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채약산에서 내린 산맥이 동남을 가로막고 있으며 동남 및 북쪽이 구릉지로 되어있다. 평지와 구릉지가 거의 반반정도로 된 곳이며 서북부는 구릉지를 넘어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동남쪽 높은 산에서 내린 맑은 물은 유명하여 이 물에 의해 재배된 미나리는 특히 유명하다.
2) 마을의 역사
▶ 술남ㆍ수남(水南) 약남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칠백면사무소가 여기에 있었다. 처음 이곳에 입주한 사람들이 어디를 파도 우물물이 잘 나오므로 물 수자의 수(水)와 동네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남(南)자를 따서 수남(水南)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용궁전씨(龍宮全氏)가 현재 살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영천복성에 큰 공을 세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전삼달(全三達) 장군의 후예로서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 도촌(島村) 수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을 이루는 분지가 마치 섬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옛날 이곳에 살던 전(全)씨 성을 가진 사람의 꿈에 말을 타고 거꾸로 쓰러져 피를 토하는 꿈을 꾸어 그곳을 가보니 핏자국이 있어 불길한 징조라고 여겨 당시 몇 집 안 되는 가구가 모두 수남으로 옮겨 폐동이 되었다고 한다.
▶ 청석리ㆍ청석비리(靑石碑里) 영천군수였던 이학래(李學來)가 흉년이 들어 칠백면민이 굶주릴 때 나라의 곡식을 풀어 면민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고마움을 청석(靑石)에 돌로 새긴 데서 생긴 이름이다.
▶ 가야(佳野) 지금으로부터 약 420여 년 전 유시(兪氏) 성을 가진 농부가 우거진 다래ㆍ머루 덩굴을 베어내고 논과 밭을 일구며 살았는데 수원(水源)이 좋고 땅이 기름져서 농사짓기에 편리한 들이라 하여 가야(佳野)라고 불렀다.
3) 마을의 특징
- 전설 : 가야는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 영천과 경산의 길목이었다. 귀인(貴人)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이 쉬어갔다 하여 임금말레라는 곳이 있으며 연대미상인 사찰이 채약산에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서 중이 불을 놓아 절도 타고 빈대도 죽였다고 한다.
- 쉰길바위 : 채약산 최고봉 아래에 위치한 바위의 높이가 쉰길<오십장(五十丈)>이나 된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 갈마제(堤) : 모양이 갈마모양이다.
- 어서각(御書閣) : 문무를 겸비한 영고정(穎皐亭) 전삼달(1570~1633) 장군의 정자,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사천전(沙川戰), 영천복성, 경주계림전 등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어서(御書), 교지(敎旨), 유물(遺物)이 있다.
- 운심정(雲深亭) : 자가 정보(亭甫), 호는 일암(一庵)인 조채신(曺采臣, 1717~1797) 선생의 정자, 선생은 통일격치강령(統一格致綱領), 삼역통회(三易統會), 일신건곤십익(一身乾坤十翼), 부자실록(夫子實錄) 등을 저술했다.
- 탄은정(灘隱亭) : 조선 순조 때 문사로 효우(孝友)가 돈독했던 이기조(李琪祚) 선생의 정자
- 특산물 : 채약산 맑은 물이 샘솟듯 솟아서 이것이 이어져서 작은 시내를 이룬다. 그 시내가 흐르는 양변에는 자연산 미나리가 많다. ‘가야미나리’ 예부터 영천시장에서 크게 각광을 받는 채소이다. 지금은 그 양이 수요를 못 따를 정도다. 청결, 맛, 모양 등이 완전 청정채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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