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답사와 여행이야기(이원석 편집위원)

[스크랩] 성내동(호연정, 숭렬당)

이원석(문엄) 2007. 7. 15. 23:43

거북바위 언덕 '호연정' 실학선구자 이형상 기려

 

중복이었던 지난달 30일 저녁, 병와유고각 앞마당에서는 감미로운 색소폰 음률 속에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영천향토사연구회 이원조 사무국장의 주도로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의 번개모임이 열린 이날 수원, 여수, 부산 등지와 대구·경북 일원에서 40여명의 회원들이 호연정에서의 작은 만남을 함께 하고자 속속 찾아들었고 영천연예협회 김천중 회장과 문하생들이 전통가옥에서 현대음악 연주를 펼치며 먼 곳에서 방문한 귀한 손님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사했다.

특히, 다음날 영천향토사연구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이임괄씨가 전통조경에 맞게 복원한 나무들을 감상하며 유물과 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져 시원한 바람과 함께 여흥을 돋워주었다.호연정과 숭렬당으로 유명한 성내동은 여러 지역의 자연부락이 통합되어 이루어진 마을이다. 지난 시대 성 안쪽의 서편 마을인 성내동을 비롯하여 성 밖 서쪽의 구호동, 서남쪽의 지소동, 그리고 동쪽의 과전동과 인접한 서과동 일부, 지침동 일부가 합하여 명명되었다.

또 이곳에는 속칭 구터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강 건너편 오수동에 역촌이 생기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예전에 살던 동네를 가리켜 부르게 된 이름이다.거북바위 언덕 위에 있는 호연정은 조선시대 실학의 기초를 닦은 숙종·영조조의 문인 병와 이형상(1653∼1733)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30여 년 간 후학양성과 저술에 전념한 정자이다.

인천에서 효령대군의 9대손으로 태어난 이형상은 문과에 급제한 뒤 경주부윤, 제주목사, 영광군수, 한성부윤 등을 지냈으며 그때마다 선정을 베풀고 큰 치적도 남겼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남인에 속해 당쟁의 화를 겪기도 했다. 벼슬을 그만둔 그는 영천 성두둘(현 성내동)에 호연정을 짓고 첫 주인이 되었다.영천은 이형상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곳이었으나 삼산이수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영천의 산수가 아름답고 또 포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어하던 차에 영천지방 친구들의 권유로 제2의 고향이 된 것이다.

안팎 두채와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 뒤에는 ‘육우단’이라는 연못을 팠다. 육우란 소나무, 국화, 매화, 대나무, 계수나무, 연꽃을 말하는 것으로 연못 둘레에 정원을 만들었다. 정자는 호연정이라 부르고 누는 이양루라 명명했다.병와선생은 호연정에 거주하면서 악학편고, 학악습령, 강도지, 남환박물지, 탐라순력도를 비롯한 저서 225책 1,800여권을 저술했다.

이 방대한 저술과 유물을 일괄하여 국가에서 보물 제652호로 지정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보물로 지정된 ‘탐라순력도’는 병와가 화공인 김남길을 시켜 그린 것으로 말의 터럭 하나까지도 섬세하게 그려진 채 화려한 색채를 잃지 않고 있어 예술적 가치가 높다.

병와는 국학 분야에서도 ‘악학편고’ 등 종래의 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16종의 저서를 남겼다. 현재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 저술 총 142종의 전모가 모두 밝혀진다면 실학과 국학의 선구자로서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중요민속자료 제119호로 지정된 유품으로는 인장 23종과 호패 9점, 홀 1, 옥피리(상자 포함) 1, 칼 2, 인영(상아 1, 호박 1, 옥 1, 흑옥입영 2), 거문고 1, 관자 4(옥 2, 호박관자 2) 등 총 12종 59점이다. 이형상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영천향토사연구회와 초람서예연구실 박세호 원장은 공동으로 내년에 병와선생의 유상을 목판으로 새길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보물 제521호인 숭렬당은 세종 15년(1433)에 건립된 중국식 건물로서 그 구조와 형태가 아름답고 특이하다.

이 건물은 세종 원년(1419) 쓰시마정벌과 야인토벌 등에 혁혁한 공적을 남겨 일명 복장군이라 불렸던 명장 위양공 이순몽이 평소 기거했던 가옥이다. 관향이 영천이고 1386년 이응의 아들로  영천에서 태어난 이순몽은 여진을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큰공을 세웠으나 후손이 없어 영천의 유림들이 봉제사해 왔다고 한다.

1970년에 보물로 지정된 후 해체복원과 담장 보수 및 부속시설 공사가 진행되어 지금은 완전히 그 원형을 복원하고 있다. 남향인 이 건물은 남쪽 숭렬당과 뒤쪽 사당이 남북으로 배열되고 사주(四周)는 잡석토병이 장방형으로 축조되었으며 후문 양측에는 별조(別造) 내병이 있어서 전체가 숭렬당 구성(區城)과 사당 구성으로 나뉘어 있다.

잡석을 쌓은 높이 1m 미만의 토상석단(土床石壇)에 덤벙 주초석을 배열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별당식으로 주간(柱間)은 어향(御向)이 약 30.3㎝ 더 넓으며 6칸 대청이 기본이나 대청의 양측면은 똑같이 2칸통(間通)의 온돌이 딸리고 온돌의 개구(開口)는 전면과 대청벽 쪽에 각 두 개의 이분합(二分閤)과 한 개의 외짝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양측 온돌간 대청은 기단부를 따내어 아궁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각 1칸씩의 누마루로 되었고 전면 주열외측(柱列外側)으로 3칸에는 긴 툇마루를 부설하였다. 큰 부재(部材)의 익공, 부분적으로 완곡 유력한 한편 건실한 기풍을 띤 초각(草刻)행공 배바닥의 간략한 초각 등 조선초기의 수법이 보이고 있으며 현재는 장군의 위패를 받들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출처 : 영천뉴스24(yc24.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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