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45. ‘파묻고, 깨어서 버리고, 옮기고…’ 갈수록 사라져

이원석(문엄) 2011. 12. 1. 10:27

임고 양평리 돌빼기, 화산 암기리, 북안 명주리 고인돌 여행

 

“매년 정월 대보름에 보름달을 제일먼저 보면 시집, 장가든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동네에서 나이든 처녀총각들은 죄다 여기로 모여들었습니다.”

 

40대로 보이는 한 주민은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마을 복판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서 마을명이 붙여진 임고면 양평1리 양암(일명 돌빼기)마을. 선사시대의 유물인 돌빼기는 이름 그대로 마을의 상징이다.

 

자양면에서 내려오는 계천이 이루는 평야가 서로 합쳐지는 삼각지대의 구릉지인 점과 1962년 사리에 임고지가 건설되어 구릉야산의 밭을 논으로 전환시킴과 동시에 경지정리를 수년간에 걸쳐서 추진할 당시 화살촉이 출토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예로부터 군사적, 경제적으로 요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 2.2m, 가로 2.6m, 세로 1.55m인 이 지석묘는 중국 진시황 때에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필요한 바윗돌을 운반하다가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버렸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남방형에 속하는 것으로 4개의 지석위에 장방형의 반석을 얹은 것이다.

 

화산면 암기리 상신기 서쪽에 있는 지그마마을. 들에 큰 돌이 두개 있었는데 한 개는 일제강점기 때 사방공사를 하느라고 부숴버렸다고 한다.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인 고인돌. 고인돌은 보통 무덤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외에도 묘표석, 제단, 신앙의 대상 등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옛날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돌을 채찍질해 가다가 두개를 못 가져가게 됐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남은 돌의 높이는 1.5~2m, 둘레는 8.5m정도가 된다. 정남향이며 남방식인 개석식이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인 이재수 박사는“마을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시내가 있고 입암(굤岩)마을 입구에 같은 바위 두개가 기둥같이 우뚝 서있는 걸로 봐서 선사시대 때 중요한 위치였던 것 같다.”고 했다.

 

“파묻기도 하고 깨어서 버리기도 하고, 또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어요. 논 주인이 하나하나 없애다 보니 지금은 이 일대에 남은 게 몇 개 없어요.”

 

북안면 명주리 양성복(65)씨는 “어릴 때 올라타고 놀던 고인돌이 거의 없어졌지만 자신의 밭 아래에 있는 고인돌은 한 풍수가가 돌이 있는 것이 집안에 좋다고 해서 그나마 이 자리에 지금처럼 돌이 남아있게 됐다”고 말했다.

 

5기가 남아있다고 전해진 북안면 명주리에는 2기가 남아있었고 수십 기가 들에 펼쳐져 있었다는 용계리 범벅이들에서는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야산 쪽에 깨어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제법 보였다.

 

주민 박태춘(75)씨에 따르면 “이 들에 임금님의 자국이라던 돌들이 아주 많았다. 아이들이 올라가서 놀면 위험하다고 내려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며 “30여년전 경지정리를 할 때 모두 없어졌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