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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공 이온수 장군 묘비제막식

이원석(문엄) 2006. 11. 21. 19:42

  
 

 ‘충효를 다한 이 장군’ 오늘도 들판 누비며 애국심 일깨워…

가은공 이온수 장군 묘비제막식 화남면 안천리 큰골서 열려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이온수 장군의 묘비 제막식이 지난 8일 화남면 안천리 큰골(대곡) 묘소 일원에서 열렸다.

 

경주이씨 국당공파 가은공 종회(회장 이경탁) 주관으로 열린 이날 묘비 제막식에는 이병희 대구경북화수회장과 이달희 영천시 화수회장, 이상근 시의원 등을 비롯한 3백여 명의 후손들이 원근각처에서 참석해 훌륭한 선조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냈다.

 

묘비제막에 이어 선조에 대한 묵념, 유공자 표창, 인사 및 축사, 결산보고, 입석고유 묘사행사, 폐회 순으로 이어졌으며 행사를 마친 후 정성스럽게 준비한 점심을 먹으며 종친간의 정을 나눴고 오후에는 윷놀이를 하며 쌓인 회포를 풀기도 했다.

 

가은공 종회 이경탁 회장은 “불원천리하고 많이 참석한 종친들께 감사드린다. 가은공 할아버지처럼 목숨을 바쳐 이 나라를 지켜준 훌륭한 선조들이 있기에 오늘날 후손들이 좋은 땅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며 “앞으로 입향조 할아버지 묘소(공덕 진등)외 3위를 성역화 할 계획인 만큼 종친들의 많은 협조를 기대한다.”고 인사말을 가름했고 이상근 청년회장은 “집안 어르신들이 닦아놓은 길을 걸으면서 크신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오는 29일 영화교 둔치에서 열리는 화수회 청년회 체육대회에도 많이 참석해 주시기를 당부했다.

 

화산지와 가은행장 등에 실린 이온수 장군의 활약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92년 4월 13일(선조 25) 잔악한 왜병은 우리의 강산을 짓밟기 시작했다. 곧 임진왜란이다. 전후 7년여에 걸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은 있는 힘을 다해 왜적을 막아냈다.

 

이온수(蘊秀) 장군의 자는 여실(汝實), 호는 가은(稼隱), 관향은 경주며 시조는 신라 6촌중의 하나인 알천 양산촌장 알평(謁平)이고 고조 옥삼(玉三ㆍ사과)때부터 옛 신녕현 화동(花洞)에 입향했으며 아버지는 식(植ㆍ무과 사헌부 감찰)이다.1558년(명종 13) 11월 21일 현 화북면 화동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뛰어난 용모에다 병정놀이를 즐기며 남다른 점이 많았다.글을 배움에 따라 대의를 알고 행동하며 틈틈이 활쏘기와 병법을 배워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게 했다.

 

30세 때 부친상을 당했으나 지성으로 시묘살이 3년을 마쳤고 34세 때인 임진년에 왜병들이 물밀듯이 쳐들어와 부산 동래 등이 무너지고 경주에 머무르던 왜병은 영천 곳곳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이 장군은 어머니를 모시고 지금의 화남면 삼창리 한천 뒷산에서 피난 중 아랫마을에 방아를 찧으러간 사이에 왜놈들이 어머니 심(沈)씨를 찌르고 양식을 빼앗아갔다. 영문을 모르고 되돌아온 이 장군이 까닭을 물은즉 어머니는 말도 못하고 손가락 셋을 굽히면서 세상을 떠났다. 격분한 이 장군은 활을 잡고 뛰쳐나와 산속에서 왜놈 셋을 찾아 죄다 쏘아죽이고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훈련봉사 권응수(權應銖) 장군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장례를 치러주면서 “지금 왜병들이 이처럼 우리 강산을 짓밟음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는데 그대는 나와 함께 나라의 원수를 갚아 충효를 다함이 어떠냐?”고 권하니 “양민을 학살하고 노략질하며 무덤을 파헤치는 이 판국에 어찌 어머니 묘소를 떠나겠느냐?”고 했고 “그대와 같이 용맹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 어찌 나라의 원수를 갚겠느냐?”는 권 장군의 재차 권유에 어머니 무덤 앞에서 울며 일어설 것을 아뢰고 권 장군과 함께 떠나 그해 5월 6일 수천 명이 한천근처에서 노략질하는 것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청송ㆍ군위ㆍ여음동(餘音洞)에서, 7월에는 신녕 60여 의병과 함께 군위에서 영천 쪽으로 가는 적을 맞아 싸워 수십명의 목을 베고 총ㆍ창ㆍ검ㆍ말들을 빼앗고 7월 2일에는 현 화산면 지림원(祉林院), 26일에는 권응평(權應平), 홍천뢰(洪天賚), 정대임(鄭大任) 등 5백여 장정과 함께 선봉으로 영천성에 쳐들어가니 대군이 뒤따라 쳐들어왔으나 그날은 날이 어두워 영천성을 뺏지 못하고 그 다음날인 7월 27일 다시 남문으로 쳐들어가니 적은 무너지기 시작해 객사와 명원루(明遠樓ㆍ현 조양각) 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 장군은 크게 소리쳐 “불을 놓을 테니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은 빨리 성 밖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뛰쳐나온 후 성에다 불을 놓으니 이리저리 몰리던 적은 앞강에 빠져죽고 달아나다 잡혀 죽은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이고 불에 타는 냄새는 10리 밖까지 풍겼다. 잡혀갔던 우리 동포 1천9백여 명은 모두 엎드려 절하며 고마워했다.

 

그해 8월에는 손덕순(孫德純), 최인제(崔仁濟), 정의번(鄭宜藩), 권응수(權應銖) 장군 등과 함께 경주에 몰렸던 적을 무찔렀고 다음해인 1593년 2월에 권응수 장군, 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함께 문경 당교(當橋), 산양(山陽)에서, 7월에는 밀양에서, 1594년 4월에는 충청도 창암(倉巖)에서, 다음해 4월에는 영일에서 적을 무찔렀다.

 

1597년 7월에 다시 왜군이 쳐들어옴에 권응수 장군과 함께 공훈을 세웠기에 그해 10월에 훈련원정의 벼슬에 올랐고 임진ㆍ정유 두 번의 왜란에서 세운 공훈으로 선무원종이등공신이 되었다. 권응수 장군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이 장군은 권 장군과 함께 전장에서 돌아와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니 모두들 ‘충효를 다한 이 장군’이라 불렀다. 62세에 돌라가시니 화남면 대곡에 묘소가 있고 화남면 대천2리의 학천사(鶴川詞)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오늘도 이 장군의 충효정신은 우리 고장의 들판을 누비며 우리들의 애국심을 일깨워주고 있으리라.

 

한편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한천뒷벌에 임란의병으로 참전했던 의병장들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의 성금과 정부지원금으로 백의사를 건립, 43위의 위패를 봉안했고 임란의병 한천전  승첩지(壬亂義兵漢川戰勝捷址)가 지난 2월 16일 경상북도고시 제2006-63호로 경상북도문화재 기념물 156호로 지정되면서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게 되어 이날 행사에 참가한 이온수 장군의 후손들에게 또 다른 기쁨을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