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때 포은 선생 영정, 오성위 위패 피난
“우와!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빗줄기를 흠뻑 머금은 기룡산 중턱의 산천은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했고 또한 찾아온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양면 소재지를 조금 지나면 왼쪽에 성현암과 신선암의 표지판이 연이어 나타난다. 성혈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비탈길을 거슬러 1㎞정도 올라가면 협곡사이로 신선이 노닐었음직한 풍광이 나타난다.
먼저 신선암 대웅전이 나오고 위쪽으로 50m정도 더 들어가면 성현암이 나타난다. 성현암 왼쪽에 조립식 패널로 입구를 감싼 성혈이 있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는 곳임을 알게 했고 기룡산에서 흘러내린 약수는 심신을 시원하게 했으며 작은 불상도 놓여있었다.
일명 ‘성혈’로 불리는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영정과 영천향교 오성위(五聖位)의 위패를 피난시킨 곳으로 임고서원 원지에 ‘임진년 4월에 왜구가 침입해 심히 급한 시기에 사인 이현남(李縣男)이 선생의 영정을 자양 성혈사(聖穴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듬해에 조종대(趙宗岱)의 계정(溪亭: 지금의 자계정)으로 옮겨 모셨다가 4년 뒤인 정유재란에는 장항(獐項) 명상곡(明爽谷)에 숨겨졌으며 이듬해 원각촌사(圓覺村舍)로 옮겨 봉안했다.
1600년 옛터의 초가 1칸을 지어 봉안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년 만에 도일동에 임고서원을 다시 지어 영정을 옮겨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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