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대마도 답사

[스크랩] 대마도 답사자료 2- 신사(神社)

이원석(문엄) 2012. 6. 7. 21:21
 

대마도 답사자료 2- 신사(神社)

 와타즈미.팔번궁.코모다하마 신사

 

2003년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70%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30% 가운데 51%가 신도, 그리고 48%가 불교, 그리고 1%도 안되는 나머지가 기독교등으로 되어 있다.

 

신도는 기본적으로 애니미즘,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신, 전쟁영웅은 물론 각종 귀신이나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은 물론, 죽은 자도 살아생전 또는 죽어서 영험을 떨칠 것으로 여겨지면 신사(神社)를 세워 모신다.

 

전국에 신사가 10만 여개가 넘으니 거의 동네마다 신사가 있는 셈이며 사찰의 수보다 더 많다.

신도는 교리는 없고 다만 신사에서의 의식을 중시하므로 신사의 예배는 개인적이지 교회처럼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의식은 없고 개인적으로 엄숙한 자세로 신사에 들어가서 합장을 하고 절을 한 다음에 본당 앞에 비치된 헌금함에 돈을 넣고 소원을 빌며 부적을 받는다.

 

 

와타즈미신사(和都多美神社)

 

 물이 빠진 바다쪽에 있는 두 개의 도리이

 

 

대마도 해신신사 4곳 중의 하나로 에보시다케전망대를 오르는 길 왼쪽에 있다

 

토요타마쵸(지명 토요타마쵸는 바로 토요타마히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함)의 상징인 와타즈미 신사는 아소만의 리아스식 해변을 끼고 바다위에 서 있는 두개의 도리이(솟대.장대)를 포함한 총 다섯개의 도리이가 일렬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해신신사이다.

 

일본 건국신화의 주역인 하늘신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見)’와 용왕의 딸 ‘토요타마히메(豊玉姬)’를 제사지내는 해궁(海宮)으로 바다 신을 모시고 있는데

바다 신을 모신 신사로는 가장 오래된 신사이며 가야의 김수로왕의 자손이 대마도로 건너와 세웠다 는 설과 장보고 장군의 소가(小家)였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 본토의 신사는 동쪽이 아니면 남쪽을 바라보게 지어져 있으나 이 신사만은  신라땅이 있는 서쪽을 보고 있다. 지형상 서쪽을 보고 지을 수 밖에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인위적으로 판 수로 위의 돌다리. 수로는 바다에서 본당까지 연결되어 있다

 

 수로 옆의 건물은 곡물 창고 도구 창고로서 기둥이 땅속에 직접 박혀있고

마루는 공중에 떠있다. 대마도의 일반적 창고 형태이다

(대마도의 창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신사에서 예전에 사용되었던 배로 보인다

20명은 넉넉히 탈 수 있는 규모이다

 

신사의 입구 왼쪽에 보면  바다에서 신사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있다

해신(海神)신사라서 바다의 신이 쉽게 들어오라고 파놓았는지 모르지만 수로를 따라 만조시에는 본전(本殿) 마루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바다 쪽에 있는 두 개의 도리이도 2m 정도가 물에 잠긴다고 한다.

 

죽어서 용이 된  신라 문무왕이 법당 아래까지 드나들 수 있게 수로를 파 놓은 경주 감은사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신사 바로 앞의 도리이

 

신사는 도리이(鳥居)에서 시작된다. 절이나 사찰의 대문이라고 보면된다

天이라는 글자모양의 문을 세우고, 새(鳥)는 천신(天神)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사신이라 믿어 새가 쉬어가도록 한다고 해서 '도리이'라고 부른다

 

변형된 것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이 2개의 원통형 수직기둥 위에 직4각형의 들보가 가로로 2개 얹혀 있으며 위의 들보가 길다는 것이 특징이다.

 

‘도리’란 새라는 뜻의 일본어이다.

고스톱이란 화투에서 '고도리'란 새 다섯마리를 뜻하지 않는가

우리말로는 장대 또는 솟대로 표현되며 솟대 위에 새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우리의 전통신앙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 와다즈미 신사에는 5개의 도리이가 일렬로 서쪽을 향해 서 있는데 바깥쪽 두개는 바다에, 셋째 도리이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상에, 나머지 두개의 도리이는 육지에 서 있다

 

부분이 바닷물 속에 잠겨있는 또 다른 도리이는히로시마현(廣島縣)

미야지마(宮島)의 이츠쿠시마진자(嚴島神社)에도 있다

 

 

신사의 고마이누 중 유일하게 암수의 상징을 사실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숫컷-입을 벌리고 있다

 

 

암컷-입을 다물고 있다

 

신사의 도리 앞에는 반드시 위의 사진과 비슷한 두마리의 동물이 마주보고 있다.

이것을 '고마이누'라고 부른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숫컷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암컷이다.

 

이 곳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본 만송원의 대문 입구에 있는 인왕상과

경주 석굴암의 인왕상(금강역사상이라고도 함)을 보면 한명은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명은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阿)상, 오른쪽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상을 훔(훔)상이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에서 '아'는 입을 벌리는 최초의 음성이고,'훔'은 입을 다무는 마지막 음성이라고 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 

 

 '고마이누'의 암,수컷의 입모양이 다른 것도  이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고마이누란 고려견(高麗犬)이다

'고마이누'란 말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고마’와 개를 지칭하는 ‘이누’라는 일본어의 합성어다.

일본어로 고구려는 구마, 다카쿠, 고라이, 구레 등으로 읽고 한자로는 高麗, 熊, 駒,  巨万, 許麻, 巨摩, 高來, 高良, 吳 등으로 쓰여졌다. 고구려를 고려라고 칭하는 것은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므로 삼국시대 이후의 고려와 구분해야 한다.

고마이누(高麗犬)의 고마란 단어도 고려를 칭하는 고마에서 파생한 것이다.

고마의 원어는 ‘구마’이고, 구마는 한국어의 곰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곰(熊)이 구마로 다시 고마로 변한 것이다.(고구려와 왜의 문화 교류-이병로 참조)

 

한편에서는 고마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도 한다. 옛날 일본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을 구마(くま)또는 고마(こま)라 하였으며 지금도 ‘크다’ 또는 ‘강하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고마이누(こまいぬ)의 고마는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신사나 사찰마다 있는 고마이누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뿔이 달린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으며, 귀가 선 것도 있고 서지 않은 것도 있다.  귀가 서지 않은 것은 흡사 사자와 비슷한 모양인데, 이것을 보고 삽살개에서 그 원형을 따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고마이누를 더욱 강력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다른 수호영물인 사자나 해태의 이미지를 가미하여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마이누는 신사뿐 아니라 사찰에도 있다.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좌불상을 모셨다고 자랑하는 도다이사(東大寺)를 비롯해서, 나라와 교토의 주요 사찰 입구에는 거의 빠짐없이 고마이누가  있다

만약에 큰 사찰에 고마이누가 없다면 사찰 건물의 지붕을 살펴보라. 지붕의 추녀 끝에 고마이누들이 다양한 형태와 자세로 놓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근래 일본의 학자들은  이 고마이누를 '가라이누'란 명칭을 쓰면서 중국 당(唐)나라 시대에 전해진 문화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고마이누가 한국에서 전해진 개를 의미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리라

이것이 겉다르고 속다른 일본인들의 본심일지도......

  

왜 고려견이 세워졌는지에 대한 밝혀진 학설은 찾지 못하였으나 쇼토쿠(聖德)태자의 스승이 된 고구려 혜자(慧慈)스님이 개를 데리고 오면서부터 개가 숭배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세수대

 

신사에 들르면 손을 씻는 곳  세수대(洗手帶-테미즈야)가 반드시 있다.

우리 나라 관광객이 뭔지도 모르고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감로수인양  물을 잘 마시는 곳이다.

 

일본인들은 이 물은 절대 마시지 않으며 국자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이 곳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는데 오른손으로 국자를 들어서 왼손에 물을 부어  씻고 그런 다음 오른 손을 씻는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물을 떠서 입에 넣어 입을 행구고 다시 왼손을 씻는다.

 

처음 왼손을 씻는 것은 전생에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뜻이

오른손을 씻는 것은 현생에 지은 죄를

입을 행그는 것은 입(말)으로 지은 죄를 사해달라는 의미라고 한다

 

비록 형식이지만 신을 만나기 전에 가지는 마음자세는 본받을만 하다

 

 

 돈을 넣은 뒤 줄을 쳐서 방울을 울린다(목탁은 결코 아님-절이 아니니까)

 

손을 씻은 뒤 배례전 안에 있는 돈 넣는 함(절이 아니니 불전함은 아닐테고 복전?)에 돈을 넣은 다음 배례전 앞에 늘어진 천을 흔들어 목탁모양의 방울(나무나 청동으로  따위로 만듬)을 친다.

 

방울을 치는 것은 내 정성을 바치니 봐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죄와 부정을 씻어낸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두번 합장 배례하고 두번 박수를 친다

 

신사를 들어갈 때는 가운데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들어가며 나올 때는 오른 쪽으로 나오는데 이 풍속은 우리나라와 동일하다.

 

우리나라도 큰 사찰이나 사당. 서원, 왕릉 등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들어갈 때는 왼쪽 문, 나올 때는 오른쪽 문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가운데 문은 혼백만 출입을 하는 문이라 평소에는 열어놓지 않고 제(祭)을 올릴 때 혼백이 드나들게 만 열어 놓으며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 이외에는 출입을 하지 못한다

아마 우리나라의 풍습이 여기까지 미쳐 고착화 되었을것이라는 생각된다

 

 

위의 투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액운이 적힌 종이(오미구찌)가

아래 홈으로 빠져 나오는 자판기 복전함(?)이다.

경제 에니멀 일본인의 자판기 문화는 이미 신사에까지 침투하여

상술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보통 신사에서는 시주함에 돈을 넣으면 액운이 적힌 종이를 주는데 이 종이를  오미구치(御神籤) 라고 한다

 오미구치를 펼쳐보고 좋지 않은 괘가 나오면  이 종이를 나무에 그냥 매달아 놓고  가고 좋은 괘가 나왔을 때는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간다.

 

이 곳에서는 자판기에서 부적을 판매(?)하고 있었다. 자판기 동전 투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아래로 부적이 나온다.

거스름 돈을 누르는 버턴이 없으니 이놈은 주는대로 다 소화시키나보다.

오미구치 자동 판매기는 이 곳 뿐 아니라 전국의 신사에 대부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일일이 줄을 서서 돈을  주고 부적을 받는 번거러움과 인건비절약(관리인은 월급제)을 위한 일본인의 투철한 상술이 여기에서도 보인다.

 

대부분의 신사에서는 운세 같은 것을 점칠 수 있는 괘를 팔기도 하고 부적도 파는데 돈을 더 주면  소원을 적어서 매다는 작은 나무판을 따로 준다.

여기에 자기 소원을 적어서 매달아 놓거나 걸어놓는데 이 나무판을 에마(繪馬) 라고 한다.

 

요즈음은 일본인도 우리나라와 같은 석자 이름을 사용하는지 그 에마판에 적힌 이름이 어찌도 우리 이름을 닳은 것이 많은지...

일본의 귀신이 한국인의 소원을 들어준다던가? 한국인이 달아놓은 에마가 너무 많다.

관광은 좋지만 얼빠진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우리 나라는 대개 이름이 석자이지만 일본은 거의 넉자 이름이다. 고이즈미, 나까소네, 시마모또, 니까무라, 등과 같이...)

 

 나무에 달아놓은 오미구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마

합격기원, 대회우승, 사업번창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지워지지 않게 볼펜,또는 유성펜으로 쓰여진 이것들을 통해 일본인들의 기복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와타즈미의 에마가 아닌 다른 곳의 에마임)

 

 

 와타즈미신사의 배례전

위의 지붕을 보면 와타즈미 신사의 배례전은

팔작지붕 건축물의 측면이 정면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로는 짧고 세로는 직사각형 형태의 배례전(排禮殿)이 신을 모신 본전(本殿)과

연결된 형태의 모습이다

이는 모든 신사의 일반적인 구조이다

 

 

 와타즈미신사 배례전의 내부

배례전(사전社殿)에는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있고 벽에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일본 천황가의 사진이다. 본전으로 연결되는 곳에는 나무계단이 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합문되어 있는 문이 보인다. 그 문 안에 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위 사진은 http://www.pyroshot.pe.kr에서 빌려왔습니다)

 

 

 

앞의 건물이 배례전이고 뒤의 별개 건물이 신물을 모셔둔 본전이다

 <설명을 돕기위해 팔번궁신사의 모습을 가지고 옴>

 

신사의 건물은 신사의 규모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인 경우  본전(혼덴)과 배례전(하이덴)은 두 개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다.

본전에는 그 신사가 모시는 신물(神物)이 모셔져 있으며, 이 신물은 신의 현신으로서 누구도 볼 수 없는 신사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배례전에서 기도를 하거나 헌금을 한다.

신사 건물에서 항상 앞쪽이 배례전이고 배례전 안쪽에서 통로를 따라가면 별개의 건물인 본전이 있다.

대체로 본전은 배례전보다 조금 높게 위치하고

배례전은 대개 앞 뒤로 길기 때분에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사찰이나 궁궐건물, 전통 건물, 심지어 가정 주택에서도 서까래를 둥근 통나무를 사용하여 미적감각을 살리는데 비해 이곳 대마도의 건물은 신사나 사찰이나 모두 서까래가 네모진 각목이며 주심포 건물에 공포 자체가 매우 단순하다.

우리나라 공포는 공작의 부리나 용과 같은 길상의 머리를 환조로 새겨 멋을 더하는데 여기의 건축물은 그냥 밋밋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곡선의 우아함마져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는 건축기술의 미비함에서 온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신사 뒷쪽 도요다마히메의 무덤으로 가는 길의 삼림

 

 도요다마히메(豊玉?) 무덤 입구의 도리이

여기에도 和都多美神社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기둥에 平成7년건립이라는 글로 보아 1995년에 건립한듯하다

 

 

 

 신사 뒤로 돌아가면 삼나무가 울창한 삼림만이 이어진다

조금만 가면 또 하나의 도리이가 나오고 "도요다마히메지분묘(豊玉姬之墳墓)"라 새겨 놓은 지름이 40Cm는 족히 될 둥글넓적한 돌비석이, 돌무지 위에, 아주 단정히 올려져 있다

큰 금줄을 친 고목과 바로 그 옆에 대략 성인의 키만큼이나 큰 검고 둥근 큰 바위가 배경처럼 뒤에 서 있다

 

이 지방의 지명을 낳게한 '도요다마히메지'의 묘라고 하는 곳이다

돌비석의 색깔이 깨끗하고 주위의 석질과는 다른 것으로 보아 근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각형으로 세워진 도리이 형태의 나무

 

이소라에베스

 

신사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편 ,바닷물이 드나드는 수로의 폭이 넓은 곳에 위에서 보면 세모꼴이 되게 ‘도리이’ 세 개가 서로 모서리를 맞물고 서 있고, ‘이소라에비스(磯良比須)’라고 써 놓은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바로 ‘이소라에비스’가 놓여 있는 곳이다. ‘이소라’는 용궁의 장녀 ‘도요다마히메’의 아들 ‘우가야후기아에즈’의 별명이다.

기록에 보면 이 신사에는 ‘이소라에베스’라고 불리는 전면에 비늘 같은 균열(均裂)이 있는 바위가 있는데, 예로부터 금줄을 쳐서 신성하게 모셔왔다고 했다

 

 이곳이 磯良(기량)의 묘라고 하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조영되기 전 엣날 제사가 이루어지던 (이와구라)나 그렇지 않으면 神禮石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신사에는 특이하게 스모씨름 경기장이 있으나 신성한 곳이라 하여 출입을 못하게 한다

안내판에는 토표(土俵-도효)라고 적혀 있다.

도효란 스모경기를 하는 직경 4,55m의 둥근판을 말한다.

이 원 밖으로 밀려나거나 발바닥이 아닌 신체의 일부가 닿게 되면 패한다

 

 신사 옆에는 평성5년(1989년) 125대 천황인 황태자부부가

결혼 후 방문하였음을 봉축하는 기념비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뿌리가 이곳에서 시작됐다는 암시이며

이 신사가 황실과의 중요성을 나타냄이 아니겠는가

  

신사의 입구에는 각종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금액을 비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대충 50개는 넘어보였고, 기부금액의 액수에 따라 비석의 크기가 달랐다.

 

 

<와타즈미 신사의 유래>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천신의 아들이 형의 낚시바늘을 찾으러 갔다가 용궁의 딸과 결혼하게 되고, 바닷속에서 3년을 살다가 만삭이 된 아내랑 육지로 나왔는데, 아이를 낳는 모습을 결코 엿보지 말라고 한 부탁을 어기고 이를 엿보다가 아내가 용의 모습(커다란 구렁이)으로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화가 난 아내는 아이를 버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데, 그 아이가 일본 왕가의 시조인 텐무천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신화로서 결국 일본 왕가는 천신과 해신의 적자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고, 이 신사는 그 해신과 아들을 모시는 가장 오래된 신사라 한다

 

지금의 일본 황실계보는 천신의 부계와 해신의 모계로 된 혈통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해양국가 일본의 국가상이다.

 

이 국가상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대마도 ‘니이’지역의 해변 ‘와다즈미(和宮)’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니이’지역이야말로 세형동검, 말방울, 팔찌 등의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경질토기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예가 없을 만큼 많은 우리 조상들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팔번궁신사(八幡宮神社)-하치만구신사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신사로 대마도의 대표격인 신사다. 신사에 궁(宮)자를 붙인 곳은 격이 높은 신사임을 말해주고 있다

 

맨 앞쪽의 도리이를 들어서면 넓은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에서 신사앞으로 돌층계가  있으며  바로 신사로 연결된다.

이즈하라 하치만신을 모신 하치만구신사, 우노도신사, 천신 신사, 와카미야 신사가 함께 있다

 

하치만구신사는 일본의 덴진, 이나리신사와 더불어 일본 3대 개파의 신사로 일본 본토에서도 하치만구를 흔히 볼 수 있다

일본 전체에 하치만구신사가 3,000곳이나 된다고 한다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인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의 증거를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274년 10월 5일 제1차로 여몽연합군이 들이칠 때 예언을 해 주 듯이 이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하는데 확실한지 알 수가 없다

 

연중무휴에 입장료는 없으나 보물전 관람은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보물관에는 三十六歌仙 두루마리 그림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이른 아침이라 관람을 하지 못하였다

 

음력의 8월 15일에 행해지는 팔번궁신사대제는, 옛부터 대마도 사람들의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가을 축제이다

 

 

 신사 앞에 있는 고마이누

 

 

 팔번궁신사 정면-이곳도 건축물의 측면이 입구이다

 

 나무에 매달아 놓은 오미쿠지

 

 손과 입을 씻는 세수대-반드시 국자같은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

 

 신사 앞에 있는 말의 신(馬神)

 

석등과 청동등

지붕이 투구처럼 볼록하고  끝 귀가 말려올라간 것이

 우리나라의 석등과 구별된다

 

 팔번궁신사 뒷편의 보물전-300엔을 내어야 관람할 수 있다

(관람료를 받는 곳은 이곳과 만송원 두곳이다)

 

이 팔번궁신사는 최익현선생이 대마도로 유형이 되어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한 곳이다

 

최익현선생은 1906년 6월 11일 의병투쟁 중 전남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8월 4일 서울 용산에서 열린 조선군주차사령부(朝鮮軍駐箚司令部) 헌병대 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대마도로 압송되어 이 팔번궁신사 경내 남측, 사족수산소(士族受産所) 자리에 있던 임시 수용소에서 유형이 시작되었다. 

최익현선생이 이곳에 끌려 왔을 때 이미 붙들려 와 있는 한국인 의병 9명이 있었다.

이들은 쯔시마경비대 수용소가 지어질 때까지 3개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단층짜리 임시가옥은 헌병대 관리하에 있었으며 선생은 감옥 안에서 매일 서쪽을 향해 재배(再拜)를 했다고 한다. 그쪽은 고종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신하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3개월 후 최익현선생과 일행은 대마분견대(현재 육상자위대) 내에 새로 지어진 수용소로 옮겨갔다

 

 

  우노도신사

 

우노도신사 안내판

눈은 있어도 일본글은 모르니 뭐라고 써 놓았는지.......

신공왕후니,신라정벌이니, 대충 아는 글자를 조합하니

이게 바로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는 신사같은데.....

                                          

 

 

 우노도신사의 배례전

 

우노도신사의 본전 

 

우노도 신사 바로 왼쪽 옆에 포탄을 세워놓았는데 그 의미를 알 수없다.

코모다하마 신사에 가도 같은 포탄을 세워 놓았다.

그 곳에는 전리품이라고 적혀 있다

히치만이 전쟁의 신이라는데 두곳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긴하다

(이곳에 있는 의미를 아시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사에 가면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사서 집에 장식하거나 신사 내의 지정된 장소에 걸어 둔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 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한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는 '미야마이리.라 하여 남자어린이는 태어난지 32일째 날에,여자어린이는 33일째 날에 신사를 찾아 조상신에게 씨족의 후예임을 알리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어찌되었던 태어나서부터 신사와는 밀접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첨단 산업으로 앞서가는 선진국 일본에 경전도 없고 사제도 없는 신도가 사람들의 기복(祈福)과 관련하여 제일의 종교로서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도리이의 위에 보면 굵은 새끼줄에 흰 종이를 꽂아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시메나와'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 서낭당의 부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리아(이마미야)신사

  

 

 이마미야 · 와카미야신사

(앞 건물은 배례전이고 뒷 건물이 본전이다)

 

하치만궁 경내의 좌측의 돌계단를 올라 가면, 거기에 코니시 마리아 부인과 그 아이의 제를 지내고 있는 今若 · 若宮神社[이마미야 · 와카미야신사]가 있다.

크리스찬으로 이름 높은 고니시유키나가의 딸로 「세례명:마리아」서, 쓰시마번이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에 건너 외교교섭으로 분주했던 大正18년(1590)에, 소우씨 19대 지방 영주의 아내로서 대마도에 안주했던 사람이다.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을 위한 전략으로서 신망이 두터운 고니시유키나가를 배치하기에 즈음해, 조선의 사정과 지리를 잘 아는 시모토(종의지-宗義智)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유키나가의 딸을 보내게 한 전략이다

 

宗義智는 그런 마리아 부인에 의해 크리스찬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었고 극비리에 세례를 받아 「對馬展구리오」라고 불리우는 한 시기가 있었다

 

임진왜란은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지만 세키가하라의 전쟁에서 서군의 동맹인 마리아의 아버지 고니시유키나가가 살해당했으므로, 대마도로서는 대마도를 안녕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 부인과 이혼해 나가사키로 보냈고  5년 뒤에 사망했다고 하지만, 확증이 부족하며 사망시기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 후 쓰시마번에서는, 마리야 부인의 영을 우러러서 마리아 부인이 낳은 아이와 함께 이마미야 · 와카미야신사(今若 · 若宮神社)에 합사해, 그 영의 제를 지내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코모다하마 신사(小茂田濱神社)

 

 

이 곳이 일본에서는 외세에게 처음으로 점령을 당한 곳이다

 

려몽연합함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5일(이하 麗蒙연합군의 日本정벌 관련 날짜는 모두 음력) 오후 4시경, 대마도(對馬島 아랫섬의 사스우라(佐須浦)에 상륙했다. 사스우라가 바로 지금의 코모다이다

 

八幡愚童記」(팔번우동기)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바다를 뒤덮은 異國船(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國府館(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대마도주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무사였다. 그는 즉각 일족랑당(一族郎黨) 80여 기를 이끌고 그날 밤중에 사스우라로 진발했다.

전투는 10월6일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대마도의 1만 병사들은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전원 목숨을 잃었다.

특히 당시 도주 종조국은전쟁 후 목과 몸이 따로 발견되어 그 싸움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한다.

 

숨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코모다하마 신사에서는 전사한병사들의 위패를 받들고 있으며 매년 11월에 위령재를 지낸다.

 

동경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 곳 밖에 없는 군인을 모신 신사이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우리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도리이 기둥에  대나무를 묶어 놓았다

 

이곳에도 고마이누가 도리이 앞에 있다

 

 신사 배례전의 내부

 

 신사 내부에는 몽고군과의 전투도가 많이 걸려 있다

 

 

 원구7백년평화지비

우리가 왜구라고 하듯 그들도 원나라의 침략을 원구라고 표현한다

 

 평화지비 꼭대기의 비둘기상

 

 신사 옆에 있는 포탄

전리품이라고 씌어 있으며 명치 30년(1897년)이라고 씌어 있다

 

 려.몽 연합군이 상륙한 서해안의 해변

 

실지로 여.몽연합군이 출발한 시기에 왜 몽고군 자신들만이 일본을 치치않고 고려와 연합을 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몽고는 기마민족으로 수군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바다를 건너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때 고려는 일본을 치는 것을 반대했는지도 모른다. 고려에서 여몽연합군이 출항했을때 신풍에 의해 침롤한 배는 거의 몽고군을 태운 함선 뿐이었고, 고려수군의 배는 되돌아 왔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을 보면, 이 시기의 바다 사정을 고려는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스우라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의 상류로 올라가면 「카시네」라는 작은 마을 있고 거기에 <법청사>가 있다.

법청사에는 대마도주인 종조국(宗助國)의 찢긴 사지 중에 몸통을 모신 어동총(御胴塚)과  

함께 경내에 머리를 모셔 놓은 <관음사>가 있다

 

온전하게 수습할 수 없었던지 후손들이 지금도 宗家의 합장묘로 이장을 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다

 

 

 (사진출처:안사연,2006년 대마도 원정기에서)

 

 

이 코모다하마神社로부터 약 200m 정도 남방의 해안에는 정조국(宗助國)의 부하인 사이토 스케사다(齊藤資定)라는 용사가 분전하다가 최후엔 스스로 자기 머리를 바위에 쳐박아 죽었다는 현장도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가미가제(神風)

 

태평양 전쟁시 일본의 자폭 특공대 가미가제를 기억할런지 모르겠다

 

일본과 천황을 위해 편도분량(격침시키고 죽지 않으면 돌아올 수도 없도록)의 연료밖에 싣지않은 비행기에 폭탄을 잔뜩 싣고 당시 일본의 적인 미국의 함대에 쳐 박아 침몰시켰던 특공대 가미가제

 

그 특공대의 이름을 가미가제라고 붙였다

 

가미가제란 '신의 바람'이란 뜻으로 바로 이곳 려.몽연합군의 상류과 관계있는 사건이다.

 

려.몽연합군은 대마도와 이끼섬을 초토화시키고 곧장 규슈의 후쿠오카 상륙을 개시히기 위해 후쿠오카 앞 바다에 진을 쳤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태풍이 올 계절이 아닌데도 큰 태풍이 쯔시마해협을 덮쳐 려.몽 연합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태풍에 큰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이에 이 태풍을 일본을 구하기 위해 준 바람이라고 여기고 신풍(神風)이라 불렀으며 좋은 길상의 의미로 새기고 있다

 

 

가미가제특공대(가미가제 독고다이)

 

 

 


개인신사(個人神社)

 

일본인들의 종교관은 뚜렷하지 않다. 즉 엄격하게 종교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의 대부분이 불교와 신도를 공유한다.

'신도(神道)'는 일본의 고유 민족신앙으로,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다. 따라서 종교라기보다는 조상의 유풍을 따라 가미(神:신앙의 대상)를 받들어 모시는 국민 신앙이기 때문에 집이나 회사 등에 자그마한 개인신사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고 생활의 일부분으로 굳어져 있다

 

이것은 우리의 종교관으로 바라볼 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이다. 신도들이 서로 자신의 종교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짓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는 우리와는 분명히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즈하라 시내  십팔은행(十八銀行)주차장의 방화벽 앞에 있는

작은 사찰과 신사

왼쪽(흰색)이 사찰이며 오른쪽(주황색) 신사이다

 

 

 작은 사찰

 

 사찰을 의미한 작은 건물속의 불상

 

 작은 신사 - 일반적으로 도리이는 주홍색을 칠한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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