑모임에서 주도하는 통일기원 전국 봉화제는 8월말 봉수답사단 수련회, 9월중에 2차 총 점검, 10월중 최종 총 점검을 통해 미비점을 보완한 후 전국체전 개막 하루전인 10월 7일 저녁에 전국을 연결하는 봉화제가 열려 청주 것대산으로 모을 계획이다.

영천향토사연구회 이임괄 회장은 “가장 효과적인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옛날처럼 횃불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영천시민들의 통일염원을 담아 한민족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동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며 “앞으로 봉수대의 원형을 복원하는 방안을 강구해보겠다”고 밝혔다.

성황당봉수대가 있는 쌍계동은 두 강이 합한 곳이란 뜻으로 팔공산 부근에서 발원된 신녕천과 보현산 부근에서 발원된 고현천이 마을 앞에서 합류한다. 동쪽으로는 조그만 평야를 지나 금호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사모산(思母山)이 우뚝 서있다.

남쪽으로는 오수동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화룡동과 연접하고 있다. 쌍계동에는 한림지, 성지곡 등이 있다. 한림지는 고려시대 한림학사가 거주했던 지역이고 성지곡은 정부에 소속된 풍수지리관인 성지(聖知)가 이곳을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고대에 있어서 국가 방어체계의 하나인 봉수(烽燧)는 원거리 교통수단 중에서 가장 대표적일 것으로 전파 등을 활용할 수 없었던 전근대의 기술적 수준에 있어서는 매우 우수한 통신수단의 하나였다. 봉수는 ‘봉(烽:횃불-炬)’과 ‘수(燧:연기-煙)’로 구성되어 있으며 봉은 야간에 횃불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는 형태이고 수는 낮에 연기를 올려 통신을 하는 것이다.

봉수는 대략 수 십리씩 일정한 거리마다 후망의 요지가 되는 산 정상에 봉수대를 두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피우는 주연야화(晝煙夜火)의 방법을 취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봉수는 가장 효율적인 통신수단이었으며 남방연변에서의 빈번한 왜구의 침략과 서북변경 지역의 간헐적인 야인의 침구, 신라통일 이후 1,300여 년 동안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지배가 계속되는 정치적 상황이었으므로 이 봉수제도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만리장성 봉화, 아메리카 인디언의 단거리 신호방법, 그리스 암어화 봉화 체계처럼 변방에서 일어난 위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는 통신제도로서 근대 통신시설인 전신전화가 설치되면서 봉수제도가 폐지된 조선후기까지 국방상 중요한 임무를 띤 속보, 경비, 전신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봉수는 변방의 위급 상태를 중앙에 알려주는 기능 외에도 1홰(炬)의 봉수 신호는 아무 일도 없다는 의미였으며 백성들은 1홰의 봉수 신호가 오른 것을 매일매일 관찰하며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였으므로 생업안정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기도 한 조상들의 호국의 얼이 살아 숨쉬는 호국의 문화유적이며 통신문화의 유산이다.

봉수망은 전국의 주요 간선로를 5로(路)로 나누고 이 5로의 기간선로를 직봉(直烽), 직봉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는 보조선을 간봉(間烽)이라 불렀고, 이 모두가 한성의 목멱산(남산) 봉수로 각각 연결되었다. 또 간봉은 본봉(本烽)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는 역할도 했으나 국경방면의 전선초소인 요망소 역할도 했으며 본진(本鎭), 본읍(本邑)으로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도 있었다.따라서 제1로(路)는 목멱산 봉수대에서 동쪽에서부터 제1대에 연결되는데, 기점인 영안도(함경도), 강원도, 경기도를 거쳐오는 양주 아차산의 봉수이다.

제2로는 목멱산의 제2대인데, 기점이 경상도 동래에서 경북, 충북, 경기도를 거쳐 광주 천천령으로 오는 봉수로 영천은 여기에 해당된다. 제3로는 제3연대인데, 평안도의 압록강 중류에서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의 내륙을 거쳐 경기도 고양의 염포나루로 오는 봉수이다. 제4로는 제4대에 연결되며, 평안도 의주에서 그 서해안, 황해도의 서해안을 거쳐 경기 북부 모악 서봉(西烽)으로 오는 해로의 봉수이다. 제5로는 제5대에서 받는데, 순천 돌산도 방답진에서 전남, 전북의 해안을 거쳐 충남의 내륙과 경기도 및 강화의 해안을 돌아오는 봉수이다.

그 외 제주도 봉수는 제주도 순환 일주 봉수로 내란 등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경봉수(京烽燧)에 전달되지는 않았으며 직봉 25, 간봉 38개소이다. 고대부터 그 기능을 발휘했던 우리나라의 봉수제도는 조선 세종 때에 봉수법이 마련되어 성종 때 대체로 완비되었다. 북방 호족(胡族)인 여진족에 대해 6진을 설치하여 침입을 방어하고, 남쪽 해안의 왜구를 막기 위한 연변 연대(煙臺)를 설치하여 막음으로써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영토를 보전, 확장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이런 국가적 정책의 수행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봉수가 정상적인 기능을 못하여 중간에서 끊어지고 적변이 있어도 평일과 같이 1홰만 올리는 일이 생겼으며, 성종 때에는 남해안에 일어난 적변에 허설화(虛說化)했다하여 무용론이 제기되는 등 문제가 발생하여 연산군 10년 11월 일시에 전폐되었다.

이후 중종 때에 다시 부활되었으나 선조 때에 삼포왜란과 사량도대란 등 남해안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나 임진·정유왜란 때에도 봉수가 오르지 않아 다시 무용론이 대두되었다.봉수제가 약화되고 그 기능이 정상적 구실을 못하게 되자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38년(1605) 4월 파발제가 등장했고 공문을 전달하기 위한 역참(驛站)으로 기발(騎撥)과 보발(步撥)을 두었다.

결국 조선 말엽 근대적 통신시설인 전신전화가 설치되자 그 존재가치가 희박하게 되어 경상남도 망산 봉수와 의봉산 봉수가 고종 26년(1889) 먼저 폐지되고 고종 31년(1894)에 모든 봉수가 폐지되었다. 한편,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는 지난 1986년 한국보이스카우트 경북연맹 1270 B.B.S 골벌지역대와 공동으로 호국유적지 발굴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영천지역 봉수대 및 성곽조사를 필두로 1987년 대구MBC ‘팔공산’ 기획으로 봉수대 거화를 시범적으로 실시했고 1993년부터는 점차 인적이 끊어짐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파묻혀 질 위기의 호국문화유산에 대한 보존 관리를 위해 봉수대 및 성곽지 표석 설치사업을 펼쳐왔다.

봉수대 표석은 성황당 봉수대(쌍계동, 구 봉수대. 93. 12. 12)를 시작으로 여음현(신녕면 왕산리, 94. 1. 9)·방산(북안면 임포리, 94. 3. 13)·성산(청통면 신덕리, 94. 11. 23)·구도현(청통면 계지리, 94. 12. 12)·소산(고경면 파계리, 95. 1. 8)·성황당 봉수대(금호읍 석섬리, 신 봉수대. 99. 6. 7)에 설치했고, 금강산성(완산동, 95. 3. 26)과 영천읍성(중앙초등·호연정, 95. 6. 18), 백암산성(임고면 금대리, 96. 1. 19)에 성곽지 표석비를 세운바 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방어와 평화를 위해 사용되어 왔던 봉화가 경기침체로 인해 시름에 잠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통일염원을 모아 백두에서 한라까지 방방곡곡을 밝혀 민족 대 단결의 초석을 놓으려는 원대한 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오는 10월 7일에 열릴 통일기원전국봉화제를 기대해 본다.

출처 : 영천뉴스24(yc24.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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