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첫차를 타니 경주에 7시에 떨어졌다. 3년만에 찾은 경주....당초 계획은 터미널에서부터 걸어서 대릉원을 지나 계림을 보고 반월성에서 궁상을 떠는 것이었는데 어제 사무실 동료들과 이미 그 좋다던 해질 무렵에서 시간을 보내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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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월성(자료:국가문화유산 정보)사적16호/면적193.845평방미터 /신라파사왕/경주시인왕동) |
가을의 햇살은 그것도 아침 해 뜬 직후의 그것은 똑같은 사물도 참으로 다르게 보여준다.
분황사 모전석탑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상층부가 뭉텅이로 잘려나가 뭉툭한 느낌의 이 탑이지만 예리한 가을의 아침햇살 덕분인지 날렵하게 보인다.
모전석탑의 기단부 네 귀퉁이에 자리 잡은 네마리의 사자상중 절입구에 가깝게 버티고 앉아 잇는 놈이 역시 제일 늠름하다. 싸늘한 햇살덕에 놈은 더 살기등등하니 목에 힘을 주고 있다. 구여운 놈~~~
분황사는 이 모전석탑의 특수한 미술사적 의미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하지만 순순히 찾을만한 것은 결코 못되는 곳같다.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너 왜 왔니?" 하듯이 따지는 듯한 '모전석탑'의 위치와 절터 전체에 비하여 너무나 큰 이 탑의 크기 덕분일 것이다. 주인장이 반겨주지 않는데 누군들 쉽사리 이 곳을 찾겠는가.
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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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자료:국가문화정보/경주시 구황동314) |
서라벌 어느곳에서도 이 황룡사지는 보였을 것이고 타지에서 이 서라벌을 찾는 사람의 눈에 제일 먼저 보였을 건물도 이 9층목탑이었을 것이다. 이 탑의 정확한 그저 어림잡아 예측될 뿐인데.... 지금도 남아 있는 주출돌의 크기과 그 갯수, 주출돌간의 간격으로 짐작하건데 대략 80~90M 쯤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대략....현대건축물로 따진다면 20여층이 넘는 높이이다. 경주보문단지에 즐비한 호텔과 콘도들 어느것보다도 높은 탑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라면 견줄만한 다른 건축물도 없었을 것이고 30~40M정도의 높이로도 충분히 서라벌의 '랜드마크'의 역할은 충분했을 텐데 왜 이런 엄청난 '역사'를 했을까?
강성해지는 국력을 이러한 대규모 건축으로 과시하려던 것인지 그런 규모로 불심이 더 커지리라 기대한 것인지.... 현대의 건축기술과 자본으로도 벅찰수 밖에 없을 이 대규모 '역사' 의 흔적은 낮은 생산력의 삼국시대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고통을 당했을까하는데 생각이 안 미칠 수가 없다.
주출돌 대여섯개 정도만 합쳐 놓으면 지금 우리집의 침실넓이정도 는 족히 될것같다. 주춧돌 하나의 넓이에 윷판을 차리고 놀아도 될성 싶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본능적으로 나침반을 꺼내들고 향을 본다. 정확히 남향이다. 이런 평지사찰에선 지형적 조건에 따라 이리저리 비틀 필요 없이 방위에 충실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경주 낭산 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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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지(국가문화정보)/경주시 구황동/신라미추왕 |
사실...황룡사지에서 '풍수지리'를 따지는 것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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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국보199)/신라시대.경주 |
풍수지리에 영향을 받을만한 시간적 지리적 상황에서 '황룡사지'가 창건된 것도 아니며....특히 바로 이 황룡사지 뒷편으로 북천이 흐르고 있음을 봐도 알 수 있다. '배산임수'이 되버린 것이다. 하지만 '풍수지리사상'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생활은 '배수임산'에 적응이 되어 있으며 그것은 곧바로 삶의 정서와 결부되어 있는 것일진데.... 결론적으로 '남산'은 신라인에게 그만큼 각별한 존재였던 것일지 모른다. 그리 잘생기지도 못한 바위 하나에 30여기에 이르는 마애부처를 새기고(탑골마애불) 그 단단한 바위를 깊숙히 파내어 부처님을 모셔논 정성들은.... '경주남산'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저 영엄한 산을 '동백님'은 일년에 예순번을 넘게 오르신다니! 얼마나 오래 오래 아름답게 살게 되실까????
"변경된 계획의 원래 목적지는 '진평왕릉'이었다. "
황룡사지에서 너무 쓸데없는 공상을 많이 하여 벌써 시간이 8시 10분경이 되었다. 10시까지 경주박물관에 도착하려면 촉박할듯한데.... 서드르지 않으면 처음 참가하는 '삼국유사'답사에 지각하는 몰상식한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가을걷이가 한 창인 너른 황금들판을 가로질러 진평왕릉으로 걸음을 재촉했지만.... 아침나절 늦가을의 들판의 유혹은 너무도 강하여 가다 말고 카메라 셧터를 누르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게 만들었다. 아....답사를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계절이다.
진평왕릉이 점점 가까와질수록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풍경에 발목이 붙들리는 횟수가 늘어만 갔다. 높다란 둔덕을 오르니 깜짝 놀랄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답기 그지 없던 진평왕릉의 진입로가 수로 공사로 파헤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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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진평왕릉(자료:국가문화유산 정보)사적180호/면적43,722평방미터 /신라진평왕/경주시보문동) |
길 한가운데에는 이미 수로를 이룰 콘크리트 벽이 세워져 있었고 그 수로 넓이만큼 흙이 파헤쳐져 있었다. 이런 일을 답사 다니면서 다반사로 겪었는지라 금세 안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경주'에 와서까지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들판을 가로 질러 오면서 군데 군데 쓰러진 벼들을 보았었다. 지난달 경북지방에 몰아닥친 폭우로 쓰러진 벼들이 여즉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광경이었다. 그 수해 뒤로 이런 수해공사를 하게 된 것일까?진평왕릉 입구에서 가장 맨 앞에 나와 문지기를 하는 커다란 고목은 파헤쳐 쌓여진 흙더미가 부다믓러운지 옆으로 기운 느낌이다. 5년전 마지막으로 찾았었던 기억에 맞는 길은 고목들을 몇 그루 지나쳐서야 찾을 수 있었다.고목들 사이로 진평왕릉이 살포시 보인다. 전에 못 보던 매끈한 제단이 놓여 있다.
진평왕릉
제단 옆에서 커피 한잔과 담배 한대의 휴식을 꿀맛같다. 삶은 이런 것인가....한시간의 힘겹지만 피할 수 없는 보행과 십분도 채 안되는 짧지만 길어지면 근방 허무해지는 휴식....가을에 찾은 진평왕릉은 왜 진평왕릉이 이 벌판 한가운데 쓸쓸이 있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왕릉 바로 앞 들판에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탈곡이 한창이었다. 먼지가 얼마나 심한지 멀리서 보면 짚단을 태우는 연기로 착각을 할 지경이었고 먼지에 농부들의 모습이 가뭇거렸다. 진평대왕은 가장 오랜 재위기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 만한 왕의 무덤이 민중들이 들판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는 복판에 자리 잡은 연유는....그의 덕이 높았음을 짐작하면 그런 농부들과 죽어서라도 가까이 하고 싶었음을 아닐까? 황룡사지에서 진평왕릉으로 걸어오면서 나는 신라의 세가지 보물 의 흔적을 지나온 것이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고구려의 왕이 신라를 치려할 때 신라의 세가지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결향하지 못했다 하는데 그 세가지 보물이란 첫째가 황룡사의 장륙존상이고 둘째가 그 절의 9층탑이며 셋째가 이 덕망 높은 왕에게 천사가 선물한 옥대였다. 진평왕은 그 세가지 보물을 다 갖고 있던 왕이었고 그건 하나의 상징 으로 해석할만하지 않나 싶다. 적국이 감히 침략키 어려울 만큼 견고한 신라의 체제를 상징하는 세가지 보물.... 장륙존상은 신라의 정신적 결집력을 말함이고 황룡사 9층탑은 신라의 높은 기술력과 물리적 토대 천사의 옥대는 진평왕의 덕망 높음....고구려가 감히 침략키 어려울 만하지 않은가.... 현재의 우리는 어떠한가 한번 생각해본다. 별로 재미 없는 생각이었다.
목탑지 유구 노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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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탑지유구노출상태(국가문화정보) |
정신적 결집력은 논할 가치조차 없을만큼 계층간 위화감이 심각하고 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해여할 지식인들은 가장 앞장서서 시류에 편승하고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한 기회주의자들로 가득차 있다. 국가의 물리적 토대는 무너지는 건물들과 다리로 이미 국제적 명성이 자자하고 양적 상장에만 치우친 덕에 지금 잔혹한 구조조정을 해야할 처지에 놓여져 있지 않은가 지도자의 덕망은....건국이래 제명을 다한 자가 없는 지경이며 항시 최악의 인물로 손 꼽히는 사람들이 역대 대통령들이다. 정말 해볼 가치조차 없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벌써 9시가 다 되어 간다. 한시간안에 낭산 북편을 돌아 박물관까지 갈려면 다소 벅찬 시간이다. 언제나 우리얼답사에 참가하려 가는 길은 설레임으로 가득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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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출토 유물 |
뱀다리
뱀다리: 역시 기억은 불확실의 산물인듯 하다. 지난번에 황룡사지 9층탑의 높이가 80~90M일 것이라 추측된다 했는데 삼국유사에는 탑신부 183척에 상륜부 42척 으로 총 225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70M에 못 미치는높이이며 아파트 층수로 20여층에 달하는 높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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