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하늘이 푸른 가을날, 영천역에서 아들과 함께 원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 다목적 여행이다.
올해 하루밖에 사용하지 못한 연차휴가를 사용하고 87년 5월 제대한 이후 27년 동안 단 한 번도 근무했던 부대에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과 삼림욕을 하면서 절정을 맞은 늦가을 치악산 단풍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요즘 고민이 생긴 작은아들과 남자대 남자로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차여행을 통해 복잡해진 일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자 했다.
김밥을 산 후 “오늘은 아빠와 둘이서 대화 많이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약속하면서 오전 9시 53분에 영천역을 출발하는 원주행 무궁화호에 올랐다. 지금까지 둘이서 하는 가장 긴 여행이 아닌가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3시간 50여분 만에 원주역에 도착하니 먼저 등록문화재 제138호인 급수탑이 눈에 들어온다. ‘역 저 뒤편에 개구멍이 있었는데…….’ 군 생활을 하면서 외박 갔다가 귀대할 때 헌병들 눈을 피해서 다녔던 바로 그 역이 지금까지도 자리 잡고 있었다.
원주역 앞 정류장에서 구룡사행 41번 시내버스를 탔다. 10여분 지나자 36향토방위사단이 눈에 들어왔다. 27개월간 의무대 서무계로 근무하면서 남자가 되고자 노력했던 곳, 많은 추억이 담긴 곳이다.
5월 말에 제대하고 6월 초에 서울 누나 집에서 부대로 전화하니 후임병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날 맛있는 거 많이 사서 면회 가겠다고 약속하고 저녁에 훈련소 동기를 영등포역 시계탑 앞에서 만나러 갔다.
가는 길에 여자 두 명이 팔짱을 끼고 당기는 바람에 따라 들어간 골목길에 깡패 두 명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사창가였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무조건 놀다가 가라고 윽박지르는 그들에게 밀려 방에 들어가서 아가씨에게 차비 빼고 돈 다줄테니 보내달라고 사정해서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은 친구에게 얻어먹고 즐겁게 보냈지만 여비를 다 써버린 터라 후임병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27년이 흘러버렸다.
36사단을 지나 소초면사무소 방향으로 나아가니 단독군장 구보, 대민 모심기 지원, 유격훈련을 마치고 행군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특히 구룡사를 가고 싶었던 것이 여러 차례 구룡사로 행군을 갔지만 한 번도 절에도 들어가 보지 못한 당시의 아쉬움 때문이었다.
40여분 만에 치악산 구룡사에 도착하니 등산객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금강소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초록에서 갈색으로 변한 나뭇잎과 맑은 공기, 계곡물의 신선함을 만끽했다.
아홉 마리 용의 전설이 전하는 구룡사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한다며 어묵에 한잔에 천 원씩 하는 동동주를 마셨다. 둘 다 술이 약해 한잔에 얼굴이 불그스레해지고 취기를 느꼈지만…….
돌아 나오는 버스를 타고 도심에 내려서 문화의 거리와 중앙시민전통시장, 강원감영, 원동성당 등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저녁을 먹었다.
밤 10시 19분에 원주를 출발하는 열차를 기다리면서 엄마아빠가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들의 입장과 생각 등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영천에 도착하니 새벽 1시 50분, 몸은 다소 피곤했지만 기분 좋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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