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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가상리 혈맥 잘린 '혈등'엔 산새소리만…

이원석(문엄) 2006. 11. 26. 11:12
▲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명에 의해 혈맥이 잘려졌다고 전하는 혈등

 

시안미술관이 들어서면서부터 영천시민은 물론 외지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화산면 가상리 주민들은 이 마을이 역사 이래 숱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을 구원하러 와 보니 조선 조정에는 인재들이 매우 많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여송은 그 까닭이 조선 산수가 수려하기 때문이라 생각해 가는 곳마다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고 전한다.

 

남진했던 이여송은 삼남대로를 통해 다시 북상하며 명으로 돌아갈 때 우리나라의 산세를 보면서 좌·우의 풍수를 보아 큰 인물이 날 만한 자리라며 수많은 명산의 혈맥을 잘라버리는 행위를 했다고 한다.

 

▲ 산 정상부에 혈등이 위치해 있다.

 

모산 마을에서 화남방면으로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가상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넌 후 농로를 따라 3~4백 미터 정도 들어가면 스무골이다.

 

평소에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안내를 부탁받은 터라 미리 한번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한번 찾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방황한 뒤 동네어르신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길을 찾았고, 이곳에서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1시간 정도 산을 오르내린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지만 골이 깊어 핸드폰 수신이 되지 않았고 인적이 뜸해 사고를 당하여도 구조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한순간 긴장이 되기도 했다. 

 

▲ 혈등과 스무골 유적비 앞면(위)과 뒷면(아래)

 

산 정상에서는 많은 위인들을 배출한 걸출한 명당이었지만 오히려 화가 되어 혈맥을 잘린 스무골을 내려다보며 산새들을 벗 삼아 잠시나마 세상 밖의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3미터 정도의 산혈이 잘려 길로 사용되고 있었고 앞쪽에는 유래를 기록해 놓은 소박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 곳에 전하는 구전은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용연을 선물하면서 충의공(忠毅公) 권응수 장군의 관상을 본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이 그의 지관을 시켜 충의공의 조상묘소를 살펴보고 오라고 명령했다. 공의 조부 참판공 휘 란(鸞)공의 묘소를 보고 간 명나라의 지관은 충의공 조부의 묘가 용이 등천하는 형산(形山)인 용비등천혈(龍飛登天穴)이라고 보고하니 이여송은 그 후손이 더 이상 발복하지 못하게 용의 꼬리 부분을 잘라버리라고 했다.

 

산등(山嶝)을 끊은 이곳을 혈등(穴嶝)이라 했고, 아래 골짜기는 임란에 창의한 공의 손자 운(雲), 충의공 응수(應銖), 응전(應銓), 응평(應平), 응생(應生), 응추(應錘), 응서(應瑞) 7인과 증손(曾孫) 치렴, 구, 우(遇), 적(迪), 을생(乙生), 명(蓂), 윤(胤), 건(建), 진(進), 일(逸) 등 10인과 손서(孫婿) 김성달(金聲達), 조축(曺舳), 정우번(鄭于藩) 등 3인의 인척을 합해 20인의 충의의사가 임란공신에 서훈(敍勳)되어 스무골이라 전해 오고 있다.

 

지난 2002년 10월 임란신녕의병창의추모회에서 왜구의 잔인한 만행을 보존하기 위해 표석을 세웠다고 했다.

 

▲ 혈등에서 바라본 가상리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도를 넘고 있다. 고구려와 부여, 발해 역사를 포함해 한강유역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삼으려는 술책을 부리며 한민족의 역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일본의 망발에 대해서는 쉽게 흥분하는 한국인들이 중국의 만행에 대해서는 너무 초연한 것 같아 많은 걱정이 된다. 역사를 제대로 보고 우리 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