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대마도 답사

[스크랩] 대마도 답사자료 3- 사찰(寺刹) 1

이원석(문엄) 2012. 6. 7. 21:22

대마도 답사자료 3- 사찰(寺刹) 1

 서산사. 수선사. 태평사

 

흔히 사찰이라고 하면 먼저 절의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상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며 대웅전이나 극락전 앞에는 탑이나 석등이  서 있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사찰을 염두에 두고 대마도의 사찰을 둘러본다면 큰 실망을 하게 된다. 무언가가 빠진 것 같고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차라리 우리나라 사찰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 사찰에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자세로 접근한다면 또다른 흥미로움이 될 것이다

 

 

서산사(西山寺-세이산지)

 

 서산사 입구

  

세이잔지는 9세기 이전에 세워진 오래된 사찰로, 이즈하라 항구의 모습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우다케(國府嶽)의 언덕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즈하라 시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382번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 서산사라고 적힌 패찰의 왼쪽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이 나타나고 바로 앞에 사찰 건물이 눈앞에 닿는다. 물론 일주문이나 사천왕상 같은 건 없다.

가파른 산기슭에 위치하여 사찰 터는 좁으며 오히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묘지가 훨씬 더 넓다.

하기는 묘지의 관리로 사찰 운영을 해가는 일본의 사찰이므로 신도보다는 묘지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서산사

 

서산사의 원래 명칭은 대일암으로 1513년 10대도주 <소 사타쿠니>의 <니시야마(西山) 부인 보리사가 西山寺로 개칭하였다

 

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하던 장소로서 지금도 그것이 인연이 되어 특이하게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사찰이 운영하고 있는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이다.

 

대마출신의 승려 현소(玄蘇)가 개창한 절로 1611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던 한·일 관계를 修復하여 평등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對조선국 외교기관이었으며 1611년 건립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장소인 이테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붕 위에서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줄은 빗물이 타고 내려와

지면 까까이에서 떨어지게 하는 장치한 것이다.

정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서산사는 사찰로서보다 다른 이유로 해서 우리나라와 관련을 맺는다.


이 서산사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인 대마도 이즈하라의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일종의 숙소이다.

대마도에는 조선통신사를 위해 이곳을 숙소로 하고 또 조선외교의 실무를 전담하는 관저로서 '이떼이안'이란 이름의 별도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떼이안이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 바람에 이떼이안이 세이산지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세이산지)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대마도에 있는 일본의 사찰과 우리마라의 사찰이 다른 점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사찰은 열려 있는데 일본의 사찰은 항상 닫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술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거나 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방문하여 사찰측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은 사찰의 내부를 쉽게 볼 수가 없다.

또한 일본의 불교가 대부분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부인과 자식 을 두고 있으며 출퇴근을 하는 월급제 승려가 대부분이다.

 

 예복을 입은 일본의 승려(서산사의 승려가 아님)

 

일본의 승려들은 불교행사 때를 제외하면 평상복을 입으며 머리를 깎지 않은 스님도 있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는 승려인지 아닌지 구별이 어렵다.

먹는 음식에도 제한이 없어 술, 고기, 담배등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스님이 되기 위한 일정한 수행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절 자체가 장례식이나 선조의 공양을 해주는 하나의 사업기관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서산사의 종루-위에는 종이 매달려 있고 아래에는 창고 용도로 쓰인다

 

종루가 좁아서인지 종을 치는 막대가 밖으로 나와있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원은 화려한 단청으로 단장되어 있지만 하치만 사찰은 단청이 아예 없다.

 

탑은 당연히 없고, 사찰의 내부도 벽에 글씨와 사진 같은 것들이 있을 뿐이다.

불교사원의 독경소리도, 오가는 스님들의 모습도 볼 수 없다

 

(물론 나라의 동대사나 천수사 등 대사찰은 불상도 있지만 그런 곳과는 다르다)

 

 

 

이떼이안(以酊庵)으로 쓰였던 건물

  건물 정면의 지붕끝에 있는 산 모양의 구조물은 당파풍(唐破風)으로 일본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서는 박공이라 하는 것으로 에도(江后)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전해져 일본 고유의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이떼이안은 1611년에 세워져 조선외교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서이다

1609년 4월(광해군 2년), 우리나라는 일본과 무역에 관한 을유약조를  체결한다. 국교도 회복되고 무역의 길도 열리므로 조선외교를 담당할 기관이 필요했던  일본은 '히요시(日吉-이즈하라 내의 지명)' 뒷편의 '우시로야마(後山)' 에 건물을 지었는데 (1611년 완공)  이것이 '이떼이안'이다.

 

'이떼이안'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 승려 '겐쇼'인데 '이떼이안'이란 이정유(以丁酉)로 丁酉年은 겐쇼가 태어난 해이다

1732년 화재로 인하여 이떼이안이 소실되자 이 곳 서산사로 옮겨오고 서산사는 '즈이세인(서천원瑞泉院)'으로 밀려났다가 메이지 원년(1868년) 이떼이안이 폐지되므로 서산사는 이 곳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서산사의 묘지

 

대부분의 일본 사찰은 위패의 보관, 묘지 관리. 장례행사비 등을 받아 운영하며, 일본의 사찰주변은 거의 일본인 가족들의 납골묘가 가문별로 설비되어 있다.

 

묘지에는 각 가문의 묘비들이 따로 세워져있고. 그 아래 공간에는 화장한 분골을 항아리에 담아 넣어둔다. 그렇게 되면 여러 개의 항아리를 함께 넣을 수 있어 몇대가 한 무덤안에 같이 묻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그 조상신에게 참배로서 인사 하고, 결혼은 교회에서 서구식으로 치루고는 죽고 나면 장례 절차나 묘지 안장 등은 절에서 치루는,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복합 종교 문화가 일상화 되어 있다

 

 고려 청동불상

서산사에 있는 본존불은 ‘대일여래(大日如來)’라 하는데 고려 청동불상이다.

 

 

 서산사 대문 밖 옹벽 위에 있는 가레산스이 양식의 정원

 

 

우리나라는 주로 궁궐과 양반가에서 정원이 발달한 반면, 일본은 불교사찰과 신사를 중심으로 정원문화가 발달해 왔다

 

일본은 정원은 언덕식 정원과 枯山水(가레산스이)양식의 정원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언덕식 정원은 땅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파낸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며 다리를 놓고 정원수를 심는 일반적인 정원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가레산스'라고 해서 위의 사진처럼 바위와 흰모래(또는 매우 작은 잔자갈)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흰모래는 흐르는 물을 상징하여 물결처럼 골을 지우고 바위는 산과 폭포를 의미하는데

무로마치 막부의 선종 사찰에서 시작되어 후대에 발전하여 지금은 독립된 하나의 정원 양식이 되었다

 

 

 승려 겐쇼의 상

(본당에는 목조상이 있다고 하는데 볼 수는 없었다)

 

쓰시마가 조선과의 무역, 외교업무를 총괄하면서 국서를 개조한 사건이 있었는데

(柳川 사건, 외교업무를 함께 담당했던 柳川(야나가와)가 소오씨의 가신역활을 그만두고 막부의 하타모토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원했으나 거절당하자 국서와 도장을 위조한 것을 막부에 폭로한 사건)

그 후 대마도의 요청으로 막부는 교토의 승려를 이테이앙에 파견하여 외교문서의 작성과 감독을 맡겼는데 , 이때 파견된 승려가 겐쇼이다.

 

승려 겐쇼는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첩자와 같이 우리나라를 다니며 길잡이 역할을 한 사람이다

 

겐소는 대마도의 외교승으로 1580년 일본국왕사로 서울까지 왔었고

2번째는 1589년 고니시와 소오요시토시가 만들어낸 가짜 일본국왕사로 서울까지 오게 된다.

이것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국왕을 내 앞으로 불러내라 명령 때문인데, 이를 통신사 파견으로 바꿔치기 한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許筬)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했으며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国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고니시(소서행장)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 동지사(中枢府同知事) 이덕형 등과 강화회담에 <야나가와 초신>과 함께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75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는데 그의 무덤은 이떼이안이 처음 세워졌던 '우시로야마(後山)' 에 있고 서산사 뒤 산기슭에 부도탑이 있다

 

이 곳에는 겐쇼의 목상이 남아있고, 부산 왜관 토코지(東向寺)에 모셔두었던 불상이 현재 이곳에 보관되어있다

 (겐쇼의 업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

부정적시각으로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서산사의 지장보살

 

 

서산사 뒷편의 대숲에는 제주 4.3 양민학살 사건 때의 억울한 영혼들이 묻혀 있다

제주도에서 영문도 모른 채 군경들에게 붙잡혀 사살되고 그대로 바다에 버려진 시체들이 해류를 따라 이곳까지 흘러왔는데 대마도 어민들이 수습하여 이곳 서산사와 태평사에 시신을 안치했다고 하며

1948년 제주 4·3항쟁 당시 많은 제주도민이 학살을 피해 이곳 쓰시마까지 도망쳐왔는데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자, 그들의 시신을 안치한 절도 바로 이 서산사라고 한다

 

 

또 이곳에는 조선의 명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사 황윤길과 함께 조선외교사절로 일본을 찾았던 김성일선생의 시비가 있다

 

김성일이 일본의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던 역사적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일본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는 그의 보고는 결국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패전을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

김성일선생에 대해서는 다음  "대마도 속의 우리 인물'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수선사(修善寺-슈센지)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원래는 '규우홍인(九品院)이라고 불리던 비구니의 절이였다가 1573년경 남승의 절로 바뀌면서 이름도 '지유젠지'로 개칭하게 된 절로서 지금은 개인사찰이다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이다.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곳에는 구한말 '을사오적'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국하신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있다.

 

조선말 대원군의 장기집권을 탄핵하고, 민비 일족을 탄핵하고, 일본과 을사조약을 맺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앞에 엎드려 읍소를 했으나 이도 소용이 없자 의병들을 모은다.

결국은 같은 조선인의 희생을 불러일으킨 꼴이 되자 해산명령을 하고 당신은 그 자리에 꼿꼿이 앉아 한양으로 압송, 재판을 받고 쓰시마로 유배되어 결국은 단식 후 병사한다

 

그의 위정척사사상에 의한 항일 운동은 이후 항일 의병 운동과 민족 독립 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선생의 순국비는 높이 2.1m, 폭 0.45m, 두께 0.25m의 크기이다.

한국측의 황수영(黃壽永)박사가 쓴 비문의 전면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근심되어) 이 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익현선생에 대해서는 다음에 '대마도 속의 우리 인물'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사찰의 뒤에 있는 묘지에는 대마도 3대 성인이라고 추앙되고 있는 '스야마도우안(陶山納庵)'의 묘가 있으며 매년 4월 24일 '도우안'제(祭)가 이 곳에서 열리고 있다

 

 

수선사라는 표식판 뒤에

대마도 3대 성인 중 한명인 <수야마도우안>의 공적이 적혀있다

 

 

  

 수선사의 대문과 계단

 

 

 수선사 대문의 장식이 매우 섬세하다

 

 수선사-개인사찰이라서인지 허술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절을 찾겠는가?

 

 

 대문 옆에 있는 지장보살상과 동자승들(석상)

 

일본인들의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에 대한 믿음은 사후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영혼을 천도(遷度)하려는 희원(希願)과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장례식이나 49재 등 죽음과 관련한 우리나라의 불교 의식에서도 염불의 중심은 지장경이다

 

사람은 죽어서 부처가 된다고 믿는 일본의 불자들은 그들의 가족인 영가가 부처가 되었다고 믿고 지장보살이 있는 사찰에 작은 돌불상을 조성한다고 한다.

 

사찰 불단의 지장보살상을 제외하고 야외에 놓인 지장보살상은 앞치마같은 턱받이를 두르고 있다.

지장보살이 지옥의 악귀의 손아귀에서 아이들을 구한다거나 동자승이나 아기의 모습으로 현신한다는 토속적인 믿음에서 정착된 습속이다

 

턱받이는 침이나 음식물을 흘릴 때에 대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다른 이야기로는 49재가 지나야 영혼이 극락에 들어가므로 그전까지 떠돌아 다니는 영혼이 추울까봐 입혀주는 옷이라고 설도 있다.

 

 

 

 가정집 담벼락에서 본 미즈코 지조 

(담벼락에는 콩란(짜개란)이 파랗게 원령을 달래고 있다)

 

 

 일반주택의 현관 앞에 있는 아기 모습의 ‘미즈코 지조’(水子地藏)

 

 

앙증맞은 아기 모습의 ‘미즈코 지조’(水子地藏)이다

 ‘미즈코 지조’는 사시사철 예쁜 옷으로 갈아 입고 과자와 인형 등을 제물로 받는다.

‘미즈코’는 달수를 덜 채운 신생아나 사산된 아이를 뜻했으나 지금은 주로 임신중절 등으로 유산된 아이를 가리키는데 쓰인다.

그러니 ‘미즈코 지조’는 태어나지 못한 태아를 상징하는 아기 보살상이다.

얼핏 아기의 모습으로 지장보살을 연상해온 전통을 이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뿌리깊은 원령(怨靈)신앙에서도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원념(怨念)은 무시돼 왔다.

 

위로와 공양의 대상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늘 살았던 존재에서 비롯한 혼령에 한정됐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7살 이하의 아이는 아직 인간의 아이가 아닌 신의 영역에 속한 아이라는 믿음이 이어져왔다.

아이의 주검을 따로 모아 마을이나 묘지 한쪽의 경계 영역에 묻어 경계의 신인 지장보살에게 모여 들도록 한 것도 그래서였다.

‘미즈코 지조’를 만들어 공양하는 ‘미즈코 공양’은 죄책감이나 아기에 대한 사랑보다는 뒷탈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했다. 태아의 혼을 달램으로써 건강과 행복을 얻으려는 의식체계는 일본 전통의 원령신앙과 구조가 같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묘지가 있다.

앞쪽에 받침없이 덜어져 있는 비석이 여럿 보인다.

오래되어 돌봐주는 후손이 없어 무연고비석이 된건가?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형태로 보아서는 불당이 아닌 납골묘일 가능성이 크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 볼 수 없었다

 

 

 

5월인데도 수선사 경내에 있는 나무에 달려있는 오렌지.

별로 맛이 없어서 잘 먹지않기 때문에 지금도 달려 있다. 시내에서 많이 발견된다

 

 

 수선사의 일본식 동종

 

일본은 종 제조 기술이 부족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주조된 종이 많이 건너갔는데 현존하는 것이 신라종 6개, 고려종 20개 등 70여개의 조선종들이 있다고 한다

 

일본종과 한국종의 구분

1. 우리나라 종은 종 윗부분의 용조각이 한 마리이고 일본종은 두 마리이다

2. 우리나라 종은 음관이 있으나 일본종은 없다

3. 우리나라 종은 유두(윗부분 네모 속에 젖꼭지처럼 생긴 것)가 9개인데

    일본종은 16개이다

4.우리나라 종에는 비천상이나 연꽃 무늬가 있으나

   일본종은 간결한 선으로 조각되어 있다

 

 

 

태평사(太平寺)

 

 

 태평사 정문

 

팔번궁신사에서 382번 도로를 따라 하타카츠쪽으로 3분정도 가면 이즈하라 경찰서가 나오고 바로 옆 골목 안쪽에 태평사가 있다. 조동종파의 사찰이었다

 

이른 새벽에 답사코스에 없는 이 사찰을 찾은 까닭은 태평사 경내에 제주 4․․3학살의 무고한 영혼을 달래는 비석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 4․3 양민학살사건 때 죄도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해 제주바다에 버려진 시신이 조류를 타고 대마도에 떠내려 온 것을 이 곳 어민들이 수습하고 영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놓았다고 한다.

 

수습된 시신들을 서산선사 뒷산 대나무 숲과 태평사 뒷산에 안치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가와 치 쇼이치(남.70)씨는 말한다

 

 

 대마도에서는 가장 크고 웅장하며 사찰다운 규모이다

 

 이곳에도 빗물 낙수받이 쇠줄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끝이 지면에 닿는 부분도 깔끔하게 해놓았다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본 보살상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종각이다. 이곳 대마도에서 본 일본종은 모두가 작다.

종각의 크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옛날 시골학교의 종처럼 줄로 추를 움직여 치는 종도 있다

종이 작다는 것은 일본의 종 주조기술이 부족함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묘지의 규모도 가장 크다. 수백기도 넘는 것 같다

 

 

무연지제영비(無緣之諸靈卑)

 

 

원한의 제주 4.3 양민 학살사건 !

제주도에서 학살되어 물결따라 닿은 이 곳에서

그래도 고마운 어민들을 만나 쉴터를 얻은 양민들

고국에서는 진상규명을 하여 원한을 풀어준다고 하는데

이 곳에 잠든 영혼들의 억울함은 언제 풀리려나

 

대한민국의 제주도.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가 바로 제주 4.3사건이다. 미군정 초기부터 지속되어온 인민위원회 및 대중들과 경찰, 우익단체간의 갈등이 무장봉기로 폭발하였다.
한라산을 근거로 하는 유격전으로 발전, 49년까지 계속되어 이에 대한 진압작전에 나선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전개, 유격대와 주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공격, 집단 학살하여 수많은 인명이 학살당했다.

1948년 11월과 1950년 사이에 군경에 연행된 양민들이 돌에 묶인 채 부근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이들의 시신이 해류를 타고 이곳으로 흘러오지 않았을까?

수습한 시신들은 서산사 뒷편 대나무숲과 태평사 주변에 안치했다고 하는데 이 태평사에만 155구의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이들의 영혼을 모신 비석 앞에 누군인지도 모르지만 작은 불상을 모셔 놓았다.

조성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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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주셨으므로

여기에서  보너스 이야기 2

 

대마도 4무(無)

 

쓰시마에는 4가지의 없는 것이 있는데 야꾸자, 지진, 대학, 김(먹는)이라고 한다

 

빼앗아 먹을 것이 있어야 야꾸자도 생기지..

지진이 없기 때문에 한국처럼 온천이 적고 수질 또한 아주 좋은 것은 아니므로 큰 기대를 말기를...

대학이 없어 이곳 출신학생들은 규슈나 본토로 가야하는데 근래와 와서 우리나라 부산으로 유학을 오는 학생이 많다. 특히 쓰시마고등학교의 국제교류과는 타 시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어 이곳으로 지원해 오는 학생들도 있다고....

또 김(海苔)양식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는 필연 무슨 사연이 있을텐데 알아보질 못했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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