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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발행일 초판 2009년 12월 31일
증보판 2011년 11월 30일
발 행 인 문화원장 성영관
편 집 인 사무국장 이원석
인 쇄 영천한진출판사
전화 : 054)336-1040
표지글씨 / 초람 박세호
| 본지는 영천시에서 발간비를 지원받아 간행함.
※ 참고문헌 / 영천의 전통, 내고장 전통가꾸기 외
영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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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는 곳에 삶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문화가 존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영천에도 이러한 우수한 문화유산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잊혀진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정리하여 보물 같은 문화유산에 하나
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가치 있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영천문화원에서 영천시민은 물론이고 외지에서 영천을 찾아오는 관
광객들이 영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지침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본지를 수
정·보완하여 증보판을 발간하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아 선진국들은 자기 나라의 우수한 문화예술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시 문화와
함께 상품을 팔아야 합니다. 문화의 힘은 강하며 문화가 미래를 움직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도 문화를
생각하면서 산다고 합니다. 영천도 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많은 외지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영천문화원은 우리 조상의 지혜와 슬기가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을 개발ㆍ
보존ㆍ전승ㆍ홍보하고 사회교육활동과 지역문화 창달을 위한 사업을 목적으로
1968년 선배님들의 십시일반 모금으로 독립 원사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사명
감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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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우리 문화원 문화가족 모두는 혼연일체가 되어 전국시범문화원 지정을 시
작으로 매년 문화예술제 개최, 문화학교, 충효교실 운영과 신년교례회 행사, 영
천아리랑 발굴, 황성옛터 노래비 건립, 향토사료 발간 등으로 1997년에는 전국
최우수문화원으로 선정되는 기쁨을 갖기도 했습니다.
특히 올해에는 대한민국 문화원상(문화창달부문)과 문화원 명주농악풍물단이
제19회 경상북도 풍물대축제에서 장원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문화원에서는 전통문화를 첨단문화와 접목시켜 독창적 문화
산업으로 발전시키고 경쟁력 있는 문화콘텐츠 산업발전을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하여 11만 시민의 충효고장 정서함양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정진해 나가겠
습니다.
영천문화원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지 좋은 의견이나, 질책할 일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씀하여 주시고 모두가 함께‘찬란한 문화가 숨쉬는 고장
영천’을 만드는데 매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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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화보 ……………………………………………………………………… 4
발간사 …………………………………………………………………… 12
목차 ……………………………………………………………………… 14
1. 조양공원 …………………………………………………………… 18
2. 성고구곡……………………………………………………………… 32
3. 금강산성……………………………………………………………… 46
4. 영천읍성……………………………………………………………… 54
5. 전삼달 장군 ………………………………………………………… 60
6. 고인돌 사랑무덤 …………………………………………………… 66
7. 진불암………………………………………………………………… 72
8. 북안 도유 광릉……………………………………………………… 80
9. 인종대왕태실………………………………………………………… 86
10. 임고 선원…………………………………………………………… 90
11. 하절 일대 ………………………………………………………… 100
12. 임고 매곡 ………………………………………………………… 106
13. 화산 가상 ………………………………………………………… 110
14. 화남 귀호 ………………………………………………………… 118
15. 옥간정·모고헌…………………………………………………… 124
16. 거조암……………………………………………………………… 128
17. 맹자골 미륵불 …………………………………………………… 134
18. 도남………………………………………………………………… 138
19. 북안 도천 ………………………………………………………… 144
20. 대전 ……………………………………………………………… 150
21. 화북 정각 별빛마을 …………………………………………… 156
22. 신녕 화남 ………………………………………………………… 160
23. 은해사……………………………………………………………… 166
24. 임고 삼매 ………………………………………………………… 172
25. 자양 용산 …………………………………………………………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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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자양 충효 ………………………………………………………… 184
27. 교촌………………………………………………………………… 190
28. 대창 용호 ………………………………………………………… 196
29. 성내 ……………………………………………………………… 202
30. 금호 신월·봉죽 ………………………………………………… 208
31. 임고서원 ………………………………………………………… 214
32. 환벽정 …………………………………………………………… 220
33. 금호 오계 ………………………………………………………… 224
34. 임고 고천 ………………………………………………………… 230
35. 봉림사 …………………………………………………………… 234
36. 자천교회 ………………………………………………………… 240
37. 대창 대재·신광 ………………………………………………… 246
38. 기룡산 묘각사 …………………………………………………… 252
39. 임고 우항 ……………………………………………………… 258
40. 화북 오동·오산·공덕 ………………………………………… 262
41. 청통 보성·신덕 ………………………………………………… 274
42. 임란의병 한천승첩지 …………………………………………… 280
43. 성혈 ……………………………………………………………… 286
44. 아차골 …………………………………………………………… 288
45. 고인돌 여행 ……………………………………………………… 290
46. 중암암 …………………………………………………………… 294
47. 진불암 …………………………………………………………… 302
48. 비녀비각 ………………………………………………………… 306
49. 용의 배꼽 ………………………………………………………… 312
50. 황성옛터 ………………………………………………………… 316
편집후기 ……………………………………………………………… 322
영천조양각 _
조양공원
성고구곡
금강산성
영천읍성
전삼달 장군
1. 명현들 풍류 간직한 서세루‘우뚝' - 조양공원
산남의진비, 황성옛터 노래비, 사현대… 영천문화 일번지
경찰서가 금호로 이전하고 시·군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군청마저
없어져 창구동 일대의 상권이 많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조양공원 내
에 문화원이 있고 이 일대와 조양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강변 둔치에서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활발히 열리면서 창구동은 여
전히 영천문화 일번지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창구동은 예로부터 영천지역의 가장 중심부를 이룬 동네로 북쪽
으로는 마현산 주봉이 버티고 있고 남으로는 남쪽천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문내동과 인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교촌·과전동과
접하고 있다.
특히 이 동네는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옛날 남문과 북문이 모두
있었던 지역이다. 타지역에서 온 손님과 조양공원을 찾게 되면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너무 없
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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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서세루에 올라서서는“원래는 주남평야
를 가로질러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채약산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하던데 앞을 답답하게 만드는 저 고층아파트는 누구 작품이냐”는 핀
잔도 자주 듣게 된다.
처음에는 명원루(明遠걹)라고 불렀다고 전하는데 사가 서거정이
지은 기문에‘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
는 듯하다’(遠目增雙明)라는 당나라 명문장가 한퇴지의 시에서 따온
말이라고 적혀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보현산에서 원류가
된 남천과 북천이 영천 중심지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을 이루는 남천
의 절벽 위에 지은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으
로 되어 있는 누각으로 진주 촉석루,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 울
산 태화루, 양산 쌍벽루, 김해 연자루와 더불어 영남 7대루의 하나로
조양공원 _
손꼽힌다.
1482년 군수 신윤종이 동서 별실을 고쳐서 동을 청량당, 서를 쌍
청당이라 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1637년 군수 한덕급이
그 자리에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朝陽閣)이라 이름했다.
조양이란 시경 대아권아편에“봉황이 우는도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가 자랐도다! 저 산의 동쪽에 잎새가 싱싱하다 오동나무여!
화창히도 우네 봉황새여!”란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예로부터 영천
의 지세가‘나는 봉황새’모양이라“봉황은 조양에서 운다”는 권아편
의 싯귀를 따서 누각이름을 조양각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봉황이 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니‘서세(瑞世)’인 것이다.
다시 1742년(영조 18) 당대의 명필인 군수 윤봉오가 조양각을 중창
하여 손수 서세루(瑞世걹)란 현판을 써 달았다.
현재는 좌우 별실 등 부속건물은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정면 5
칸 측면 3칸의 조양각 건물만 포은 정몽주, 사가 서거정, 점필재 김
종직, 율곡 이이, 노계 박인로 등 당대 명현들의 시액 70여 점을 간
직한 채 날아갈듯 웅장하게 서있다.
문화재 지정 당시 건물의 현황을 살펴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인
데 그 중 한 칸이 구둘 방이다. 구둘 방은 전면에서 건물을 향하고
서서 어간(御間) 다음의 협칸(挾間)에 있는데 고주(高柱)에 전단(前
端)을 의지하여 전퇴일칸(前退一間)이 형성되어 있다.
방의 천장은 평천장(平天障)이나 우물로 꾸몄고 단청을 했는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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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이런 모양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주(高柱)에는 벽선을 세워
문얼굴을 구성했다. 여기에 문짝을 설비했다.
현재 4면의 벽이 모두 열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원형인지 불분명
하다. 보통의 경우는 후면벽은 벽체가 되는 것이나 여기서는 잘 확
인되지 않는다. 방 이외의 마루는 모두 우물마루이다. 우물마루는
마루가 큼직하여 청판이 길쭉길쭉하다.
이들 청판은 고색이 짙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보수된 것 같다. 방의
고주 주간(柱間)의 인방(引枋) 위는 흙벽이다. 지금은 분벽(粉壁)이나
원래는 사벽(沙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퇴량(退樑)은 고주에 걸
렸다. 고주는 더 높이 솟아 중대공이 되었는데 이는 매우 견실한 가
구법(架構法)이다. 청의 가구는 오량가(五樑架)이다.
긴 대량(大樑)이 결구(結構)되었는데 그 단면이 두형(頭形)에 가까
운 원형이다. 이는 구형(口形)의 선박처럼 생긴 조선조 일반적인 대
량(大樑)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형상이다. 대량상(大樑上)에 종량(宗
樑)이 있다.
삼분변작(三分變作)한 기법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중대공은 일종의
포대공이다. 대량상에 주두(柱頭)를 놓고 보아지를 두공(頭工)처럼
짜고 중도리 및 바침 장혀를 받는 이중의 첨자를 결구시켰다. 토대
공으로도 그리 흔한 양상은 아니다.
종대공(宗台工)은 거대하다. 판대공(板台工)인데 종량의 길이만큼
을 다 차지하는 범위에 안좌(鞍坐)를 정하고 삼각상(三角狀)으로 솟
아올라 종도리를 받았다. 파연대공(波곝台工)의 일종이다. 천장은
조양공원 _
연등이다. 방을 제외한 부분에서 전부 서까래를 올려다 볼 수 있는데
단지 충량보 위에서만은 눈썹천장에 가려졌다. 측면이 3칸이어서
충량(衝樑)은 두 가닥 휘어 올라 대량(大樑)에 걸렸다. 자연히 중대
공에 결구되게 되었는데 그것이 포대공의 일원이 되는 방안은 그리
흔하지 않은 기법이다.
우미량처럼 충량이 휘어 올라서 중도리의 왕찌 부분이 충량의 등
에 타고 앉게 되었다. 따로 바침을 두지 않게 된 것도 흥미 있는 구
성이다. 눈썹천장은 우물이고 소란천장이다. 평주상(平柱上)의 공포
구성은 익공형(翼工形)이다. 쇠서의 존재로 보아서는 이익공형(二翼
工形)이나 실제의 구성에서는 전형(典形)에서 벗어났다.
귀공포에서 쇠설을 절단 생략한 기법도 특색이 있으며 익공(翼工)
의 전형적인 양식에서도 벗어나는 양태이다. 창방머리가 점차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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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예도 보기 드문 법식이다. 이런 양식은 익공도 아니며 그렇다
고 주심포도 아니다. 결국 절충형인데 창방과 짜인 주두 아래의 헛
점차와 대량바침의 보아지가 뒤쪽에서는 한 몸의 보아지가 되었고
앞머리에선 그것이 이제공(二諸工)이 되었다. 이 구성으로 익공 전
형의 두 주두의 설치는 벗어나고 말았다.
주심포계가 아니어서 외목(外目)이 없다. 그리고 주간(柱間)에는
화반(華盤)이 있다. 앙화반(仰華盤)이다. 각간(各間)에 2매씩이나 전
후 퇴간만은 1매씩이다. 누 아래 기둥은 짧고 원형으로 된 나무기둥
이다.
손질한 주초(柱礎)에 정초(定礎) 좌우 우주(隅柱)는 콘크리트 두 겹
을 씌워 주초도 보이지 않는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
붕이다. 누(樓)는 전면이 고상식(高床式)이고 배면은 접륙(接陸)하였
는데 이 부분의 화강석 기단은 후에 설치한 이질적인 것이다. 이것
은 어느 때인가 반드시 없어져야 할 구조물이다.
인조 15년(1637)에 군수 한덕급이 명원루 터에 중건한 조양각을
숙종 2년(1676)에 군수 이만봉이 중수하고 26년 후인 1702년 군수
권영경이 중창했고 영조 18년(1742) 군수 윤봉오가 세 번째로 중창
했다.
윤봉오 군수는 중창한 누사에 서세루(瑞世걹 : 현재 배면에 현판되
어 있음)라 편액하고 내문(內門)을 남덕문(覽德門), 외문(外門)을 곤
구문(崑邱門)이라 했다.
이후 영조 38년(1763), 정조 21년(1797), 순조 10년(1810), 고종 7
조양공원 _
년(1870), 고종 23년(1886)과 1921년
에 각각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1920
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영천 심상
소학교를 지을 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건축물을 철거하여 지금과 같
이 위축되고 말았다.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
간에 걸친 영천지구 공방전은 한국전
쟁의 국운을 바로 잡는 큰 전투였다.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1만5천여명
(아군 7개 연대, 적군 5개 연대)이었
고 화력은 아군이 60미리포 26문과 57미리 대전차포 6문인데 비하
여 적군은 76미리포 38문과 12미리포 12문, 전차 12대였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 적 사살 6,799명, 포로 309명, 전차 7대, 차량
85대, 화포 14문, 소총 2,327정을 노획하는 등 혁혁한 공과를 올렸
다. 문화원 뒷마당에 있는 영천지구 전승비는 이와 같은 전공을 기
리기 위한 것으로 비신의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조양공원 내에 건립된 황성옛터 노래비는 황성옛터, 대한팔경 등
의 작품을 남긴 왕평 이응호(1908~1941)를 기려 지난 1989년에 세
웠고, 백신애 표지비는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며 꺼래이, 적빈,
아름다운 노을 등의 작품을 남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일보 신
춘문예에 당선되었던 백신애(1908~1939)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94년 우리문학 기림회에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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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산남의진비는 구한말 의병으로 연일, 죽장, 영천 등지에서 혁혁
한 전공을 세우고 산화한 산남의진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상북도의
후원을 받아 1963년 3월에 세워진 것으로 화산암 2층 기단 위에 비
문의 글은 풍산 유석우가 지었고 해주 오규석이 썼다.
조양공원 오른쪽에는 지금까지 영천을 다스린 목민관 중에서 업적
이 분명한 사람들의 선정비를 모아둔 사현대(思賢臺)가 자리잡고 있
다. 최근 들어 우리 지역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중도하차 하는 모습
을 보면서 이곳을 찾는 시민들의 감회가 새로울 것으로 생각된다.
‘선정 베푼 목민관…’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어진 이를 생각하게 하는 조양공원‘사현대’
조양공원 _
1825년(순조 25) 정월에 대구판관으로 있다가 영천으로 와서 선
정을 베푼 조재만 군수의 불망비로 1827년 11월에 세워졌다.
단풍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늦가을의 정취를 뽐내고 있는 창구
동 1번지 영천조양공원 오른쪽 언덕위에는 영천을 다스린 역대 목
민관들의 선정비를 가지런히 모아둔‘사현대(思賢臺)’가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영천보건소(구 영천군청) 입구 서편에 서있었으나
2004년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옮겨왔다.
조선 인조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목
민(牧民)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관찰사(觀察使), 군수 현감들의 송
덕비로 영천읍 문내동 152번지 담장 밑에 무질서하게 서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배열한 후 단장하고 비군(碑群)을 통칭하여 사현대
(司縣臺)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관찰사 박상공영세불망비 외 21비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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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영씨의 글에 신억씨가 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만직 군수 선정비)
이만직 군수는 1707년(숙종 33) 2월에 임파 현령으로서 왔다가
1709년 5월에 청주목사로 옮겨갔다. 이 군수는 목은 이색의 후손으
로 나주목사와 광주(廣州)부사,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강원도관찰
사를 지내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철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념했다.
후에 형조참의까지 지냈다.
조양공원 _
(이만직 군수 선정비)
이장용 군수는 1901년(광무 5) 8월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
로서 부임하여 결복(結卜: 현 토지소득세에 해당함) 단위를 41량 6
전 7푼으로 정하고 이듬해 3월에 장기군수로 떠났다. 이해 8월에
함열에서 다시 영천으로 왔다가 1905년 정월 장흥군수로 갔다.
(박봉
화 현감 선정비)
박봉화 현감은 1859년(철종 10) 3월에 은진현감으로서 부임했다
가 1861년 6월에 원주판관이 되어 갔다.
“선비의 집에 태어나서 학문이 뛰어나 벼슬하였네. 사재를 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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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돕고 감선(減繕: 흉년에 백성을 걱정하여 지방장관이 반찬
을 줄이는 것)하여 주려 죽은 백성을 조문하였네. 백성은 걱정 없고
선비는 스승을 두었네.”
(성근묵 군수 휼민비)
성 군수는 1828년(순조 28) 후릉령(厚겓令)으로서 왔다가 1831년
6월에 청송부사로 옮겨갔다.
(이범석 군수 거사비)
이 군수는 1902년(광무 6) 4월에 김제군수로 있다가 와서 8월에
다른 곳으로 갔다.
(청백군수 박세병 불망비)
박 군수는 1880년(고종 17) 7월에 남평현감으로 있다 와서 1883
조양공원 _
년 12월에 김해부사로 떠났다.
(박제인 관찰사 불망비)
(심지원 군수 청덕비)
심 군수는 1633년(인조 11) 7월에 의정부 사인으로 왔다가 이듬해
7월, 사헌부집의로 갔다. 효종 때 영의정이 되고 영천의 송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외 증손인 이명희 군수도 뒤에 선정하여 청덕선정동비
(淸德善政銅碑)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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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공원 _
이 외에도 비문은 전해지
지 않지만 1702년(숙종 28)
9월에 와서 조양각을 중창
하고 청량당(淸凉堂: 조양
각 부속건물)의 단청을 다
시 했으며 내별당(內別堂:
군청안채의 별당)을 새로
지은 권수경 군수의 선정비
와 1886년(고종 23) 12월 영천(榮川: 현 영주)군수로 있다가 본군
에 부임, 조양각을 다시 수즙(지붕을 고쳐 이음)하고 각 관청을 수선
했다.
1890년 고려현감으로 전출 간 임시익 군수의 청덕비, 1848년(헌
종 14) 2월에 광주판관으로서 왔다가 1851년(철종 20)에 그만둔 이
계영 군수의 거사비, 김병완 군수 불망비, 박준성 군수 불망비, 철
종 때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서희순 관찰사 청덕비, 이
헌영 관찰사 거사비가 있다.
또, 1881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을 시찰하였고 1903년
경에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이헌영 관찰사 거사비, 장승원 관찰
사 선정비, 이만직 어사 선정비, 심지원 군수 청덕비, 이학래 군수
불망비, 홍순형 군수 청덕비 등이 세월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남아
있다.
어진 이를 생각하게 하는‘사현대’. 영천 지역민들을 편안하게 살
게 하고자 노력했던 목민관들을 기린 21좌의 선정비가 조양공원 한
편에 우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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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와 이형상과‘성고구곡’
1) 사림파 유학자들의 중심문학 장르인 구곡가계 시가
조선시대 이래 명유현사(名儒賢士)들은 빼어난 산천경승(山川景
勝)을 배경으로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며 구곡시가(九曲詩歌)
를 짓고 구곡도(九曲圖)를 그리는 등의 작품활동을 즐겨했다.
이러한 구곡문화(九曲文化)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으
로부터 연원했으며 조선 성리학자들이 퇴계(退溪) 및 율곡(괻谷)의
도학(道學)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구곡관련 문화를 향유하면서 자
연스레 형성되었다. 그리고 구곡원림은 단순히 아홉 굽이의 자연공
간이 아니라 성리문화 구현의 공간이었으며, 이를 통해 도학(道學)
을 체득하고 표출해 전수하는 의미로까지 나아가 각처에서 향유되
었다.
구곡가계 시가란 사림파 작가들이 주자의‘무이구곡가(武夷九曲
歌)’를 차운(次韻) 또는 화운(和韻) 등의 기법을 사용해 그들의 성리
학적 세계관을 표출한 작품을 말한다. 주자는 55세 때 무이산 계류
(溪流) 120리에 걸쳐 구곡을 설정하고 그 승경을 노래한 무이구곡
(武夷九曲)을 지었다. 구곡가계 시가는 16세기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조선조 사림파 유학자들의 중심적인 문학 장르의 하나였다.
주자의 무이구곡가가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고려말 원천석(元天錫)의 운곡시사(耘谷詩史)에‘의연구
곡무이중(依然九曲武夷中)’이라는 시구(詩句)가 있고 고려시대의 것
으로 추정되는 길주요(吉州窯)의 천목잔(天目盞)에 그려진 산수화
둘레에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제구곡시(第九曲詩)가 쓰여져 있
는 점 등으로 볼 때 여말에 전래된 것 같다. 그러나 무이구곡가(武夷
九曲歌)의 차운시(次韻詩)와 원림(園林) 구곡시(九曲詩)가 본격적으
로 창작된 것은 조선 중기부터라 할 수 있다.
이‘무이구곡가’를 사림파 작가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차운시
를 짓거나‘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그려 완상하거나‘무이지(武
성고구곡 _
夷志)’를 탐독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들의 문학관 즉 제도주의적 문
학관에 입각한 성리학적 묘리가 잘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구곡가계 시가는 15세기 중엽이후 사림파 문학에 있어서의 하나의
중요한 흐름이다. 퇴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율곡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라는 두 계보가 형성되어 계승 발전되었다. 학파간의 영
향관계는 찾아볼 수 없으며, 계보내에서 학맥을 중심으로 문인들끼
리 상호방문하면서 대작(代作), 차운(次韻), 화운(和韻), 번역(飜譯)
등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았다. 창작은 영남학파가 먼저 시작했으나
기호학파가 문인들 간의 상호교섭과 영향이 컸으며 창작 또한 영남
학파에 비해 더 활발하고 다양했다.
귀족과 권신들이 향리에 별서(別墅)와 복거원림(卜居園林)을 마련
하는 풍속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명승지에 구곡을 지정하고 정
_
사를 세워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게 된 것은 조선조 성리학이
꽃을 피운 16세기 이후이다. 많은 조선조 사림파 유학자들이 주자
(朱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연상하면서 자신들이 경영하던
구곡(九曲)에 대해 한시(漢詩)로, 또는 시조(時調), 가사(歌辭) 등 국
문시가(國文詩歌) 형태(形態)로 읊었었다.<경북대 사범대학 김문기
교수‘옥소(玉所) 권섭(權燮)의 구곡가계(九曲歌系) 시가(詩歌) 연구’
참조>
병와 이형상 선생이 영천으로 낙향해서 거북바위 위에 호연정을
지은 후 금호강에서 월선을 띄우고 풍류를 즐기며 읊었던 성고구곡
(城皐九曲)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2) 실학자와 성리학자로서의 병와 이형상
병와의 사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즉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의 사
상과 조선조후기 실학자(實學者)로서의 사상을 함께 지니고 있다.
영조조에 출간한 병와집의 대부분은 성리학적 측면에서 병와가 저
술한 것을 뽑아내어 편찬한 것이다. 여기에 쓴 시(詩)·명(銘)·송
(頌)·서(書) 등에서 성리학에 대한 병와의 심오한 궁리와 온축이 나
타나 있다. 성리학자로서의 그의 면목은 성리학을 대상으로 연구해
저술한 각종 저서에 보다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중에는 성리대전(性理大全)·주역전의(周易傳儀)·대학강의(大
學講義)·사서훈몽(四書訓蒙)·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역저도 있으나 특히 병와는 가례에 밝아 가례편고(家禮궄考)·가례
혹문(家禮或問)·가례부록(家禮附걧)·가례도설(家禮圖說) 등 40여
성고구곡 _
책이 있다.
그의 성리학관은 가례편고 등의 예론을 저술하게 하는 한편 악학
편고(겦學궄考)와 악부(겦府) 등을 저술, 창작하게 하기도 했고 성리
학자로서의 이러한 그의 조화론은 마침내 조선조 후기에 성행한 소
위 실학의 선창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병와는 경사뿐만 아니라 박물(博物)까지도 통달했었다. 일찍이 대
산(大山) 이상정(굃象靖)이 병와집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성리(性
理)·경적(經籍)·천문(天文)·지지(地志)·수서(겤書)·유경(幽
經)·가서(假書)·비사(裨史)·소설(小說) 등을 저술해 이로써 사회
를 비판하고 이의 개혁론을 개시해 당위(當爲)로서의 그의 포부를
제시하고 이것의 구체적인 방안을 재론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그의 저서 및 작품을 통해서 보면 명백히 수긍이 된
다. 병와의 실학자적인 면모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9년을 전
후해 학계에서 실학자로서의 병와를 인정하고 있다.
3) 호연정에서 저술활동 전념 142종 326책 3,186수의
초고본 남겨
병와 이형상(1653~1733)은 일찍이 낙남(落南)의 거지(居地)를 경
상도 상주(尙州)로 정했다. 이는 병자난(丙子亂)으로 선조(先祖) 효령
대군(孝걒大君)의 신위(神位)가 그 종가(宗家)와 더불어 상주 북쪽 함
창(咸昌)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은 아들 여항(如沆)과 여적(如迪)을 비롯해 장손(長孫)인
약송(겭松) 등을 상주에 있게 하고 끝내 자신은 영천에다 낙남의 터
_
전을 마련했다. 그 표면상의 이유로는 공이 경주부윤을 그만두고 고
향인 서울로 향할 때에 영천, 경주의 유림들이 간곡히 공의 귀향을
만류하매, 인정상 이를 뿌리칠 수 없어서 영천으로 정했다.
하지만 미루어 보건대 서인의 계보에 들어있던 공이 남인들만이
살고 있는 영남지방 영천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자파를 비판한
전력이 있어 지배층인 서인들로부터 이미 소외당하고 있는 처지라
서울로 돌아간들 어차피 시골에 은거해야할 형편이었고 한편, 끊임
없이 뒤쫓는 벼슬을 피해야겠다는 심산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공은 남인들로부터도 그다지 호감을 받지는 못했지
만 공의 곧은 성품이 이를 도외시할 수 있었고 영경 유림(永慶儒林)
의 간곡한 만류와 선조 효령대군의 사당(祠堂)도 멀지 않은 상주에
있었다. 또 조정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잡은 터(지금의 호
연정 일대)가 매우 마음에 들어 영천을 택한 것이라 여겨진다.
성고구곡 _
공은 이곳 호연정에 머물다가 잠시 제주목사(濟州牧使)로 갔으나
이내 그만두고 다시 돌아와서는 종년(終年)까지 약30년 간 한번도
스스로 서울에 가지 않고 줄곧 영천을 중심으로 생활을 했다.
병와선생의 당초 포부는 멍든 나라를 광구(匡救)하고자 함이었으
나 그 뜻을 펼 수 없음을 짐작하고 불과 48세의 나이에 경주부윤을
마지막으로 생소한 영천 땅 성고(城皐村: 지금의 영천시 성내동) 두
둘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호연(浩然)으로 기(氣)를 삼고 호연으로
자취를 삼으니 오고가는 것이 분명히 또한 호연일세…”라고 하고 편
액(扁額)하기를 호연정(浩然亭)이라 했다.
공의 저술생활은 영천 호연정에서 약30여 년간에 걸쳐 영위(營爲)
되었다. 76세에 무신변(戊申變) 때 무고(誣告)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는 건강이 악화되어 전지요양(轉地괛養)을 하던 때에 저술생활이 거
의 불가능하였으니 공은 이 호연정에서 25년여간 서울을 멀리하고
오직 나라 장래를 위해 후진양성과 저술에 전념해 무려 142종 326
책 3,186수의 초고본(草稿本)을 남겼다.
이 초고본은 양은 물론 그 내용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희귀본(稀
貴本)으로 정부에서 보물 제652호로 지정하고 영구보존을 위해 유
고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4) 城皐九曲(성고구곡)
總걩(총론)
_
一曲泛月屛(일곡 범월병)
二曲棲雲巖(이곡 서운암)
三曲下水龜(삼곡 하수구)
四曲晩洗頂(사곡 만세정)
五曲惹烟層(오곡 야연층)
성고구곡 _
괯曲寂波禪(육곡 적파선)
七曲鼎扶莊(칠곡 정부장)
八曲沙搏峽(팔곡 사박협)
九曲淸通社(구곡 청통사)
_
병와 이형상 선생이 51세 때 지은 연시조‘성고구곡’을 찾기 위한
첫 시도는 6월 24일 이루어졌다. 영천향토사연구회의 6월 정례답사
였지만 사전자료도 없었고 시조 한편 들고 무작정 나선 답사였다.
5) 범월병, 서운암, 하수구, 만세정, 야연층, 적파선, 정부장,
사박협, 청통사….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임괄)에서는 2007년 6월 24일 3백여년
전 병와 이형상 선생이 지은 한시에 나오는 성고구곡(城皐九曲)을
찾아 나섰다. 1702년(숙종28)에 지은 한시 한편을 근거로 삼아 지형
과 물길이 바뀐 절경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다소 무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시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위안을 삼았다.
성고구곡 _
향토사연구회 사무실에서 간단한 자료를 검색하고 회원들간의 토
의를 거친 후 한시에 나오는 지명을 음미하며 시간여행을 시작했다.
일곡 범월병(泛月屛)과 이곡 서운암(棲雲巖), 육곡 적파선(寂波禪),
칠곡 정부장(鼎扶莊)은 대충 짐작만 될뿐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
으나 삼곡 하수구(下水龜)는 거북바위, 사곡 만세정(晩洗頂)은 영천
성당 구사제관인 성사헌 밑, 오곡 야연층(惹烟層)은 철교 너머, 팔곡
사박협(沙搏峽)은 영천여고 뒤편 모래톱, 구곡 청통사(淸通社)는 쌍
계동 청통역으로 유추해볼 수 있었다.
만세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영천성당으로 올라갔다. 인
공적으로 만든 계단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성당내 나눔의 집에서 영
천본당 70주년 역사를 기념해 전시해놓은 귀중한 사진들을 볼 수 있
었다. 그중에서도 1957년 11월 16일과 25일에 찍은 사제관 별관인 성
사헌 축성사진과 30~50년대 영천의 거리 사진이 특히 감명 깊었다.
성당의 양해를 얻어 들어간 성사헌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금호강
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며 감상하던 그 옛날의 모습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빗물 머금은 날의 영천은 아직도 비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향토사연구회원들은 점심식사를 하고나서 평가회의를 겸해 호연
정에서 한낮의 풍류를 즐겼다. ‘병와 선생과 당시의 선비들이 느낀
감정이 아마 이러했을 테지’우수에 찬 강물을 바라보며 마시는 오디
주와 포도주에 조선시대의 선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는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 김문기 소장과 강정서 연구원이
성고구곡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영천을 찾아오면서 함께하게 되었다.
병와 이형상 선생이 1702년 영천성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중 아홉
_
군데의 절경을 노래한 성고구곡(城皐九曲). 범월병(泛月屛), 서운암
(棲雲巖), 하수구(下水龜), 만세정(晩洗頂), 야연층(惹烟層), 적파선
(寂波禪), 정부장(鼎扶莊), 사박협(沙搏峽), 청통사(淸通社)….
지형과 물길이 바뀐 3백년 전의 절경을 찾기 위해 9월 22일 경북
대학교 퇴계학연구소에서 김문기 소장과 강정서 연구원이 영천을
찾았다. 병와 선생의 후손인 이임괄 영천향토사연구회장과 이원석
부회장, 지수 정규양 선생의 9대손인 정현화씨와 함께 지난 6월에
이어 두 번째 시간여행에 참가했다.
구곡중 거북바위가 나오는 삼곡 하수구와 영천성당 구사제관인 성
사헌 밑의 사곡 만세정, 구터로 짐작되는 구곡 청통사는 의심할 여
지없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형지세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조양각 근처를 일곡 범월병으로,
성내동 구터마을을 구곡 청통사로 보았고 삼곡 하수구와 사곡 만세
정을 토대로 나머지 지형을 추측하며 월선을 타고 낚시를 하면서 풍
류를 즐겼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
는 장군각과 서운암, 영통사 등을 파악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으로부터 연원되어 조선 성리학자들이
퇴계 및 율곡의 도학(道學)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구곡관련 문화를
향유하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구곡문화. 구곡원림은 단순히 아홉 굽
이의 자연공간이 아니라 성리문화 구현의 공간이었으며, 이를 통해
도학을 체득하고 표출해 전수하는 의미로까지 나아가 각처에서 향
유되었다.
한편, 영천의 구곡가계 시가로는 성고구곡 외에도 양수선생의 정
성고구곡 _
신이 살아 숨쉬는 횡계구곡(橫溪九曲)이 남아있다.
김문기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장은“출발지인 장군각과 구곡
청통사의 범위를 좀더 넓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며“문헌을 좀더
고증한 후에 다시 찾아와서 실체를 밝힐 생각”이라고 말했다.
두 번의 답사에서 내린 공통점으로 구암(龜岩)이 나오는 삼곡 하수
구(下水龜)는 호연정을 받치고 있는 거북바위, 사곡 만세정(晩洗頂)
은 영천성당 구 사제관인 성사헌 밑, 구곡 청통사(淸通社)는 오수동
으로 옮기기 이전에 청통역이 있었던 성내동 구터마을로 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강산이 30번 이상 변한 세월을 감안할 때 지형이나 물길이
많이 바뀌었을 것을 감안한다면 일곡에 나오는 장군각을 영천읍성
동쪽 끝 지점인 석수탕 부근이나 더 위쪽으로, 또한 구곡 청통역을
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개연성도 없지
는 않지만 일단은 조양각 부근에서 구터까지를 성고구곡의 영역으
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았다.
실체에 가장 근접하기 위해서는 시조에 나오는 장군각과 서운암,
영통사 등 옛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야 하는데 며칠간 고서적
과 고지도를 샅샅이 뒤지며 시름했지만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강정서 연구원에 따르면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가 발전한 형태인
구곡가계 시가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성고구곡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이 물길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거슬
러오면서 진행이 되었고 또 어느 정도 거리안배가 되어있는 것이 보
통이라고 했다.
_
확인된 지점을 기준으로 거리를 안배해서 대략 다음과 같이 유추
해볼 수 있었다. 일곡 범월병(泛月屛)은 조양각 주변, 이곡 서운암
(棲雲巖)은 영천교통종합대책상황실 부근, 삼곡 하수구(下水龜)는
호연정 밑 거북바위, 사곡 만세정(晩洗頂)은 영천성당 성사헌 밑, 오
곡 야연층(惹烟層)은 영서교 부근, 팔곡 사박협(沙搏峽)은 영천여고
뒤편, 육곡 적파선(寂波禪)과 칠곡 정부장(鼎扶莊)은 그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300년도 지난 지금 옛 시조 한수로 당시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그나마
가장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할 테지만. 앞으로 그동안
고증하지 못했던 옛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면 좀 더 정확하게 접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성고구곡을 답사하면서 병와선생의 사
상과 우리네 옛 선조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었음에 보람을 느꼈다.
성고구곡 _
3. 김유신 설화·황보능장 기개 숨쉬는
천혜의 호국성지- 금강산성
‘영천정신’결집할 골화소국 중심부
(삼국유사‘김유신 조’)
_
(영양지‘성곽조’)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는 황보능장과 같은 시기, 같은
장소인, 경애왕 2년 10월 고울부에 능문이라는 장군이 나오는데 활
동시기 지역 내용을 함께 고려해 보면 능장과 능문은 동일인으로
여겨진다. 9월에 견훤이 이곳에 침입했을 때 약 2개월 간 견훤의 침
입을 막을 수 있었을 정도로 성의 견강함과 높은 전투력을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천시민들의 산책로와 운동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그린환경센터.
이 일대가 바로 김유신과 백석의 설화와 함께 영천을 주재하던 골화
신의 호국정신과 통일신라 패망기에 자치세력을 형성하여 주민들을
보호하던 금강장군 황보능장의 기개가 숨쉬던 곳이다.
영화교에서 금호강을 따라 그린환경센터로 가다보면 입구 왼쪽 편
에 여러 가지 운동시설을 갖춰놓은 체육공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산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무난히 금강산
에 오를 수 있다.
금강산성 _
_
비록 찾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길을 걸으면서 맑은 바람소리와
새소리로 자연을 음미할 수 있고 또 옛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며 1천5
백년 전에 그들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보는 감회도 맛볼 수 있다.
지금도 900여m의 토석혼축 성벽과 성내에 깨어진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웅장함을 짐작하게 하지만 무성한 나무와 풀들로
뒤덮여 흔적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다만 지난 95년 3월 영천향
토사연구회원들과 보이 걸스카우트 1270 B.B.S 골벌지역대원들
이 사방 20여 리를 조망할 수 있는 정상부분(186m)에 세운 금강산
성 표석비가 길손들을 안내하고 있다. 표석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황보능장이 타고 다니다가 주인의 실수로 목 베임을 당한 용마의 발
자국이 찍힌 말굽바위가 길손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완산동 뒷산을 일컫는 금강산은 금강골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도
대한불교 태고종인 금강사가 자리잡고 앉아 당시의 전통을 이어주
고 있으며 고경면 대의동 쪽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절벽과 남천, 그
리고 용마바위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특히, 단풍이 물든 가을과 봄, 겨울의 운치가 일품이다. 고려 태조
로부터 좌승이라는 관직을 받았던 금강성주 황보능장의 묘는 3사관
학교 내에 있으며 경북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직경 16m, 높이 5m의 원형분 앞에 상석과 향석을 두고 우측 전방
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현존하는 신도비는 1947년에 건립한 것으로
조선 영조 43년(1767)에 세운 옛 비의 비문과 일치한다. 박정희 대
통령 시절 3사관학교를 만들면서 당시 이곳에 있던 많은 묘를 이장
하면서도 군인들의 귀감이 되는 황보 장군의 묘만은 그대로 두게 되
었다고 한다.
영천의 중등학교 교사로 7여 년 간 근무하면서 고대사에 관심을
금강산성 _
_
갖고 활동하던 중 지난 90년 8월, 향토문화연구회에서 발간한 향토
문화 제5집에‘골화성에 대하여-골화소국과 관련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던 이재수(58·문학박사, 경북대 강사)씨는“금강산은 신라
삼산의 하나로 비정 되는 곳으로 안 완산동의 구릉지는 골화소국의
중심부이고 대사(大祀)를 올린 곳으로 생각된다.”며“안 완산 철길
건너편 산의 북쪽 사면에는 20여기 이상의 규모가 큰 고분들이 무리
지어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이 발굴되면 골벌국의 실체를 밝
혀줄 중요한 자료가 출토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나말 여초의 대표적인 호족인 황보능장을 통해 당시 호족들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할 수 있는 이 일대에 산성공원과 옛길, 골화소
국터, 고분공원 등 시민휴식공간과 역사교육 현장이 조성된다면 더
없이 훌륭한 문화유적지이자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후 각 지역마다 그 지방을 아우를 수 있는 상
징을 찾아 만드는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
영천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삼국통일을 이끈 김유신 장군을 구해주었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
하는데 크게 기여한 금강산성이야말로‘호국충절의 고장’영천의 정
신을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지역
의 문화재를 모으고 발굴하여 영천의 중심부인 이 일대에 박물관을
지어 우리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하는 바
람은 일부 시민들만의 욕심일까?
금강산성 _
고대 영천문화의 중심지 완산동고분군… 대규모 유적 판명
고대 영천문화의 중심지 완산동. 완산동은 안완산과 바깥완산, 개
고개, 말죽거리등의자연부락으로구성되어있다.‘ 삼국사기’지리
지에는“영천에는 골벌국(骨伐國)이 존재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
의 절야화군(切也火郡)이었다고 한다. 골벌국의 왕 아음부가 사로국
에 항복한 것은 조분왕 2년(231)의 일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 일대의 많은 땅이 군부대에 수용되면서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저 길이 제가 어릴 때 개고개에서 작산 삼거리를 통해 경주로 버스
가 통행하던 길입니다. 당시에는 영천에서 사람이 죽으면 거의 대부
분이 이곳에다 묘를 쓴다고 말할 정도였으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토기를 발견했다는 신고가 수시로 들어왔습니다.”
박우락 전 영천시청 과장은“언젠가 제대로 된 발굴을 하게 되면
고대 영천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완산동고분군
중 가장 규모가 큰 개고개와 공동묘지 일대에서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겼다.
지난 1996년 대구교육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완산동고분군 지
표조사 내용을 요약했다.
1지구 고분군은 전체적으로 영천시에 접근해 있고 군부대 탄약창
의 철조망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10여기의 봉분이 남아있고
채집되는 토기는 와질(瓦質)토기이거나 타날문이 시문된 고식(古式)
의 경질(硬質)토기들이 많다. 2지구와는 지형적으로 작은 계곡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진다.
2지구 고분군은 1지구 고분군과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
어 있으며 많은 지역이 계단식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2지구에서 확
인되는 유물들은 대개가 6세기대 이후의 경질토기류가 많다.
완산동고분군은 조사결과 중대형분을 포함한 다수의 봉토분(封土
_
금강산성 _
墳)과 함께 많은 수의 토광묘(土壙墓)가 축조된 대규모의 유적임이
판명되었다. 1지구의 경우 구간의 전면에서 토광묘와 관련된 유물이
채집됨과 동시에 봉토분의 주위에서도 5~6세기 대의 유물들이 채
집되는 것으로 보아서 동일구간 내에서 유구(遺構)들이 중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적의 상한연대는 적어도 2세기 중반까지 소급될 것으로 판단되
는데 이는 채집되는 유물 중에서 와질(瓦質)의 우각혈파수부호(牛角
形把手附壺) 편(片)이 발견 확인된다든지, 와질의 노형토기와 횡침선
이 조밀하고 태토질이 순수와질인 토기가 다수 확인되기 때문이다.
늦은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 단계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단계 이후의 유물들로 보아 무
난할 것으로 판단된다. 즉 전기 와질토기의 요소를 일부 포함하고 있
으나 대체적으로 후기 와질토기의 특징을 많이 가졌다고 판단된다.
완산동 1지구에서 채집되는 유물과 비슷한 시기의 유적으로는 창
원 도계동 유적, 노포동 유적, 합천 저포A지구, 울산 하대 유적, 대
구 팔달동 유적, 경산 임당·조영동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2지구에서 채집되는 유물은 1지구에서 채집되는 유물의 양상과는
차이가 있다. 대개 와질토기나 이른 시기의 타날문계(打捺文系) 경
질토기 보다는 5~6세기 대 이후의 경질토기들이 많다. 정식조사가
아니라 명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전체적인 매장양상이 1지구에서 2
지구로 옮아간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이번 조사에서 제법 많은 양의 토기 편들을 채집하였으나, 이를 형
식적으로 분류하여 편년할 정도의 충분한 자료는 되지 못하였다. 단
지 확인되는 몇몇의 기종을 기존 경남지역의 편년자료와 비교하였
을 때 후기와질 토기단계에 속하는 유적으로 판단되어지며, 정식조
사를 실시할 경우 이보다 연대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
4. 옛길 걸으며 영천읍성 자취 더듬어
자연지형 최대한 활용, 1591년 원사용 군수 축성
영천중앙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이 영천읍성비는 지난 1995년 6
월 18일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허물어진 영천읍성의 북동과 남서에
세운 유허비로 호연정 앞에도 세워져 있다.
인류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쟁란(爭갺)은 그칠 사이가 없었고 모든
국가나 집단은 타 집단의 침략을 대비하고 스스로의 집단을 보호하
기 위해 성곽을 쌓았다.
행정 중심지에는 도성(都城)과 읍성(邑城)을 만들었고 도성과 읍성
의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구축하기 위해 멀리 외곽지대에 쌓은 외성
(外城)이 있었다.
_
또한 공격이나 방어에 중요지점이 되는 산정이나 해변, 그리고 교
통의 요지에는 진성(鎭城)을 쌓았다. 이러한 모든 성들은 각기 고립
되어 있지 않고 지리적으로 상호 밀접한 연락과 원만한 통행이 가능
하도록 연결되어 있다.
영천읍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원사용 군수가
재직할 때 쌓은 성으로 남쪽의 높은 암벽을 최대한 이용하고 부족한
지역은 인위적으로 축성했으며 북쪽으로는 마현산을 이용하고 역시
부족한 지역은 흙으로 쌓았다.
동쪽방향은 현재 중앙초등학교 동쪽계곡인 도수장골을 이용했고
동문루(東門걹) 밑에서 남천이 흐르는 구간은 원래의 계곡에 인위적
으로 더욱 깊은 구릉을 만든 것으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뚜렷이 흔적
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영천읍성 _
서쪽은 주택이 밀집되어 흔적 찾기가 쉽지 않지만 북쪽 마현산에
서 서남쪽으로 굽어진 곳에 약간의 토성이 있고 지금도 계곡으로 남
아있는 천주교회와 호연정을 갈라놓은 상속골에서 마현산 중턱 교
촌동 쪽으로 성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천읍성은 대부분의 도성과 읍성처럼 사방에 각각 성문이 있었으
며 남문에는 문루인 영양남루(永陽南걹)가 있었다. 또한 성안에는
열무당(閱武堂), 무기고 등 군사시설이 있었다.
대부분의 성처럼 영천읍성도 주성의 주위에 2-4개의 보조성이 있
어 서로간의 긴밀한 연락으로 고립을 피하고 함락되었을 때도 신속
히 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나래성〔翼城〕으로 지리적 형태로 보아
_
서문통 일대가 나래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옛날 동헌(현 보건소)을 중심으로 일대를 관아터라 부르고 동편은
형방터, 서편은 이방터라 지칭된다. 문외동은 옛날 도살장 혹은 활
을 쏘는 사장이 있었다고 지칭되는 서당골, 용이 승천한 용장골, 창
구동에는 질청마당, 옥터, 객사터, 성문터, 호방터 등이, 교촌동에는
마을에 동제나무가 있어 동네의 안위를 기원했다 하여 불러진 지당
골과 서만리골 등 다양한 옛 지명이 정취를 더해준다.
염매시장 사이 길로 복개천을 따라 걸으니 성돌이 축대로 사용된
몇몇 집들이 나타났고 동문 터는 지금의 동문교회 부근으로 추정됐
다. 이어서 성안 구석구석을 걸으며 회원들간 약간의 이견은 있었지
만 남문 터는 조밭골 영천중앙어린이집, 서문 터는 호연정-소방서
사이일 것이라고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
문제는 북문 터. 조선시대에 그려진 광여도나 해동지도, 여지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고(북문이 나타나지 않
은 곳도 있음) 길도 많이 바뀌어 추측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객사터인 성신의원 일대를 거쳐 구 등기소 밑 옛길을 따라 죽 올라
가니 가옥 한 채가 길을 가로막았다. 비탈길을 올라 향교 뒷산을 걸
으니 다양한 종류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다.
통일신라나 고려, 조선 등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파편들이
나와 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해 보았고 절을 나타내는 卍자
문양이 새겨진 기와를 발견, 절터라는 의견도 나왔으나 단정을 짓지
는 못했다.
영천읍성 _
기와조각이 발견된 조금 아래쪽을 북문으로 추정해보며 조선시대
옛길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마현산을 거슬러 밀알야간학교 쪽으로
내려왔다.
지형이 많이 바뀌고 고증할만한 전문적인 소견이나 자료가 부족해
이날 답사에서는 영천읍성의 형태에 대한 대략적인 추측만 할 수 있
었다. 더 늦기 전에 시 차원에서 전문가들을 초빙, 당시의 모습을 복
원해 문화재 탐방코스로 조성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조 36년(1760)‘ 여지도서’에 보면 영천읍성은 무너져 없어지고
성터만 조금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 전부터 성터
가 사라지고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_
읍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군수 원사용이 재직할 때 쌓은
성이다. 마현산을 배경으로 정방형에 가까운 전형적인 성으로 성벽
의 사방 중앙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이 단층누각 지붕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성의 둘레가 1,902척이라고 하였으니 약 6만평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성의 모양이 정사각형이고 그 둘레가 1,902
척이므로 한변이 475.5척이다. 따라서 면적이 226,100.25척이니
읍성은 63,700평이 되는 셈이다.
우선 성의 외각을 살피면 남쪽은 흐르는 남천에 청계석벽을 이용
하여 높은 축대를 쌓았다. 남천은 자연적으로 해자가 되었다. 그리
고 중앙에 읍성을 상징하는 영양남루‘( 영양지’권1 公解條에 영양남
루란 명칭만 전한다)가 있었다. 따라서 남문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해자인 남천을 건너게 마련이다. 남문 동편 언덕 위에 명원루가 있
다. 지금의 조양각을 말한다.
그 경계를 추정해서 살펴보면 북쪽은 마현산을 이용하고 동쪽방향
은 현재 중앙국민학교 동쪽계곡(도수장골)을 이용하여 남천까지, 서
쪽은 충혼탑 부근 교촌동 197번지 일대에서 남천쪽으로 계곡이 있
는 상속골(천주교회와 호연정을 갈라 놓은 곳)이다. 물론 남쪽은 남
천으로 향해있는 절벽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읍성주위로 2~4개의 보조성이 있어서 성간 왕래가 되도록
하였다. 지금도 영천 사람들은 북문통, 남문통, 동문통, 서문통이라
는 지역명을 실생활에 사용하고 있다.
영천읍성 _
5. 아! 전삼달 장군… 이제는 편히 쉬소서
묘소 이장과정 미라 수습, 유물 국립민속박물관 기증
임란의병장, 효자, 목민관으로‘불꽃같은 삶’충절 사표
지난 2004년 1월 15일, 용궁전씨 문중은 화산면 화산리에서 임진
왜란 당시의 의병장 전삼달 장군의 묘소이장 작업을 벌이던 도중,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송진 10여㎝ 두께에 둘러싸인
관에서 장례를 치른 지 371년이 지난 장군의 시신이 미라 상태로 보
존된 채 나왔기 때문이다.
장군의 11대손인 대한노인회 전영대 전 영천시지회장이 여러 친족
들과 더불어 전 도의원 김종덕씨의 조언을 받아 무학대사의 비결에
나오는 영천 10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히는 천마시풍(天馬嘶風)인 영
천시 금호읍 호남리 백산으로 이장하는 과정에 무덤에서 유기로 구
운 묘지명(가로 20㎝, 세로 20㎝, 폭 1㎝) 2개가 발견되었다.
시신은 수의 10습을 입고 있었다. 문중에서는 발견된 유물중 수의
1습과 지석 2점 등 총 2건 3점을 지난 6월 10일 국립민속박물관에
_
기증하고 2천여 만원의 예산을 들여 비석, 문인석, 사자상, 석등, 망주
등을 세워 묘역을 단장하여 장군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편히 잠들게
했다.
미라(mirra)는 천연적 또는 인공적인 처리로 오랫동안 원형에 가
까운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인간 또는 동물의 시체를 일컫는
말로 지난 2002년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에서 430년 만에 발
견된 파평윤씨 모자 미라 및 유물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돼 세
간의 화제가 된 바 있다. 미라가 되기 위해서는 밀폐된 공간에서 습
기가 거의 없어야 하고 미생물이 살 수 있어서는 안 된다.
파평윤씨 모자 미라가 추운 겨울인 12월에 사망했고 시신 전체를
정결한 옷으로 꽁꽁 사맸으며 매우 두꺼운 이중목관을 사용했음을
미루어볼 때 전삼달 장군의 시신도 이와 비슷한 환경요인을 갖추었
을 것으로 추측되며 또한 두꺼운 송진으로 둘러싸인 관도 일정한 역
전삼달 장군 _
_
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영고정 전삼달 장군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안강 진중에서
쓴 글이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왜병을 상대로 정규군이 아닌 의병
들을 모집하여 대치한 23살의 젊은 의병장이 죽음으로서 보국하겠
다는 뜨거운 충정을 표현한 것이다.
1570년 녹전동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치밀하여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연마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92
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의 충정으로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규
합하여 사천(沙川)전투와 영천복성전투, 경주전투에 참가해 큰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 관계에 첫발을 디뎠고
1612년 함평현감으로 있을 때 북쪽 변방지역에 오랑캐가 나타나 노
략질을 자행하므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북방 경비책으로 심양(瀋陽)에
급파되어 이를 쳐부수며 큰 전과를 올렸다.
1616년 정3품인 절충장군에 봉직되었고 용양위부호군 영흥대도호
부사, 장단진도호부사가 되었다. 재직하는 곳마다 성을 쌓거나 보수
하고 군기 정비와 군사 확충으로 적의 출입처나 염탐꾼을 봉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토록 했다. 장군
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장단에 선정비(善政碑), 황주에 거사비
(去思碑)가 각각 세워졌다.
1626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배명 받는 자리에서 광해군은“경
은 이미 임지에서 온 힘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였으므로 상으로 임
직을 특명하니 용렬한 일을 경계하고 군율을 바로잡아 명령을 기다
리도록 하라. 더욱이 경은 학식이 높고 검도와 궁술이 출중하니 그
무예를 바탕으로 영남지방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훌륭한 의용군이
되도록 훈련을 시켜라. 이가 곧 나라와 종묘사직에 충성하는 길이
요, 스스로 명성을 얻어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교시했다.
이는 장군이 격전장에서 치른 용맹은 물론이거니와 주도면밀한 작
전계획과 사전 방어계획을 훌륭하게 세웠음을 반증하고 있다.
전삼달 장군 _
1625년 4월 용양위부사, 7월 장단진병마첨절제사겸 도호부사,
1628년 황주목사와 황해도병마절도사, 2년 후에 행용양위부사와 김
해도호부사를 거치며 장군이 소임을 다하자 조정에서는 크게 기뻐
하여 인조대왕이 친히 말 한 필을 하사하기도 했다.
“가선대부 황해도병마절도사 전삼달에 이르노라. 경은 국방에 맡
은 책임이 중하므로 병졸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히 하고 도적을 막
는데 최선을 다하라. 혹 나와 독대할 일이 있으면 비밀로 하라. 만약
간모한 일이 있을지 모르니 비상시는 합의한 후에 시행하기로 하고
21명부를 하사하니 경은 잘 보관하여 때가 오면 실행하여 국가에 더
욱 충성하라”
지금까지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어서각(금호읍 약남리 소재)의
유서내용으로 지략과 무예를 겸비한 장군을 인조대왕이 신임하여
오만불손한 청나라를 응징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나 불행히도 큰 뜻
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유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633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전삼달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지덕장으로 나라를 위해 구국의 충정을 바쳤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
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3년 상을 마친 효자로, 백성들에
게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 한 평생을 불살랐다. 서거한 지 376년
이 지난 지금, 후손들에 의해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로 이장된 장
군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에게 전하고픈 말이 떠올랐다.
아! 전삼달 장군… 이제는 편히 쉬소서.
_
영영천천조조양양각각 __
고인돌 사랑무덤
진불암
북안 도유 광릉
인종대왕태실
임고 선원
6.‘ 내통문’만들어사후에도사랑나눠
걸인의 애환담긴 자양 보현리 신기마을 고인돌 사랑무덤
30여년 가까이 남남으로 살아오던 남녀가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뭉쳐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네의 일상적인 세상살이.
개중에는 알콩달콩 애틋함과 사랑으로 서로 의지하면서 한 평생의
반려자와 동지로 살아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서 으르렁거리며 원수 아닌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부부도 많이 있다.
가난했지만 젊은 시절 고생만 하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아내
를 못잊어하며 지극정성으로 가꾼 한국판 타지마할, 고인돌 사랑무
덤에서 부부사이를 한번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
봉분이 푸른 타일로 덮여있고, 그 위에 큰 돌로 만들어진 덮개까지
마치 고대 고인돌을 연상케 한다. 왕릉에서나 볼법한 장식물과 안으
로 통하는 문도 이 무덤이 보통 무덤은 아닌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
옆에 자리한 굴처럼 생긴 무덤 역시 특이하다.
_
이 무덤은 대구에 살던 오원복 노인이 죽은 아내를 위해 10여 년
전 만들어놓은 무덤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병으로 몸져누워 있을
때, 할머니가 지극 정성으로 할아버지를 돌봐드렸고 그 때문에 할아
버지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병간호에 지쳐서일까, 할머니의 건강이 쇠약해져 결
국 돌아가시고, 자신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한 할아버
지는 할머니 무덤이라도 좋은 자리에 잘 꾸며주고 싶었으리라.
신기마을을 찾아 굴을 파고, 돌을 얹어 그 무덤을 만드는 데만 무
려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무덤을‘한국판 타지
마할’이라 부른다고.
인도의 한 남자가 자신의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22년간 만들었
고인돌 사랑무덤 _
다는 신비의 무덤인 타지마할. 오원복 노인도 9년전 세상을 떠났지만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다.
“여보 땅을 치고 통곡도 하고 울어도 봤소.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 몸 건강히 잘 있구려 마누라”
자양면 보현4리(신기마을) 건너편 야산에는 연자방아와 장독, 화
분 등 각종 조형물로 장식을 하고 시멘트 바닥에 보랏빛 타일로 봉
분을 덮은 두 개의 무덤과 주위에 심겨진 밤나무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국판 타지마할, 사랑무덤’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무덤은 오원
복 노인의 부부무덤으로 오 노인은 지난 81년 10월, 끔찍이 사랑하
던 부인이 고혈압으로 숨지자 자신을 위해 고생만 하다가 죽은 부인
을 잊지 못해 가족들의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인묘소 옆에서 3
년 동안 움막생활을 하며 당시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오 노인이 죽은 부인을 그토록 잊지 못한 것은 젊은 시절 척추 뼈
가 썩어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당시 23세 꽃다운 나이였던 부
인의 지극한 정성으로 자신의 생명을 건졌기 때문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부인이 오 노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새벽 3시에 경찰에게 잡혔으나 사정을 들은
경찰이 사실을 확인하고 돌려보내 주었다는 내용이 비문에 남아 있
어 당시 부인의 애타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오씨는 죽은 부인이 생전에 피땀으로 모은 250만원으로 구입한 1
_
천9백여 평의 터에 불쌍한 아내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고인돌무덤
공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원조성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대구의 역 주위와 정류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불구의 몸을 이끌고‘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와 흘러간 가요들을 열창하며 한푼 두푼 모아 5년여에
걸쳐 결국 완전한 고인돌무덤공원을 완성하게 되었다.
고대 부족사회 때의 묘제인 우리나라의 지석묘는 지상에 탁자형으
로 높이 세워진 북방식과 지상과 석반이 낮게 세워진 남방식의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오 노인이 만든 것은 이 두 가지 양식을 혼합한
형태이다.
작고한 오원복 노인도 자신이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부인의 묘
고인돌 사랑무덤 _
옆자리에서 안식하게 되었는데 무덤사이에 부부간 묘지의 연결통로
인 내통문을 만들어 죽은 뒤에도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공원 내에는‘부부간에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어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글귀가 새겨진 돌을 비롯
해 부인이 동대구경찰서장에게 승공부녀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된 내
용 등이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박 서방 어린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니 나는 죽어도 원이 없네.
큰 일하도록 빌어줌세. 우리 박 서방은 처갓집에 근10년 간 득을 주
었다고 언제든지 동네사람을 만나면 장모는 자랑을 했다네. 그런 착
한 사위도 드물다고”라며 사위사랑을 나타낸 글도 보인다.
_
고인돌 사랑무덤 _
입구에 있는 화장실을 비롯해 각종 조형물과 크고 작은 돌들의 조
화, 잘 다듬어진 주위 경관들이 잘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이곳에는 더러 사람들이 찾아온 흔적들이 보이지만 이들 부부의 사
랑에 감화되어서인지 아직까지는 말끔하게 잘 단장되어 있다. 그러
나 묘 사이가 갈라지고 균열을 보이고 있어 머지않아 붕괴되지나 않
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평생 동반자의 개념이 사라져 가고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서로
의 길을 가려는 이 시대의 부부관에서 보면 당대의 기인으로 고집스
런 삶을 살며 기어이 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오원복 노인은 우
리들에게 특이한 사람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덤사이에
통로를 만들면서까지 함께 하고자 했던 이들 부부의 사랑 앞에 우리
들은 진정한 사랑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7. 새소리, 물소리… 길손 반기는 고즈넉한 산사
수도사 진불암
웅장한 폭포와 계곡, 울창한 산림 절경, 가족동반 등산하기에 적합
등산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번 주말에는 부모님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할 수 있는 수도사 진불암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천년고찰 수도사에서부터 팔공폭포를 거쳐
고즈넉한 암자 진불암의 기둥을 만져보고 내려오는 것만 해도 의미
가 있을 것 같다.
초가을의 호젓함만큼이나 웅장한 폭포, 6㎞나 이어지는 울창한 산
림에 잠시나마 시름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647년(신라 선덕여왕 14)에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수도사의 창건 당시 이름은 금당사였는데 큰 화재를 만나 소실된 후
재건되면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고 해서 수도사라 이름이 붙여졌다
고 한다.
_
절 마당에 있는 중창불사 조감도를 보니 원통전이나 삼성각, 선원
등 현재의 건물 외에도 지장전과 보해루, 돌탑 등 옛 영화를 회복하
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노사나불괘불탱은 1704년(조선 숙
종 30)에 그려져 1822년(순조 22) 한차례 개수한 것으로 1997년 8
월 8일 보물 제1271호로 지정되었다.
화면 가득 노사나불을 그린 독존형식의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만든 대형 불교그림으로 이 괘불의 노사나불은 둥근 얼굴에 화
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연꽃가지를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받
치고 있는 모습이다.
보관 주위에는 비로자나불 형태의 조그만 불상이 7개 있으며 뒤로
머리 광배가 둥글게 둘러져 있다. 둥글고 풍만한 어깨 양쪽으로 붉
은 옷이 걸쳐져 있으며 팔꿈치 부분까지 머리가 흘러 내려와 있다.
옷의 아래 부분과 등뒤의 광배는 하늘색으로 나타냈고 등에서 머리
진불암 _
위쪽까지는 오색광선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둥그스름한 얼굴과 어깨, 약간 처진 눈썹, 색상 등 조선 효종·숙
종때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도사에서 1㎞정도 더 올라가면 팔공폭포가 나온다. 이 폭포는
높이 약 30m, 폭 10m의 3단폭포로 수량이 많아 경관이 수려하고
물 또한 맑아서 치산계곡의 명물로 손꼽힌다. 폭포의 아름다움에 반
해 산행을 포기하고 이곳에서 주저앉아 버리는 등산객들도 더러 있
었다.
폭포에서 나와 임도를 따라 100m정도 더 오르면‘신녕재 2.4㎞,
동봉 5㎞, 진불암 2.5㎞’라 적힌 안내판이 나타난다. 여기서 진불암
은 오른쪽 방향이다. 이곳에서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잠시 쉬어
가는 것도 좋을 듯했다.
여기서부터는 좀 가파른 길이 이어지는데 여유를 가지고 보폭을
좀 줄여 쉬엄쉬엄 걷는다면 노약자나 어린이들에게도 그다지 힘든
코스는 아닐 듯했다. 일부 몰지각한 등산객에 의해 안내표지판의 숫
자가 떨어져 나간 것이 못내 아쉽긴 했지만 20여분이 지나니 부도탑
2기가 나타났고 다시 20여분을 더 걸으니 진불암이 나타났다.
암자 앞쪽으로는 동봉과 염불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장쾌한 장관을
이루고 있고 뒤편에 있는 감로수는 더위에 지친 등산객들의 목을 시
원하게 적셔준다. 한숨 돌린 후 경치를 감상하고 있으니 스님이 암
자를 찾은 손님들에게 사탕을 선물하며 인정을 나타냈다.
_
깊은 산 속에 위치해서인지 놋그릇을 닦는 모습과 전통 아궁이에
장작을 때는 가마솥이 인상깊었다. 신라 진평왕 때(632년) 창건되어
무수히 많은 고승을 배출한 진불암의 현존건물은 고려 문종 때 혼수
국사가 중건한 건물로 1637년 이응선씨와 1813년 등월, 월하 두 스
님이 다시 중수했다.
수도사부터 산행을 시작한다면 진불암까지 성인 남자라면 1시간
정도, 어린이나 노인들을 동반한 경우라도 2시간이면 넉넉할 것으
로 보였다.
등산의 계절 가을을 맞아 단풍이 물든 호젓한 산길을 걸어보는 것
도 괜찮을 것 같다.
진불암 _
_
진불암 게시판에 써놓은 제목과 작가 미상인 한 편의 시에서 삶의
여유를 찾아보자.
‘화강암 석굴에 있는 4기의 불상’은 어디에?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진불암 일대에 불상 있다”명기
1942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진불암
일대에 불상이 있었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수도사와 진불암 사이에 거대한 화강암 석굴이 있고 그 가운데 높
이 3척(약1m), 흉폭(가슴폭) 1척8촌(30~40cm)의 좌불상 1기와, 높
이 3척4촌, 흉폭 1척2촌, 높이 2척5촌, 흉폭 1척2촌의 수호불 2기,
그리고 근처에 마멸이 심하고 부서진 불상을 포함 총 4기의 불상이
있음이 명기돼 있다.
학계에서는 이 책에 기록된 내용과 보물로 지정된 유물, 문화재 및
사찰과 탑 등 크기와 위치, 보관상태 등의 기록이 지금과 크게 다르
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임괄)에서 지난 2006년 3월 19일과 같은
진불암 _
해 11월 18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및 학생들이 4월 15일 이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당시 경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에서는 불상을 찾지는 못했지만 아
래와 같이 정리했다.
“팔공산 아래 진불암 계곡의 암석지 내의 일부로서 수도사에서 약
20정(町, 1정=109.091m/dir 2.2㎞), 진불암에서 수 정(약
400~500m)의 산복(山腹, 산중턱)의 거대한 화강암 굴 중에 자연석
에 조각된 높이 3척(尺)(약 90㎝), 흉폭 1척8촌(寸)(약 54㎝)의 좌불
1체(體), 높이 3척4촌(102㎝), 흉폭 1척2촌(37㎝) 및 높이 2척5촌(76
㎝), 흉폭 1척2촌(37㎝)의 수호불(守護佛) 각 1체(협시보살로 추정)가
있다.
표면에 균열이 있지만 거의 완전하고, 다른 2체도 일부 파손된 부
분이 있지만, 거의 완전에 가깝다. 더구나 부근에 분쇄되어 없어져
버린 것 2~3체가 있다.”
그동안 팔공산지킴이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문의를 받고 함께
찾아 나서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다만 최근에 진불암을 관리하며 이 일대에서 20년 이상 생활한 삼봉
스님(72)의 소재가 군위군 고로면 낙전리 보림암인 것을 파악한 것
이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2006년 11월 18일 진불암 건너편 산봉우리에 석탑이 있음을 제보
하고 안내했던 이수춘(71·영천시 완산동)씨는“등산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큰스님으로 불리며 이 일대에서 등산로를 개척하며 수행 정
진한 삼봉스님을 만나면 불상을 찾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
라고 귀띔했다.
_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는 조만간 삼봉스님을 만난 뒤 다시 한 번
불상 찾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수도사와 진불암 사이에 거대한 화강
암 석굴안에 있는 4기의 불상을 찾을 날이 과연 언제일지…. 대구
팔공산지킴이(회장 박종곤) 등 전국에서 불상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과연 찾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진불암 _
8. 둔촌과 천곡의 애틋한 우의 서려
- 북안 도유리 광릉
진한 우정 이야기 초등 4년‘생활의 길잡이’수록
장마철로 접어들면서 후텁지근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이
런 날씨에 낚시가 잘 된다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웅장한 규모
의 도유못에는 수많은 강태공들이 가족을 동반 고기잡이에 여념이
없었다.
밋밋한 구릉지를 북쪽으로 넘으면 괴연동에 이르고 서쪽으로 넘으
면 대창면 직천리에 이르는 도유리는 도유못에서 발한 수원이 마을
앞을 흐르며 서남쪽은 구릉지로 되어있다. 당리, 용계, 북리, 도리 4
개의 부락이 들 또는 물을 경계로 서로 인접하고 있으며 토지가 비
옥하여 농산물이 매우 잘된다.
약 5백여년전에 개척한 도유리는 경주에서 서울로 가는 한 길목이
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도유지는 수량이 매우 많아 북안면 전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서 안쪽으로 못의 물을 바라
_
보며 1㎞ 정도 들어가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왕릉 못지않게
웅장한 규모의 무덤을 만나게 된다. 주변 또한 말끔하게 정비가 잘
되어있다.
이곳은 광주(廣州)이씨 대종회에서 시조로 모시는 이당의 무덤이
다. 이 무덤에 얽힌 사연은 지난 2001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생활의 길잡이’(이호연과 최원도의 우정이야기)에 실려 있고 일제
시대에는 교과서에‘진우(眞友)’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둔촌과 천곡
의 우정에 대해 일본사람들이 존경하면서 교과과목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들의 소풍이나 자녀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곡(泉谷)은 영천최씨인 원도의 호다. 그는 여말의 사람으로 요승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
땅에 내려와 우거하고 있었다. 둔촌 이집과는 과거 동년생으로 절친
광릉 _
한 친구였다. 어느 날 둔촌은 이웃에 살고 있는 신돈의 측근인 채판
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 말이 신
돈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장차 닥쳐올 큰 화를 예견한 둔촌은 연로하신 노부를 등에 업고 영
천 땅의 천곡을 찾아 낮에는 숨고 밤이면 산길을 택해 걸었다. 천신
만고 끝에 몇 달이 걸려 도착한 천곡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이
라 많은 인근주민들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있었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며 천곡을 찾았으
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천곡은 반기기는커녕 대로(大걕)하여“망하
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
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소리치며 오히려 내쫓았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둔촌은 다시 노부를 등에 업고 정처 없이
_
그곳을 떠났다.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를 태
워야 된다며 둔촌이 앉았다가 떠난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한편, 둔촌은 천곡에게 쫓겨나 산길을 걸으면서 천곡이 진심으로
자신을 쫓아낸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여 멀리가지 않고 길옆 덤불
속에서 밤을 맞고 있었고 천곡은 둔촌이 노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 손님들이 돌아가자 등불을
켜들고 산길을 더듬어 찾아 나섰다.
그는 산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둔촌 부자를 발견하고 서로 얼싸안
으며 산을 내려와 밤이 깊은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 다락방
에 숨겼다. 이렇게 하여 4년 간에 걸친 다락방 피신생활이 시작되었
으니 그때가 1368년(공민왕 17)이다. 천곡은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
찬도 많이 담게 해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긴 세월동안 날마다 고봉으로 담은 밥을 먹어치우는 주인의 식욕
을 의아히 여긴 여종 제비가 문구멍을 몰래 들여다보고 놀라서 안방
마님에게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이 결국 천곡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함구령을 내린다고 과연 비밀이 보장될까? 그러나 그 방법밖에 없
어서 식솔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에 비밀이 새는 날에는
양가가 멸망한다는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여종 제비는 비밀을 지키
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제비를 연아(燕娥)
라고 적고 있다.
그 후 영천에 수색이 시작되어 천곡의 집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
광릉 _
_
으나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동리사람들의 증언으로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1369년 둔촌의 부친이 돌아
가셨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비밀리에 치러
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실로 컸다.
천곡은 자기의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빈염을
하고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
냈다. 이곳이 바로 도유리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공 묘소 즉, 광릉인
것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여 유배되었다가 곧 주살
되었고 장장 4년에 걸친 피신생활도 끝이 났다.
둔촌이 떠날 때 천곡은 시로써 전별했고 그 시는 지금도 전한다. 둔
촌은 그 후 판전교시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로 세월을
보냈고 천곡도 좌사간으로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시와 술
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자고로 우의의 두터움을 말할 때면 관포
(管鮑)와 양좌(羊左)를 들지만 둔촌과
천곡의 우의도 오래도록 기릴 만하다.
둔촌의 후손들이 산 아래에 천곡의
은혜를 추모하기 위해 보은당(報恩堂)
을 지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으
며 충비(忠婢) 제비를 잊지 않기 위해
제비의 무덤 앞에 술과 밥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630여년이 지난 지
금도 그 단을 유지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무덤 일대에는 나현회관 앞에 둔촌
선생유적비가, 이당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재사인
추원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여 정착한 사간 최원
도, 장례원판결사 최형도, 형조참의 최정도 3형제의 단을 수호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은 묘재인 나현재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 전하는 둔촌과 천곡의 우정과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자
기가 모시는 주인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던 몸종 제비의 이야기, 자
양면 용산리에 있는 충노 억수의 무덤, 충과 효에 큰 모범을 보였던
포은·노계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의 우애를 가르쳐준 화북면
횡계리 옥간정의 양수선생, 부부사랑을 몸소 실천한 오원복 노인의
고인돌 무덤, 자양면 충효리에 서린 산남의진의 충과 효….
죽어서 오히려 더 큰 모범으로 남아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시킨
이 분들의 삶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얻어야 될까?
광릉 _
9. 복원된 인종대왕태실, 상춘객 발걸음‘유혹’
귀농대와 가봉비 조선 후기 섬세한 석공예술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해 마지막 용틀임을 하는 계절, 심
하게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다가 2007년 복원된 인종대왕태실(경상
북도유형문화재 제350호)을 찾았다.
등산하기 좋은 날씨를 맞아 개인이나 단체로 등산을 즐기기 위해
은해사를 찾아온 등산객들을 바라보며 치일지에 도착한 후 20여분
정도 걸려서 꽤 가파른 비탈길을 800m정도 오르니 산뜻하게 복원
된 인종대왕태실이 일행을 반겼다.
원형을 그대로 살린 이수와 귀부사이에 맞춰 넣은 귀농대(갋籠臺)
의 비신에는‘가정 이십 오년 오월 일건(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_
전체적으로 잘 정돈해 복원해놓은 것을 보면서 지난해 초에 무질
서하게 방치돼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던 것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변
해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영천시 청통면 은해사 내 태실봉에 위치한 인종태실은 중종 16년
(1521년) 조성됐으며,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
는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명분으로 54기의 태실을 경기도 서삼릉
으로 이전했는데, 이때 인종태실 태호(胎壺)도 이봉됐다.
인종태실은 귀농대(갋걬臺)와 가봉비(加封碑) 등 섬세한 조각으로
조선 후기 석공예술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로 지난 1998년 유적발굴
사업을 시행한 뒤 2006년 도유형문화재 제350호로 지정됐다.
왕의 태실은 백성들에게는 신앙과 같이 신성시됐다. 태실봉을 감
인종대왕태실 _
_
싸고 있는 은해사는 창건 당시 해안사라 불렸으나 1546년(조선 명종
원년) 천교화상이 현재의 위치로 옮긴 뒤 은해사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후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자 영조의 어제완문을 보관
하는 임무를 맡은 사찰 역할을 맡았고, 조선시대 4대 부찰에 속할
정도로 사세를 크게 떨쳤다.
김종식 경상북도문화관광해설사는“은해사 입구에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점으로 미뤄 이곳이 얼마나
신성시됐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1929년 일제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태실과 왕릉을 직
접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3원과 46묘, 54
기의 태실을 공동무덤 형태로 모아두고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
인종대왕태실 _
을 낮추고자 계획했다. 특히 서삼릉의 담장을 날일(日)자 모양으로
쌓아 쇠말뚝 만행처럼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시켰다.
영천시는 가봉비의 비좌로 쓰인 거북이 모양을 한 귀농대가 원형
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등 문화재 가치가 높아 앞으로 청소년들의 역
사교육현장으로활용할계획이다.
영천시청 문화재담당자는“인종태실을 복원하기 위해 명종태실과
서삼릉, 효릉 등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며“어렵게 복원된 태실이 학
생들의 문화유산 현장학습이나 영천의 소중한 문화재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0. 산수경치 빼어난 영천의 무릉도원 선원마을
송림 울창, 고가옥 즐비한 반촌… 정용준가옥, 함계정사
산수의 경치가 무척 아름답고 학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이라 불렀다는 임고면 선
원마을. 마을의 동쪽과 남쪽으로 자호천이 흐르고, 북으로는 덕연리
와 접경하며, 서쪽으로는 화북면과 접하고 있다.
선원동의 남쪽 자호천 건너편 들판에 정(鄭), 김(金), 이(굃) 삼씨
(三氏)의 세 가구가 동네를 제일 먼저 형성했는데, 자연부락 명칭을
새각단이라 한다.
마을 뒷산 언덕이 고리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고 하여 환고(還
皐) 또는 대환(大還)이라 하는데 영천에서 살기 좋은 세 곳‘일 자천,
이 환고, 삼 평호’중에 속한다.
지금도 마을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개와(蓋瓦)지붕과 정자의 헌
함(軒檻)들이 즐비하여 반촌으로서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으며 마을
_
뒤에 있는 선조의 묘소를 중심으로 1만여㎡의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인근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각광을 받
고 있다.
본래 영천군 환귀면의 지역으로서 선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
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환동을 병합하여 임고면에 편입되었다.
조선 인조 때 벼슬에서 물러나 입향한 정호례라는 선비가 도연명
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이라 부른 것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
으며 오천정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입구 왼쪽 언덕에 문화재자료 제230호인 함계정사가 자리하
고 있다. 종부가 늘 정성스럽게 쓸고 닦은 덕분에 지금까지도 여전
히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정사에 올라서면 야트막한 산 아래 펼쳐진 들판과 집들, 저마다의
선원마을 _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자동차와 함께 저 멀리 보이는 평천보가 마음
속의 여유로움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게 한다.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영천의병장 호수
정세아의 현손인 함계 정석달(1660~1720)이 숙종 28년(1702)에 학
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정자건립을 시도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
선 소재(小齋)를 지은 것이 안락재이다.
그 후 정조 3년(1779) 손자 일찬(1724~1797)이 중건하여 함계정
사라 했다. 정석달은 갈암 이현일의 문하에서 수학한 성리학자로 병
와 이형상, 횡계 양수와 학문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냈다. 가례혹문
등 3권의 문집이 남아있고 대산 이상정이 서문을 지었다.
정사 뒤 야산솔밭에 오르니 동네의 개들이 낯선 이에 대한 인기척
을 느끼고 사정없이 짖어대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몇 년 전에 아
이들을 돌보던 어린이집 역할을 했던 곳이어서 미끄럼틀과 철봉이
_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마을의 고가들을 내려다보며 휴식
을 취하는 것도 이 마을탐방의 묘미다.
몇 해 전 태풍으로 일부분이 무너졌던 흙 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
고 동네 곳곳에 들어선 현대식 가옥들, 과수원과 밭들로 인해 옛 정
취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안쪽
으로 들어가니 정자를 지은 후 연못에서 저절로 연꽃이 생겨 이름이
붙여졌다는 연정이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중요민속자료 제107호로 지정된 정용준 가옥은 조선 영조 원년
(1725)에 건축한 것으로 본채와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일자형으로 합쳐 있고, 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평면의 안채와 곳간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방주와 납도리로 결구한 3량
가구의 소루수장 물익공집이다.
선원마을 _
후손인 정동근씨와 부인 이정숙씨는 관광객들이 많은 날에는 하루
50~60명까지 찾아온다고 했다. 국가문화재인 관계로 조금씩 보수
공사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예산 때문인지 대대적인 수리는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다 보니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대문이 없고, 여름에는 옷차림 때문에 좀 불
편하며 간혹 밤늦게 찾아오면 당황스럽다고.
대구-포항 간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마을의 정기를 간직했던 학산
의 절개와 함께 나날이 쇠락해가고 있는 선원마을 사람들은 민속마
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쉬어갈 수 있도록 더
이상 마을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_
넓게 퍼진 고양들, 연중 맑은 물소리 대환마을
철불좌상은 고려전기 양식 대변, 세덕사는 강학도장, 충절 가르쳐
양항교를 건넌 후 좌회전해서 마을 안으로 1.5㎞정도 들어가니 세
찬 바람에 볏단을 덮어놓은 비닐이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대환교를 건너면 마을 뒷산의 언덕이 고리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하여 환고라고도 불리는 임고면 선원2리인 대환마을이 나온다.
동쪽은 언덕위 선원마을과 접하고 북쪽은 학산이 우뚝 솟아 있으
며 서쪽은 천길 언덕인 나비등과 그 밑에 지금도 큰비가 오면 물귀
신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전설이 깃든 고래소, 등 너머에는
아죽곡이라는 긴 골짜기가 길게 펼쳐져 있다.
남쪽은 고양들이 넓게 펴져 이 마을 곡창지와 생명선을 이루며 들
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자호천은 강류가 큰 들을 다 삼키고 산기슭
선원마을 _
에 이르러 비운을 겪었던 과거와
달리 잘 정리되어 연중 맑은 물줄
기를 이룬다.
복숭아와 딸기농사가 유명한 이
마을에는 산기슭에 철불좌상이 도사
리고 앉아 고양들을 굽어보고 있다.
고려시대(추측), 이 마을에는 굉
귀사라는 화려하고 웅대한 고찰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사찰은 불타
버리고 주인 없는 철불좌상만 길가
에 버려진 채로 수백 년이 흐르면
서 불상의 왼쪽손목이 절단되어 없어지고 다시 오른쪽 팔뚝이 잘리
는 등 비운이 잇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60년경 이 마을에 살던 정진수라는 사람의 꿈에 부처
님이 나타나“나는 이 근처에 있는 부처인데 머리가 차가워 견딜 수
가 없으니, 바라건대 눈비만 피할 정도로 신경을 써준다면 그대의
은공을 갚겠노라!”하기에 그 장소에 가보았더니 정말 부처의 머리
가 노출되어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주위를 깨끗이 정리한 뒤 작은 오
두막을 지어 눈비에 맞지 않도록 했고 그 후 부처의 은덕으로 8대독
자로 내려오던 이 집안에 손자 4형제를 얻었으며, 또한 가난했던 살
림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_
선원마을 _
6·25사변이후 정연대라는 사람이 산신각을 시주했고 건축용 자
재를 동민과 함께 주선하여 사방8자 크기 두칸의 법당을 건립, 규모
는 작지만 아담한 절을 지어 선정사라 했다. 보물 제523호로 지정된
이 선원동철불좌상은 높이 151㎝, 폭48㎝인 견실한 철불좌상이며,
모양은 비교적 완전한 편이지만 양손은 결실되었고 주조 후에 때운
흔적이 곳곳에 있을 뿐 대체로 완전한 편이다.
높직한 육계에 중앙계주가 뚜렷한 나발의 머리모양, 얼굴면적에
비해 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 작은 코와 입, 짧고 융기된 인중을 나
타낸 굳은 얼굴표정은 이 시대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넓은 어
깨, 발달된 가슴, 잘쑥한 허리 등 몸의 굴곡이 표현된 건장한 신체로
앞 시대의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가늘어진 팔, 양감이 줄어든
다리는 다소 어색한 느낌을 준다.
안정된 신체에 얇은 우견편단의 법의가 간략한 옷주름을 형성하여
몸에 밀착되어 흐르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전기의 양식을 대변해주
고 있는 우수한 철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철불좌상 조금 앞쪽에 위치한 민속자료 제87호인 환구세덕사는
본래 호수 정세아의 후손들이 환구위에 서재를 지어 문중자제들의
강학장소로 삼았던 곳으로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
(1535~1612)와 아들 백암 의번(1560~1592)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1년(1777) 서재 뒤에 충현사를 지어 향사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정의번은 경주전투에서 포위당한 아버지를 구출하려다 종 억수와
함께 순절했으나 시신도 못 찾고 타고 다니던 말만 돌아왔다.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오천정씨들의 문중묘소인 하절에 가면 시총의 시초가
된 그의 무덤과 억수의 무덤이 후손들에게 충절을 가르치고 있다.
그 후 나라에서 충효정려가 내려 사당좌측에 충효각이 세워졌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거되었고 그 유지에 충효각과 부속건물
인 유사채와 고직사만 남아 선조들의 정신을 기린다.
대환마을에서는 고요한 가운데서 새소리를 들으며 인근에 위치한
충이당과 창의문을 비롯, 두루봉, 성짓곡, 천왕미기 등을 통해 옛 풍
습과 정취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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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천천조조양양각각 __
하절 일대
임고 매곡
화산 가상
화남 귀호
옥간정·모고헌
11.‘꽃·달·술’선비풍류에 젖어 - 자양면 하절 일대
문화재ㆍ풍수 간직한 유적지, 오천정씨 유적·문중 묘소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맑은 날을 기다리며 하루, 이틀이 지났
고 어느덧 수요일. 원고마감도 마음에 걸렸고 비 오는 날의 산행도 나
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김밥을 주문하고 물과 음료수도 챙겼다.
미리 식사를 해결하고 출발해도 무리는 없었지만 혼자 산에서 도
시락을 먹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었다. 추수가 끝난 시간의 여유로움
을 간직한 들녘을 지나 영천댐에 이르니 굵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하
늘과 산, 물이 하나였다. 김민기가 불렀던‘친구’가 생각났다.
비 오는 날의 영천댐 물은 원래 이런 색이었던가? 오늘따라 유난
히 누렇게 보이는 댐 물을 생각하고 있는데 코오롱 마라톤 선수들이
달려온다. 마라톤 선수들은 비가 와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는 모양
_
이다. 시청에서 18㎞,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천 정씨 문중묘소인‘하절’과 유형문화재 71-76호로 지정된 강
호정, 하천재, 오회공종택,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이 어우러진 곳.
지난해 여름 첫 방문 후 느낌이 너무 좋아 울적할 때마다 찾고 싶었
던 곳이다.
누렇던 댐 물도 강호정 앞만큼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아직 지지
않은 마지막 단풍잎이나 바닥에 떨어진 샛노란 은행잎을 밟으면서
비록 혼자였지만 늦가을 정취를 만끽했다.
입구에서부터 호수 정세아 장군이 임란 후 고향에 돌아와 자호언
덕에 정자를 짓고 여러 교우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강호정, 오천 정
씨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 정세아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
목사인 정호인이 창건한 하천재, 정세아의 넷째 아들인 수번이 그의
하절 _
셋째 아들 호신의 분가주택으로 건립한 오회공종택, 정석현을 추모
하기 위하여 관찰사 권대규의 후원으로 건립한 오회당이 나란히 자
리잡고 있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중호·중기·중범·중락 4형제의 우의
를 돈독히 하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사의당과 삼휴
정호신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한 삼휴정이 역사의 풍광을
보여준다. 정호신이 조부인 호수 정세아가 살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 풍경을 노래한 '삼휴'는 당시의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고도 논공행상에 개의치 않고 여헌 장현
광, 지산 조호익 등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조용히 여생을 마친 호수
선생이 강론했던 강호정을 거쳐 찾아간 하절은 묘터로서는 영천에
서 가장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꼬깔산(2.5㎞), 기룡산(5.8㎞), 묘각사(7.8㎞)로의 등산
로가 비교적 잘 닦여져 있어 가족이나 단체의 산행도 즐길 수 있으
며 어린 자녀들을 동반한 경우라면 1.5㎞정도까지 다녀오는 것도 좋
은 방법이다.
산행 후에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충효삼거리에서 화북방면으
로 들어가 진한 부부애를 느낄 수 있는 오원복 노인의 무덤을 들러보
고 옥간정에서 정만양·규양 양수선생의 형제애를 느끼는 것도 보람
_
된 여정이 될 것이다.
자양면 소재지 조금
못 미친 곳에 자리 잡은
오천정씨 문중묘역은
음택(陰궀) 자리 중 으
뜸으로 손꼽히는 곳이
다. 정효자가 얻은 명당
이라는 하절에는 울창
한 노송들이 둘레 약 2㎞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우거져 있고 99기
의 큰 무덤들과 비석들이 있으며 또한 고색창연한 기와집들이 어우
러져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효자는 노촌 정윤량으로 조선 중종 때 인물이다. 선무랑을 지낸 아
버지 정차근이 기묘사화를 피해 대전동에서 노항으로 옮겨올 때 겨
우 다섯 살이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원근에서 이름대신 정효자로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운 일이 없었고 먹고 자
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아버지 머리맡에서 병간호를 했으나 애석하
게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묘터를 잡아 장례를 치르는데 한 백발
노승이 지나가면서“정 효자 댁의 묘소를 어찌 이곳에 쓰는지 이상
한 일이로다”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지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상주 정 효자는 일을 중지시키고 부리나케 그 노승
을 뒤쫓았다. 십리쯤 가서 고개를 넘으니 뜻밖에도 그 노승이 기다
리고 섰다가“상주가 올 줄 알았다”하면서 정 효자를 이끌고 기룡산
하절 _
(騎龍山) 기슭에 와서는 지팡이로 혈을 짚으며“이 혈은 기룡의 좌장
혈(左掌穴)이요, 부귀를 겸하여 가운이 융성할 것이며 힘차게 내리
쏟는 기룡의 정기를 받았으니 위인이 날 징조라. 청룡, 백호가 세 겹
으로 둘려졌으니 귀인이 날 터이며 물 흐름이 보이지 않으니 부자도
날 것이요, 이와 같이 크고 귀한 판국에는 손세도 좋아 이 세상에 바
로 정 효자요”라고 했다.
정윤량은 이 노승을 집으로 모셔다가 후히 대접할 생각으로 소매
를 끌었으나 노승은 사양하며“소승은 신령의 명을 받고 온 설학(雪
學)이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고 오늘은
길이 바빠서 이만 가겠소.”하고는 기어이 떠났다.
뒤따르던 정 효자가 언덕 위에 오르니 노승은 이미 온데 간 데 없
었다. 정 효자는 여묘살이 삼년을 마치고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뒤에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향풍(鄕風)도 예법에 맞춰
다시 고친 명성이 높은 학자가 되었으며 임고서원 건립에도 많은 공
을 끼쳤다.
‘할 말 없는 무덤이 없다’지만 하절에서는 많은 무덤 중에서도 두
개의 무덤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더욱더 주목을 받고 있다. 의병장
호수 정세아 무덤 앞에 있는 장남인 백암 정의번과 종 억수의 무덤
이다.
정의번은 임진왜란 때 영천성을 수복한 후 경주성 탈환을 위해 호
수공을 따라 출전했다가 호수공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자
세 차례나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적의 포위망을 뚫었고 아버지는
위험을 벗어났다.
_
아버지의 무사함
을 알지 못한 백암
은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면서 종 억수
에게“나는 아버지
를 따라 죽음이 당
연하지만 너는 죽을
까닭이 없지 않느
냐? 내 곁을 떠나거
라.”고 말했으나 억수는 말고삐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군신과 부자
와 노주는 일체라. 주인이 아버지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셨는데 종
이 어찌 혼자 살겠습니까?”라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함께 적진에
쳐들어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호수공이 사후에 정의번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해 와서 빈소를 지어 통곡하고 당시에 서로 마음을 통하던
지우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해서 관에 넣고 시체 대신 장사를 지내
니 시총(詩塚)의 유래가 되었다.
정의번 묘소 앞의‘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라고 적힌 억수의
무덤은 주인의 무덤에 비해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정씨 집안에서 4
백여 년간 묘사 때마다 그의 충복됨을 잊지 않고 제수를 차려 그의
넋을 달래주고 있다.
인근에 있는 강호정, 오회공종택, 오회당, 하천재, 사의당, 삼휴정
등 문화재들을 둘러보고 삼휴 정호신이 쓴 한시‘삼휴(三休)’를 읊으
며 풍류를 즐기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하절 _
12. 영천 양택의 으뜸 매곡마을 정재영 가옥
원형 거의 보존한 18세기 민가, 조선 중엽 사회연구 귀중한 자료
양택은 풍수지리설에서 무덤을 음택(陰궀)이라고 부르는 데서 상
대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이승을 양(陽), 저승을 음(陰)으로 상징한
다.‘ 양택을본다’는말은집터의위치와건물의방향, 배치등을전
래의 풍수지리이론에 의하여 따져본다는 말이다.
문왕팔괘(文王八卦:후천팔괘라고도 함)를 사용하여 좌향(坐向, 방
향)을 정하는데 좌는 앉은 위치를, 향은 앞쪽 방향을 뜻한다. 예를
들어 집의 방향이 동남향이라면 그냥 손(巽:동남)향이라고 하지 않
고 반드시 건좌손향(乾坐巽向)이라고 표기한다.
건(乾)은 서북 방향이니 집 앞쪽 방향인 손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곧 집의 뒤쪽 방향이 된다. 집의 구성은 문(門:대문), 주(主:안방), 조
(부엌)를 삼요(三要)라 칭하여 이를 중시한다. 명궁(命宮)은 좌향을
정할 때 대주(주인)의 생기(생년)와 맞아야 한다.
_
집의 높이와 밝기가 알맞아야 한다. 너무 높으면 손양(損陽)이 되
어 혼을 상하고 너무 낮으면 음기가 왕성해서 백(魄)을 상한다는 이
론이다. 건물의 배치는‘日’자형‘月’자형‘口’자형‘吉’자형이 좋고
‘工’자형‘尸’자형은 흉하며 칸수는 홀수가 좋다.
안방은 남향이 가장 좋고 그 다음이 동향, 북향이며 서향이 가장
흉하다. 부엌문과 대문은 마주보지 않게, 대문으로 들어오는 길은
돌아서 들어오게 만든다.
영천의 3대길지중 양택의 으뜸으로 꼽히는 매곡마을을 찾아보았
다. 임고면 평천리에서 북동쪽으로 5㎞쯤 가다가 좌회전한 후 10여
리 길을 따라 들어가면 유교정신이 물씬 풍기며 평화로움이 감도는
고즈넉한 반촌인 삼매리 매곡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어느 곳에서든지 새소리와 맑은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옛날 선비들이 학문을 가르치고 수양하기 위해 살고자 했던 바로 그
매곡마을 _
마을인 듯했다.
매산고택을 중심으로 서쪽에 산수정, 남쪽에 산천정, 북쪽에는 향
양정이 자리 잡아 당시의 심오한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게 했으며
매곡을 둘러싸고 자는 산은 그것이 마치 꽃술을 감추고 있는 꽃잎들
처럼 겹겹이 둘러있어서 흡사 별천지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30여 호의 집들은 계곡을 따라 나란히 서있고 보현산의 정맥에 기
룡산의 주령이 매화가지처럼 뻗어 내려와서 매화의 꽃술에 해당하
는 자리에 고색이 창연한 고가가 서남향으로 앉아있다. 뒷산의 주령
이 가지처럼 완만하게 뻗어있는데 앞산은 가파른 절벽에 가깝고 세
모꼴을 이루며 나비의 모습이고 마치 나비가 매화꽃을 향해 날아드
는 형국이라고 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4호로 지정된 매산고택(영천 정재영씨 가옥)은
조선 영조 때 형조참의를 지낸 매산 정중기(1685~1757)가 자기가 살
고 있던 선원동에 천연두가 만연되어 이를 피해 산골로 찾아 들어와
서 집을 짓기 시작해 그의 둘째아들 일찬이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전체의 특징은 사당채가 모든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데 위치
해 있고, 안채 대청과 사랑채 대청의 앞쪽기둥은 원주이며 나머지는
모두 방주이다. 경사진 자연그대로의 지반을 이용해 지형을 다듬지
않고 무리 없이 건축물을 세웠다. 3대가 살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되
었으며 3대의 주부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독자성을 살려서
마루방, 고방, 부엌 등이 큰방, 아랫방, 머릿방에 각각 독립된 채 부
속되어 있다.
현재는 본채와 대문간채, 사당만 남아 아쉬움을 주고 있다. 사랑채
_
의 작은 사랑방에는 골방이 하나 붙어 있는데 이 골방의 기능이 또
한 독특하다. 보통 때는 허드레 물건을 넣어두지만 집안에 초상이
나면 한 달 내지 석 달 동안 시신을 안치하는 가정 영안실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골방의 벽과 바닥을 보통 집 재료와는 달리 황
토와 보리껍데기를 써서 지었으며, 천연재료인 보리껍데기는 방안
공기를 서늘하게 하고 해당 부위의 온기를 빼앗기 때문에 장기간의
시신 보관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집에는 우물이 없어 200m 정도 떨어진 데서 길어다 먹었다고
하는데 이 일을 전담한 사람을‘물담사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매산
고택은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원형을 거의 보존한 18세기 민가로 그
가치가 높다. 조선중엽의 건축물, 예절, 풍습, 산업구조, 교통수단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 후기 학자인 정중기(숙종 11~영조 33)의 자는 도옹(道翁), 호
는 매산(梅山).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훈수 정만양과 지수 정규양
의 문인으로 1727년(영조 3)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급제, 31년 승정
원주서를 지냈다. 이어 결성현감(結城縣監)이 되어 관리의 도를 바
로잡고‘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의거해 향속(鄕俗)의 순화에 힘썼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이인좌(굃굞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영남인사를 소외한 데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연명상
소를 올렸다. 경사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와 예제(禮制)에 밝았다.
저서에‘매산집’,‘ 가례집요’,‘ 주서절요집해’등이있다.
매곡마을 _
13. 시원한 바람 마중하는 가상리 성지
백학서원 터 주춧돌ㆍ기와조각 남아
“백학서원은 … 1555년(명종 10)에 세웠으며 … 백학산 아래이자
양강소 위에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불타버리고 … 1612년
(광해군 4)에 다시 세우다 …”라는 내용이 화산지에 나온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이곳에는 백학서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과 묵은 기와조각들이 남아있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그 옛날 화주(花洲)고을을 지키는 군
인들의 집결지였다고 하는데 뒤에는 산이 도사리고 있고 앞에는 험
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으며 시야가 넓고 산중턱의 평탄한 곳은 지형
적으로 약간 낮아서 요새지로 매우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시안미술관 조금 못 미쳐‘안동권씨 신녕입
향조 구의헌공 묘소’라고 적힌 안내표지석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했
_
다. 농로를 따라 모산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도로사정이 생각보다 험
했다. 몇 번인가 자동차의 밑바닥이 땅에 부딪쳤다고 느끼며 1㎞정
도 들어가니 모선재(慕先齋)가 나왔다.
1429년(세종 12) 문과에 급제, 사헌부 지평과 광주목사 등을 지낸
입향조 구의헌공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여러 차
례의 중수 끝에 1972년에 개축되었다. 좌측에 2칸과 우측에 한 칸의
방을 두고 가운데 2칸의 대청과 앞쪽에 쪽마루를 단 맞배지붕의 건
물이다.
오학정(烏鶴亭) 액호와 호조참의를 지낸 휘 처정(處貞)의 태암정
(泰庵亭) 액호도 함께 걸려있다.
정자 주위의 울창한 대나무를 보면서 후손들에게“학문을 하더라
가상리 성지 _
도 벼슬에 나아가지 말고 길쌈하며 밭 갈고 부지런히 살라”는 교훈
을 남긴 구의헌공의 청빈함과 절개가 느껴지는 듯했다. 건너편 산기
슭에는 묘소와 유허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여러 자손들의 묘와
묘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모선재에서 가상리 성지와 백학서원 터로 가기 위해서는 인적이
드문 산길을 따라 10여리 정도 들어가야만 당도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산림에 묻혀버린 산길을 더듬으며
양강소 덤 위에 올라서니 무더운 한낮의 더위를 씻어주기라도 하듯
삼창·선천·화동·대천·사천들에서 시원한 바람으로 마중한다.
먼 옛날 성터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못 터도 있고 논과 밭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덤 밑에는 규모는 작지만 연륜을 자랑하
는 백학산 대성사가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상리 성지는 동서의 깎아지른 듯한 경사지를 이용하고 표고(標
高) 100m 정도의 산등성을 따라 쌓은 주위 720m, 높이 1m 정도의
성으로 마한과 대항하기 위해 화동성주가 축성했다고 전한다.
부근에서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고 성을 쌓았던 돌의 흔적이 남아있으
며 토석혼축성으로 성벽의 넓이는 2.5m~3m이고 높이는 1m, 길이는
약 250m 정도 남아있다. 성지 내에 직경 3m, 높이 1m 정도 남아있는
흔적이 봉수대 자리라고 전하나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_
절벽 아래는 양강소라 불리며 예부터 단오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한바탕잔치를 벌이며 즐거움을 나눴고 근처의 마을사람들
이 두 편으로 나눠 줄다리기를 하며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인재 못나오게 괟飛登天穴(용비등천혈) 잘라라”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조선을 구원하러 와 보니 조선 조정에는 인
재들이 매우 많았다. 이여송은 그 까닭이 조선 산수가 수려하기 때
문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고 전한다. 남
진했던 이여송은 삼남대로를 통해 다시 북상하며 명으로 돌아갈 때
우리나라의 산세를 보면서 좌·우 풍수를 보아 큰 인물이 날 만한 자
리라며 수많은 명산의 혈맥을 잘라버리는 행위를 했다.
시안미술관이 들어서면서 영천시민은 물론 외지인들도 많이 찾아
가상리 성지 _
오는 화산면
가상리 주민들
은 역사 이래
숱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금
까지 단 한번
도 외침을 당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대단
하다.
화산산맥의 일지맥이 동남쪽으로 뻗고 또한 일지맥이 동일방향으
로 뻗어 각 마을 앞뒤 산맥을 이루는 그 사이에 들을 형성하고 구일
안못에서 발한 냇물이 남으로 흘러 들의 중앙부를 통해 신녕천을 이
루는 일지류를 형성하는 가상리. 가상리 성지와 백학서원 터가 남아
있는 마을 뒤 白鶴山(백학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이 마을은 원래 신녕면 대량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楸谷(추곡), 茅山(모산)을 병합, 가상리라 해 영천군 화산면
에 편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시 권운, 권응수, 권응심 등 일가
제종반 20인이 창의 기병했으며 시안미술관 뜰에는 신녕창의지 기
념비가 세워져 있다.
모산 마을에서 화남방면으로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가상교가 보인
다. 다리를 건넌 후 농로를 따라 300~400 미터 정도 들어가면 스무
곡이다.
_
지난해 한번 찾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지나친 뒤 동네어
르신에게 물어물어 겨우 길을 찾았고 이곳에서 다시 우거진 나무와
풀들을 헤치며 별로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40여분 간 산을 여러 차
례 오르내린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3미터 정도의 산혈이 잘려
길로 사용되고 있었고 앞쪽에는 유래를 기록해 놓은 표석비가 세워
져 있었다.
산 정상에서는 많은 위인을 배출한 걸출한 명당이었던 것이 오히
려 화가 되어 혈맥을 잘린 스무골을 내려다보며 산새들을 벗 삼아
잠시 동안이나마 도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곳에 전하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가상리 성지 _
5백여 년 풍상 지킨 느티나무
‘풍영정’
한편,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땀을
식히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위안
을 삼는 가상리 추곡마을 중앙에
‘풍영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느티나
무가 5백여 년의 풍상을 묵묵히 지
켜오고 있다. 나무가 심어질 당시를 생각하며 잠시 쉬고 있으려니
한할머니가노구를이끌고나무밑의자로힘든걸음을했다.“ 할머
니, 혼자 오셨어요?”라고 물으니“60여 년 간 거의 매일 찾아왔다”
며 이곳은 이 마을 안동권씨 문중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백여 년이 넘은 것으로, 안동권씨 신녕입
향조인 九宜軒(구의헌) 권열(1424-1507)이 조선 연산군 2년(1496)
광주목사 재임 시 연산의 난정을 직간하고, 안동으로부터 楸谷里(추
곡리)로 은거해 살면서 심었으리라 추정되는 것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 나무아래에서 공자의 유풍에 힘입어 시와 학문을 강론하고
예절과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후손들은 임진왜란을 당해 同堂(동당)의 형제숙질들이 이곳에서
창의, 이름이 靑史(청사)에 올랐으나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
았음은 모두 이 나무를 보호하는 뜻에서 예의와 사양(辭讓)하는 가
_
풍을 얻었기 때문이었다고. 창
의는 예의에서 발휘되고 무공
은 활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기
에, 훗날의 자손들로 하여금
모두 여기에서 節文(절문)하
며, 여기에서 덕행을 보게 된
다면 곧, 九宜軒公(구의헌공)
이 후손들에게 내려준 두터운
그늘이 이 나무와 더불어 모두
크다 할 것이다.
후일 공의 현손(玄孫) 풍영정
(風詠亭) 권응도(權應道, 1616-
1674)가 이 나무의 이름을 풍영정이라 하고 자신의 아호 또한 이것으
로 하여, 나무주위에 培根築石(배근축석)하여, 때때로 冠童(관동)들과
시 읊고 習禮(습례)하였다고 안내판에 기술(1669)되어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도를 넘고 있는 듯하다. 고구려와 부
여, 발해 역사를 포함해 한강유역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삼으려는 술
책을 부리고 있다. 일본의 망발에 대해서는 쉽게 흥분하는 한국인들
이 중국의 만행에 대해서는 너무 초연한 것 같아 많은 걱정이 된다.
역사를 제대로 보고 우리 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절
실히 요구되는 시점인 것 같다.
가상리 성지 _
14. 우목산 아래 귀애정 개방적 아름다움 극치
- 화남 귀호
공조참의 조극승 향리지학에 뜻… 후학 양성
화남면 귀호리는 원래는 신녕군 대량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
정구역 폐합에 따라 귀계(갋溪)와 호암(湖岩)을 병합, 귀호리라 하여
영천군 화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화남면에 편입되었다.
화산산맥의 일지맥이 동남으로 뻗어 앞뒤 산을 이루었으며 마을의
중심을 흐르는 계곡은 귀일안못에서 발하여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멀리 북쪽에는 각 산정이 뾰족뾰족하여 이 지형의 특성을 이룬다.
마을 입구의 밭에 있던 큰 돌이 거북이처럼 생겨 귀일(갋逸)이라고
하며 바위를 귀암(갋岩)이라고 한다. 아래에 오천천(五泉川)이 흐르
며 원래 단양우씨가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그 후 창녕조씨가 세거하
였다고 한다.
우목골(牛牧谷, 禹墨谷)에는 조선시대 학자이며 공조참의를 지낸
귀애(갋厓) 조극승(曺克承, 1803~1877)을 추모하기 위해 정자와 사
_
당을 세웠는데 200여년 전 건립된 생가 바로 옆에 두었다. 원래 이
자리는 귀애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조그마한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마루방 상부에 있던 유조집서년(柔兆執徐年) 청명절에 쓴 김여락
의 귀애정 기문과 손자 세환(1861~1942)의 기문으로 볼 때 1915년
이나 1916년에 창건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1978년 기둥과 마루부분
에 대한 중수가 있었다.
사당은 귀애정과 같은 연도에 창건되었으며 이때의 규모는 2칸이
었다. 그 후 귀애선생이 불천위로 모셔지면서 1978년 현재의 3칸으
로 증축되었다. 단기 4311년 무오 2월 15일의 중수 상량문이 사당
종도리 장혀 하단에 있다.
귀애정(문화재자료 제339호)은 귀애고택의 향 좌측 옆 야트막한
야산인 우목산(牛牧山) 아래 동북쪽으로 건립되어 멀리 안산인 보현
화남 귀호 _
산과 귀애선생이 10경(景) 중에 하나라고 노래한 화악산(花嶽山)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육각정자를 섬 내에 두었는데 이 건물은 20여년 전에 도괴되
었으며 육각정자는 나무다리를 만들어 통행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귀애정 앞에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길이 1m, 높이 50~60㎝ 정
도의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도난당하고 나중에 누마루
근처의 마당에 120㎝ 정도인 거북형상의 돌확을 만들어 연꽃을 심
었다.
연못은 3면이 담장 없이 터져있는데, 일반적인 영남의 별서정원
수법은 주위에 담장을 둘러 폐쇄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나 여기는 오
히려 개방적으로 처리하여 호남 원림구성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귀애정은 장대석의 기단 위에 두 칸 온돌방, 한 칸 마루방, 한 칸
온돌방을 기본구성으로 한 뒤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두어 툇마루와
계자각 난간을 시설하고 배면은 반 칸을 안으로 들여 벽장과 툇마루
를 가설했다. 또한 한 칸 온돌방 앞에는 누마루를 돌출시키고 계자
각 난간을 돌려 정자의 운치를 한껏 높였다.
누마루는 수월루(水月걹)라 칭했고, 방 앞의 툇마루는 몽희헌(夢喜
軒)이라 했다. 수월루는 외부 3칸, 모두에 4짝 들문을 두었으나 지금
은 모두 없앴다.
외부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고 내부는 각주를 세웠는데 특이
하게도 배면 툇마루 상부에는 전면과 같이 창방을 돌리고 화반을 두
_
었다. 이는 벽장을 몸체에서 달아내어 평면을 확장하는 일반적인 수
법과는 달리 벽장을 외진(外陣)기둥 안으로 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2칸 온돌방 벽장 측면에는 밖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외여닫
이 세살문을 두었는데 조선 말기부터 이루어진 건축의 실용성이라
는 측면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우물마루를 깐 크기의 마루방은 전면에는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달
고 배면에는 판벽에다 쌍여닫이 울거미 널문을 달았다. 대청의 좌우
온돌방 사이에는 팔각형의 불발기가 있는 사분합 들어열개문으로
경계를 했다.
온돌방의 정면과 측면은 머름중방위에 모두 양개 여닫이 세살문을
두고 안으로 미닫이문을 달았다. 벽체는 모두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
감되어 매우 어색하다. 기둥 위에는 초익공 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보머리와 살미가 직절된 1900년대의 경향을 나타내지만 첨차와 보
아지 및 화반의 가장자리는 연꽃으로 초각하여 19세기의 장식적인
면을 간직하고 있다.
기구 외 구성은 5량으로 처리하여 둥근 대량 위에 동자주대공을 세
우고 그 위에 종량을 놓은 후 사다리꼴 판대공을 두었는데 외부의 장
식에 비해서는 매우 소박하게 처리했다. 누마루는 3량으로 가구했다.
건물의 현재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여 소유자와 그 친척들의 건
물에 대한 애착심이 매우 높았다. 사당은 귀애정의 향 우측에 따로
담장을 둘러 공간을 형성했다. 시멘트로 마감한 높은 기단 위에 막
돌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내부는 시멘트로 마감한 바닥에 교
화남 귀호 _
의(交椅) 대신에 2자정도 높이로 마루를 들여 그 위에 5분의 위패를
모셨다.
정면 3칸 모두에 굽널이 있는 양개 세살문을 달고 기둥 위에는 첨
자를 생략한 초익공으로 꾸몄다. 살미 위에는 만개한 연꽃을 올리고
보머리에는 봉두를 조각해 놓았으나 배면은 살미를 직절하여 전혀
장식 없이 처리했다. 가구는 3량으로 간략하게 처리하고 지붕 측면
은 방풍판을 달았다.
조극승이 환벽정을 노래한 한시로 그의 자는 경휴(景休), 호는 귀
애(갋厓), 관향은 창녕으로 현고서당을 창설한 북계 용석(괟錫)의 현
손이며 순조 3년(1803) 귀호리에서 경섭(暻燮)의 아들 4형제 중 맏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돈후하고 외모가 준엄하여 7, 8세에 이미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조금 자람에 향리지학(向裏之學)을
마음에 두고 늘 옛 성현의 궁행실천의 말을 뽑아내어 일상의 바탕으
_
로 삼았고, 일방
의 많은 선비들
을 창도했다.
남북학사(南겗
學社)에서 강론
하여 작흥한 교
화가 많으며, 대
학강록(大學講
걧) 한 권이 있
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문하에 나아가 심학(心學)의 요지를 얻어들었다.
순조 신묘(1831)에 등제하여 양천현을 지냈고, 고종 을해(1875)에
통정에 올라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며 두
번 상소를 올려 군덕(君德)에 힘쓰게 했다. 긍암(肯庵) 이돈우(굃敦
禹)가 가장을 지었고 보국(輔國) 김영수(갏永壽)가 묘갈을 지었다. 문
집 세권이 전하고 있다.
정자 앞 귀애고택에 살고 있는 7대손 조운준(84)씨는 경상북도에
귀애정을 새로 건립할 수 있도록 요청해둔 상태라고 했다.
화남 귀호 _
15. 옥간정·모고헌서 후학양성에 정성 쏟아
정만양ㆍ규양 형제‘충ㆍ효ㆍ공ㆍ검’정신 지금도 이어져
18세기 개혁성향이 강했던 훈수 정만양·지수 정규양 형제는 시경
에 나오는‘맏형은 흙으로 만든 나팔을 불고, 동생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분다’에서 나온 훈지로 호를 지어 형제간의 우애를 나타냈고
많은 저술도‘훈지록’이라 했다.
또 자손의 이름도‘훈지’두 글자의 변과 머리를 따서 짓도록 유명
(遺命)하여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이것을 봐도 양수선생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훈수선생은 1664년(현종 5) 안동 임하 천전리
외가에서, 지수선생은 1667년(현종 8) 대전동에서 태어났다.
양수선생은 어릴적부터 남다른 데가 많았고, 남을 조롱하는 일이
_
라고는 없었다. 1701년 정규양이 먼저 시냇물이 가로질러 흘러 빗거
랑으로도 불린 횡계로 이사하고 5년 뒤에 정만양이 뒤따라 옮겨옴으
로써 학문연구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완귀정과 함께 근경이 아름다운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히는 옥간정
(유형문화재 제270호)은 양수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숙종
42년(1716)에 세운 정자로 영의정 조현명, 형조참의 정중기, 승지 정
간 등 많은 명현과 석학들을 배출했다.
그 후 나라에서 수차 관직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일생동안 학문
에만 전념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4칸반의‘ㄱ’자형 누각건
물로 창호구성 방법 등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특히, 여름철이면 정자 밑을 흐르는 계곡물에서 피서를 즐기기 위
해 가족단위로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옥간정에서 자천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모고헌(유형문화재 제271
호)은 정규양이 25세 때 집을 짓고 태고와라 이름한 곳으로 태고와
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져 있다.
“집을 태고로 일컫는 것은 무엇인가. 질박하고 누추한 것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지금 세상의 사람이지만
마음은 태고이다.”
이 건물은 사방으로 탁 트인 일반 정자와는 달리 가운데 작은 방이
있고 둘레로 작은 마루가 빙 둘러 놓여져 있으며 옆과 뒤쪽은 막혀 있
다. 트여있는 앞쪽에 앉아서 내려다보이는 풍경과 굽이쳐 흐르는 물
옥간정·모고헌 _
소리는 무릉
도원 같은 착
각을 불러일
으키게 한다.
횡 계 서 당
은 원 래 는
서원이었으
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
으로 서당으
로 남게 되
었으며 안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당시 정각사의 스님이 주신 2그루
중의 하나이며, 한 그루는 대전동의 호수종택 앞에 심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흔히‘자단치경(紫檀稚莖)’으로 표현되는데 자단이란 보라색을 띤
박달나무이니 향나무의 나뭇결을 뜻하는 듯하며 치경의 치는 어리
다는 뜻이요 경은 줄기이니 즉 무늬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
는 나무이니 비록 어리지만 소중히 잘 길러야겠다는 정신이 잘 표현
된 말이다.
이 나무에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어린 제자들을 하나 하나 어린 벼
이삭 가꾸듯 정성껏 가르치고 길러서 아름다운 무늬가 생기고 향기로
운 냄새를 풍기도록 소중히 다루었다는 거룩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_
영천조양각 __
거조암
맹자골 미륵불
도남
북안 도천
대전
16.은인들이 즐겨 찾던 살기 좋은 마을
- 청통 신원
영천유일 국보 거조암 영산전, 몇 안남은 백제계 고려 건축물
영천 유일의 국보가 자리잡고 있는 신원마을은 팔공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일지맥이 갑자기 낮아져 두 갈래로 갈라져서 작은 연봉을 이루
고 있다.
내신리와 외신리에서 발한 시냇물이 서로 합류되어 계곡을 굽이쳐
흐르고 있고 주위에는 기암절벽이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어 옛부터
은인들이 즐겨 찾던 경치 좋고 물 맑은 곳이며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안신원은 내신원이라고도 하여 약400여년전에 장경일이라는 선
비가 개척하였다 하며 골짜기 밖에 있는 바깥신원(외신원)에는 국보
제14호인 거조암 영산전이 있다.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고 거조라
고 붙여졌다는 거조암은 당초 거조사라 하여 은해사 창건보다 앞서
_
는데 신라 효성왕 2년(738) 원참조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
(742~764)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지눌이 송광사에서 수선사를 세워 정혜결사를
이룩하기 이전에 각 종파의 고승들을 맞아 몇 해 동안 정혜를 익혔
던 사찰이기도 하다.
영산전은 수덕사 대웅전의 뒤를 잇는 백제계 고려건축인데 그동안
고려 말의 건축이라는 의견과 조선 초의 건물이라는 견해들이 오갔
으나 해체·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홍무 8년(1375)에 건립된
고려시대 건축물로 판가름이 나서 몇 안남은 고려건축물에 추가되
었다.
영산전 안에는 청화화상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빌어 앞산의 암석을
채취하여 조성했다는 석가여래삼존불과 오백나한상, 상언이 그린
거조암 _
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법계도를 따라 봉안된 나한상은 그 하나하
나의 모습이 특이하고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영산전은 지금은 법당으로 쓰이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는지는 의심
이 가며, 안에 나한상들을 안치한 불단이 임시로 마련된 듯한 느낌
이 강하고 법당임에도 불구하고 안팎에 아예 단청을 하지 않은 점,
정면이 측면의 세배가 되는 긴 장방형의 평면, 벽면에 설치된 살창
등은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고와 많이 닮았다고 한다.
게다가 영산전 불단 아래 목판이 많이 쌓여있었다는 인근 주민들
의 말로 미뤄 아마도 경판을 보관하는 판고로 지어진 건물이 어느
때부터 법당으로 사용되어온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되고 있다.
거조암 영산전은 여러 가지 미를 갖춘 건물로 군더더기가 없는 간
결을 극한 구성과 짜임새는 필요미의 극치이며, 나뭇결의 자연스러움
_
이 그대로 살아나고 흙벽의 질감이 부드럽고 따스하게 전해오는 백골
단청은 그 어떤 화려하고 정치한 단청보다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후불탱화인 영산탱은 그 색조나 화품이 이채로운 불화로 많은 불
화들, 특히 조선시대 불화들은 청·황·적·백·흑의 다섯 가지 원
색을 주조로 그려지고 그 가운데서도 녹색·청색·적색이 화면을
지배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런 유의 불화에 익숙한 눈에는 영산탱이
돌연변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붉은 바탕에 호분으로 선묘만 하였을 뿐 청록색·흑백색
등은 극히 적은 부분에만 사용하고 있으며 바탕색의 농담변화로
모든 색을 대신하고 있으므로 붉은 색이 화폭에 가득하나 이 붉은 색은
들뜨거나 튀지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으며, 상식을 넘어선 붉은 색을 거
의 단색으로 구사하면서 깊은 맛과 전아한 기품을 창조하고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4명의 보살, 4명의 불제자, 2명의 천왕만으
로 영산회상의 장면을 간략히 압축한 구성이 참신하고, 여타 불화의
거의 변화 없는 필선과는 대조적으로 변화무쌍한 호분의 하얀 선묘
가 그려내는 화품도 불화로서는 파격적이다.
거조암의 대명사가 된 오백나한상은 영산전을 짓던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으리라 추측하고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영파스님이 오백나한
하나하나의 이름을 적은 사실이 있다하니 적어도 19세기 이전에 이
미 나한상들이 조성되었음은 분명하고 정확히는 526구이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뒤 호분을 입히고 얼굴과 머리에 칠을 한 나한
상들의 자세와 표정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무릎에 올린 양손으
로 점잖게 염주를 돌리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거조암 _
하며, 혹은 고요히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어떤 것은 크게 웃는가 하
면 어떤 것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과 우비고뇌, 어묵동정이 천변만화하여 그대로 인
간세상의 한 축도로 보여 진다. 조각솜씨가 빼어난 것도, 칠을 올린
재주가 남다른 것도 아니지만 거친 듯 무심한 조각과 졸렬한 듯 천
진한 채색이 빚어내는 푸짐한 명랑성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
다.
거조암 앞에 있는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04호)은 단탑으로 삼층
석탑을 올린 형식으로 통일신라 말~고려시대초기로 추측되며 높이
3.15m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옥신·옥개가 모두 별석으로 되어있
고 기단부의 면석일부와 지대석은 후대에 보수되었다. 지대석은 2
단괴임을 각출, 면석은 탱주 한 개와 우주 2개씩을 모각했고 갑석은
부연과 괴임 한 단을 각출했다.
옥개는 제1, 제2옥개에서 5단, 제3옥개에서 4단의 받침을 각출했
고, 옥신은 우주만을 모각했다.
오랜만에 찾은 거조암에는 영산루와 국사전이 신축되어 그 위용을
과시했다. 영산루에 오르니 신원지의 물빛이 무척이나 푸르렀고 탁
트인 산과 들을 바라보며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안신원과 바깥신원의 갈림길 중간에 보면 경상북도에서도 희귀한
불호당이라는 작은 집이 있다. 마을의 재액을 없애주고 마을을 수호
하며 서낭신을 모시는 이 불호당은 조선영조 45년(1769)에 창건하
고 1901년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_
음력 정월초순에 제주를 선
정하여 동제를 지내는데 기준
은 깨끗한 사람으로서 해산이
나 상을 당하지 않았고 연령이
많아야 되며 덕망과 사회적 지
위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제주로 선정되면 3일전부터
대문에 금줄을 치고 목욕재계
하며 마음가짐을 정결하게 하
고 매사를 삼가야 된다.
서낭당 주위에도 금줄을 치
고 외부 인사들의 출입을 금한
다. 주위에는 황토를 깔아놓는
데 붉은 흙은 귀신이 무서워하는 색깔이기 때문에 잡귀가 못 오도록
하는 것이다. 제기는 새것으로 마련하고, 시장에 가서 제물을 구입할
때는 깨끗한 상점에서 값을 깎지 않고 산다.
음력 정월 14일 저녁부터 제물을 차려 보름날 밤 1시에서 2시 사이
에 제사를 지내는데 순서는 분향강신, 참신, 헌작 독축으로 한다. 이
렇게 마을의 무사를 기원한 후에 각 세대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태우는 소지를 올리면서 소원이 성취되기를 빈다. 그리고 음복을 하
고 동네의 일을 상의한다. 이 행사는 공동체의 의식과 향토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거조암 _
17. 영천 북안 서당리 맹자골 미륵불
“세계 각국에 내 이름을 내어달라”
대승불교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
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북안면 서당
리 맹자골을 찾았다.
축대를 쌓은 안쪽에 두기의 미륵불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앞으
로 항아리와 화분이, 뒤쪽에는 여러 개의 큰 돌들이 찬바람을 막아
주고 있었다.
옆에는 조립식으로 산신각을 지었고 컨테이너와 조립식으로 지은
관리사가 앞쪽에 있었다. 동네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절로 보임
직한 제법 큰 건물도 보였다.
매일 아침마다 물을 갈며 부처님 공양을 하고 있다는 박근수(80)-
김순희(75) 부부가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은 지난 2002년. 이 동네에
서 자라 19세부터 50여 년 간 부산에서 살고 있던 김씨의 꿈에 미륵
_
불이 여러 번 나타나 쉬는 날 혼자 찾아 들어와서 헤매던 중 축대를
쌓은 부분에서 머리가 없이 쓰러진 할매불을 먼저 발견했다고 한다.
며칠 후에 산 아래 계곡에서 역시 목이 없이 뒹굴고 있던 할배불을
찾아 경주 아화에 있는 석공집에 의뢰해 머리를 새로 붙이고 파손된
부분을 보수했다. 집을 짓고 불상의 방향을 약간 틀어서 앉혔으나
마을 사람들이 미륵불은 허공에 모셔야 된다고 해서 집을 철거했고
대신 왼쪽에 산신각을 지었다. 또 청송산에서 큰 돌들을 사와 단 받
침과 부처 뒤에 세워두었다.
맨 처음 이곳을 찾아올 때처럼 미륵불과 김씨 사이의 대화는 모두
꿈을통해이루어지고있다.“ 왜결혼식안올려주느냐”고해서사월
초파일날 사모관대 사서 혼례식을 했고 도랑물을 2년간 사용하다가
너무 힘들어 부산으로 돌아가려고 하니“지하수 파면 물 나온다.”고
알려줘 식수도 확보했다.
맹자골 미륵불 _
미륵종불로 부르고 있었더니 꿈을 통해 미륵불로 고쳐 부르라고
했고 김씨의 몸이 좋지 않을 때면 미륵불의 색깔이 빨간색으로 보인
다고.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인자한 미소로 앉아있는 미륵불 부부가
꿈속에서 김씨에게 말했다는 소원은“세계 각국에 내 이름을 내어달
라”였다고 한다.
전민욱 경상북도문화관광해설사는“미륵불의 조성연대는 고려초
기가 일반적이다. 조만간 전문가를 초청해 문화재적 가치를 알아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륵불은 범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미륵은 성씨
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阿逸多)이다. 성인 미륵은 자씨(慈氏)로
번역되어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인도의 바라나시국 브라만 집
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했고, 미래에 성불
_
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
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도솔천은 지나친 욕심이나 번뇌망상으로 인한 방황이 없는 세계이
며,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오유지족(吾唯知足)의 무리가 모여 사는
하늘나라를 뜻한다.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56억 7천만년이 되는
때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해 화림원(華林園) 용화수(괟華樹) 아래
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
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 이 보
살은 부처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에서‘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 천불 가운데 제5불에 해당한다.
맹자골 미륵불 _
18. 전통문화와 공업단지 조화 - 도남
청제비 역사연구 중요한 자료, 청지의 안타까운 전설 전해져
도남동은 청제평야의 북단지역에 위치한 부락이다. 동쪽으로는 좁
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봉동과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금호강이 흐
르고 있다.
또 남쪽으로는 광활한 평야가 멀리 채약산 지맥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북안천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 밑으로 흐르고 있는데 바
로 그 암벽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윗각단, 아래각단, 불
당골, 사이각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제비의 유적으로 보아 서기 500년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문헌에도 도동화현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영천I.C
조금 못 미쳐 도남농공단지 쪽으로 우회전해서 팻말을 따라 끝까지
들어간 후 100여미터 정도 걸으면 보물 제 517호로 지정된 청제비를
만날 수 있다.
_
영천 청제비는 신라시대‘청못’이라는 저수지 축조와 관련이 있는
양면비로 화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가 114㎝이고 폭이 94㎝이며 두께는 16㎝이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두 동강으로 파손되어 아래 계곡에 매몰되
면서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 있었는데 그 고적이 전하지 않음
을 안타깝게 여긴 방수열, 최일봉, 임언량 등 3인이 수창하고 박생이
감고하여 숙종 14년(1688)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고 그
뜻을 전하기 위해 같은 해 9월에 건립된 청제중립비가 오른쪽에 세
워져 있다.
1968년 12월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지
게 되었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이 없고 가공된 양면에 각자되
어 있지만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이 실려 있다.
한 면에는 병진년 즉 신라 법흥왕 23년(536)이라는 간지가 적혀
도남 _
있어 청제가 처음 축조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축제기라 할 수
있고, 다른 면에는 정원 14년(원성왕 14, 798)이라는 절대 연대가 적
혀있어 청못의 일부 무너진 저수지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수치기라 할 수 있다.
이 병진축제기는 현재 마모와 훼손이 심하여 거의 반가량의 비문
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로 전문은 10행에 각행 9자 내지 12자로 새
겨진 총 150자이다.
이에 비하여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 해독이 가능한 정원 14년 수치
기에는 수리기간, 동원된 인원수, 청못의 규모 및 년, 사수, 옥순 등의
인물과 소내사라는 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글씨체의
특이성, 특이한 문체 등으로 역사학적, 금석학적, 정치사적, 사회사
적, 언어학적, 영천과 경산의 고호(古號)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제중립비에는 청제비가 여기에 세워진 사연을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_
청제비 조금 위쪽에 있는 청못에는‘용왕이 된 청지’라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한낮의 햇살에 못 속의 물이 반사되고 건너편에는 자
동차들이 바쁘게 다니는 이 못은 원래 동네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 5
대독자이면서도 아들을 얻지 못해 고심하던 가정에 뜻밖에 후손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 아이가 천상의 특별한 점지로 태어난 청지라
는 아이었다.
청지는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범상하여 10살 때에 범을
타고 다니기도 했고 장정 20명과 줄다리기를 해도 매번 이기는 장사
라서 감히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무렵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 청지에게 멀리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채약산의 쉰길바위
를 깨뜨려 버리라고 했다. 만약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쉰길바위
의 사악한 신기에 의하여 뜻도 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청지는 바위에 무슨 신기가 있느냐고 하며 오히려 요망한
도남 _
계집이라고
꾸짖으며 일
축했다.
그 후 청지
가 15살 되던
해 드디어 쉰
길바위가 뿜
어낸 신기를
따라 멀리 당
나라 백정들이 내려와 동네를 허물고 못을 막게 되었다. 이유인즉
당나라 궁성에서 바라본 남쪽의 서기는 분명 천자가 태어난 징조이
므로 미리 근원을 제거하자는 뜻이었다. 못 둑이 완성되던 날 갑자
기 폭우가 쏟아져 눈 깜짝할 사이에 만수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청지는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병세가 악화됨을 안타까워하며 수호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로 했다. 제사가 막 끝나갈 무렵, 선녀가 나타나 너는 천제의 뜻을
저버렸다며 청지를 나무랐다.
그러나 15년 동안 정성을 쏟은 것이 아까워 이 못의 용왕이 되라고
하며 홀연히 떠났고 청지도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못은 청못이라 부르게 되었고 아울러 청지가 15살에 용왕이 되었
다고 해서 못의 둘레가 15리라고 전한다.
어리연 꽃이 아름다운 호계천 기슭에는 민속자료 제 20호로 지정
된 완귀정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중종때 시강원 사서 설서로 왕세
_
자 즉 인종의 스승이었던 완귀 안증이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자신의 이상실현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남명 조식의 현판 시구이다. 완귀정은 사랑채의 당호이고 정면 5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서쪽의 부속건물 식호와는 정면 5
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남 북단 1칸씩 루처럼 꾸며져 있다.
흙담으로 둘러싸인 협문을 통하여 정침에 드나들게 되었고 정침 역
시 방형의 흙담으로 싸여있다.
반듯한 정원을 지나 정면좌우에 보이는 어간과 문비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에 취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매우 넓직한 느낌을 주는 대청
이 나타나고 대청에 올라서면 맑은 호계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완귀정의 당호는 당대 명필인 미수 허목의 글씨이고 대청에는 교
분이 두터웠던 남명 조식의 시를 비롯한 많은 명현달사의 시가 남아
있어 이곳이 바로 학문을 이루는 곳이며 나아가서는 많은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유서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침을 솟을대문으로 하지 않은 것에서도 벼슬을 했으나 선
비의 소박함을 간직한 안증의 뜻을 엿볼 수 있다.
도남 _
19.‘ 조홍시가’읊으며성경충효(誠敬忠孝) 본받아
- 북안 도천
인간 삶 가치추구 노계문학, 국문학사에 큰 획
부산ㆍ포항 등 곳곳에 시가비 가사문학관 절실
노계 박인로가 41세(선조 34, 1601)에 지은 시조인‘조홍시가(早紅
枾歌)’로 한음 이덕형을 찾았을 때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은 붉은 감
을 보고 이미 돌아가고 안 계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6세 된 육적이 스승인 애술을 찾았을 때, 대접으
로 귤 몇 알을 내놓았다. 선생이 잠시 없는 틈을 타서 어머님을 봉양
하고픈 생각이 불현듯 들어 귤을 품에 품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 앞에 하직인사를 하려하자 그 귤이 쏟아져 나왔다.
_
스승 애술이 왜 안 먹고 품에 품었냐고 물으니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
해 그렇게 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내용으로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엿
볼 수 있다.
도천마을로 들어서다 고속도로 건너편에 바라다 보이는 노계시비
에 이 조홍시가가 새겨져 있다. 도계서원이 있는 도천리는 구룡산에
서 발한 시냇물이 여러 곳에서 흐르는 냇물과 합류하여 마을 앞을
흐르고 있다.
마을 북쪽은 방산이 있어 주위는 모두 구릉야산으로 되어있고 서
쪽은 고지, 서당, 옥천리를 건너 멀리 금오산이 높이 솟아있다. 동쪽
은 구릉지를 넘어서 경주시 서면과 접해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서원 건너편 노계선생의 묘소에서 연못너머의 도계서원을 보고 있
노라니 몇해 전 모 향우회의 행사 도중 열린 내 고향 많이 알기게임
북안 도천 _
에서‘노계선생은 이순신 장군의 사위다’가 정담으로 발표되었던 해
프닝과 도계서원을 노계서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던 일이
생각났다.
지난1955년이은상씨가발표한논문<노계연구의정오> -‘ 노계
는 충무공의 사위가 아니다’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노계는 이순신 장
군의 사위가 아니고 도계서원은 그 지방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지었
던 다른 여느 서원과 같이 마을이름인 도천의 계곡이라 하여 도계서
원이 된 것이다.
도계서원은 박인로의 지극한 효성과 가사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
으로 인해 연중 외부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서원 건너편 산기슭에 묘소가 있고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8호인
노계집판목이 보관되어 있어 학생들의 충효교실이나 문화유산 답사
코스, 국문학을 배우는 대학생들의 문학기행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
는 곳으로 가사문학관 건립이나 영천이 자랑할 만한 관광코스로의
개발움직임이 일고 있다.
본관이 밀양인 박인로(1561-1642)의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
(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
눌 수 있는데, 전반이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
러진다면 후반에는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했던 선비, 문인가객으로
서의 면모가 지배적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13
세에 대승음(戴勝吟)이라는 한시 칠언절구를 지었다.
무릇 조선의 가사문학은 송강 정철에서 우뚝하였고 노계 박인로에
서 꽃피워 고산 윤선도가 시조로 열매 맺었다고 하지만 노계의 시는
_
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송강의 시가 정치성을 띠고 도교적 성향을 지녔다면 고산의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사대부 취향의 일면을 볼 수 있는데 반해 노계의
시는 인간의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삶의 구도자로서 생활인의 정
서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송강이 우의정, 고산이 동부승지의 높은 벼슬살이를 한데 반해 노
계는 가난한 산림처사로 일생을 살았다. 3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
문관·선전관·만호에 오르긴 했으나 그것은 벼슬이 목적이 아니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에 참전,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고자 하
는 일념에서였다.
40세 이후 은거하면서 본격적으로 문인활동을 했는데, 그의 대표
적인 작품으로는 조홍시가, 선상탄, 사제곡, 누항사, 영남가, 노계
가, 입암별곡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노계집’에 실린 것 외에도 많
북안 도천 _
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고 남아있지 않다. 그는 시조를 즐겨 지
었고 완전히 그것을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문학 쪽
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노계집’은 3권 2책인데 1, 2권은 한시문이고 3권은 국문의 가사
와 시조로 되어 있다. 우리 고전문학의 가사문학 7편과 시조 67수가
수록된 판목은 총 99매이다.
박인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감연히 붓을 던지고 경상좌도수군
절도사 성윤문 막하에 종군하여 태평사를 지어 사졸들을 위로하고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
모상을 당하여 다같이 3년씩 여묘살이를 했다.
그가 지은 오륜가 속의 부자유친가에 그의 효심이 잘 나타나 있다.
한음 이덕형과는 동갑나이에 교분이 두터워 벼슬길의 기회도 있었
으나 세속의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성경충효(誠敬忠孝)를 덕목으로
삼아 실천궁행하여 사람을 대함에 공경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
간에 우애하였고 나라에 충성하는 도리를 실천했다.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등 선유의 유적을 찾아 선현들이 걸어간 길
을 답습하며 사상과 덕행을 따르고자 노력했고 거제도조라포 만호
때는 청백리로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가 지금도 남
_
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1642년(인조 21)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자 1701년(숙종 33) 그
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유생들이 도천리에 서원을 세워 도계서
원이라 칭하고 유생을 교육하고 향사를 올리며 그를 추앙하게 되었
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지난 1970년 복원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도계서원 경내(문학박사 모산 심재완)와 부산시 수영구 민락
동 현대아파트 관리사무소 앞(현대산업개발),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 앞(부산교대 윤해희 교수)에 그의 시비가, 도계서
원 옆(전국국어국문학시가건립동호회)에 노계가비, 그리고 부산 민
락동 민락공원 무궁화동산(부산 토향회)에 가사비, 경주시 산내면
(영천향토사연구회)에 노계의 유적지비가 세워져 그의 학덕과 충효
사상을 경모하고 있다.
북안 도천 _
20.‘ 충절사표’이보흠과연관된지명많은대전
‘붉은 핏물’순흥연, 이대전유허비, 호수종택, 양계정사
순흥부사 재직중 단종복위운동… 수양곡, 서산곡 명칭 남아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빨리 시작되려나 보다. 위용을 자랑하던 벚
꽃이 물러나고 복사꽃과 살구꽃이 들판에서 자태를 자랑하며 아름
다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대전동은 야산을 등지고 형성된 마을로 동쪽으로 구룡산이라고 불
리는 야산아래 길다랗게 펼쳐진 부락이다. 서쪽으로는 고현천이 흘
러 강 주변에 비교적 비옥한 평야를 만들고 있고 남쪽으로는 신녕천
이 흘러 쌍계동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녹전동과 접하고 있다.
교통의 발달로 인해 전통적인 모습이 많이 퇴색되었고 동양농기
계, 청석스틸, 엔젤산업, 신라부화장, 버섯마을, 경신사 등 크고 작
은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_
대전마을은 원래 영천이씨
가 주류를 이루던 마을로 대
부분 이보흠과 연관된 지명이
많다.
조선 세조 때 순흥부사로 재
직하던 이보흠이 단종복위 운
동을 펴다가 참형되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호인 대전을
따서 마을의 명칭으로 사용하
였다고 한다. 그의 충절을 기
리는 수양곡, 서산곡, 순흥연
등의 자연부락 명칭이 아직까
지도 남아있다.
수양곡은 수양대군을, 서산곡은 주나라의 백이와 숙제가 침략자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는 충절을 이보흠과 비교해서 생겼으며 순흥연
은 영주군의 순흥을 지칭한 것이다.
서문오거리에서 화산방면으로 가다가 우회전해서 대전마을로 들
어선 후 조금 더 나아가면 일명 하대전동에 이대전 유허비(문화재자
료 제24호)가 자리잡고 있다.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고, 엄자릉은 부춘에 낚시
를 드리웠더라.”이보흠이 야은 길재의 묘소에 제사할 때 그 충절을
흠모하여 지은 제문의 일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보흠은 정의
와 충절이 뭇사람들의 사표가 되었다. 이 비는 이보흠의 생장지에
대전 _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7년(1629)에 세운 유허비이다. 대
전선생으로 잘 알려진 이보흠(1397~1457)은 조선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으로 영천이 본관이다.
세종 11년(1429)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박사를 거쳐 사정이
되고 세종 25년 사헌부감사로 봉직할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
오는 등 국제외교 일선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지대구군사가 되어 대
구에 사창법을 시행했고 문종 때 장령을 지냈다.
세조 3년(1457) 순흥부사로 재임시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
군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평안도 박천에
장류 후 처형당하였으며 정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한편 유허
비가 있는 곳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처형되던 날 연못물이
붉게 핏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상대전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대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호수종택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목조와가 맞배지붕으로
지은 이곳은 광해군 5년(1613)에 호수 정세아의 손자인 해남현감 정
호례가‘工’자형으로 건립한 전통적인 양식의 한국식 건물이다.
우측에는 최근에 지은 듯한 화장실이 있어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
리라는 느낌도 잠시, 마당에는 고장 난 자전거가 방치되어 있고 대청
에는 빈 과일박스가 쌓여있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이 건물 뒤쪽에는 정세아의 위패를 봉안한 환고사가 절정을 자랑하
는 복사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는 듯했고 그 앞쪽에는 정각사
의 스님이 양수선생에게 준 두 그루의 향나무 중 모고헌과 이곳에 심
_
었다고 전해지는 보호수가 3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호수종택을
지키고 있다.
정호례(1604~1672)는 영천 석동에서 내금위장 수번의 둘째아들
로 태어나 증 호조참판 의번의 뒤로 양자를 갔다. 뒤에 해남고을에
살았으며 병자호란 때는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을 지
켰다. 평생에 왜구의 물건을 쓰지 않았으며 해남고을에는 공의 선정
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을의 맨 위쪽에 위치한 양계정사는 단청, 목공, 와공, 드잡이공
으로 나눠 2003년 11월부터 실시된 보수공사가 이루어졌고 뒤편으
로 우회도로가 완공돼 이 길을 통과하는 차량들에게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대전 _
_
민속자료 제 88호인
이 정사는 인조 23년
(1645) 양계 정호인이
관직에서 일시 향리로
돌아와 경관이 좋은 현
위치에 초가 수칸을 짓
고 후학을 양성하여 주
자서와 근사록을 연구
하던 학당이었다. 현
재 건물은 정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700년대에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 고현천을 부감하는 언덕위에 서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조선후기의‘乙’자형의 특이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양계 정호인은
1618년 진사에 뽑히고 1627년 문과에 올라 부사에 이르렀다. 병자
호란 때 부원수가 되어 향병을 모집하여 종사하여 도왔고 1637년 이
후 165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주·군의 수령이 되었으나 사퇴
하고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행장이 간단했고 다만 서책만 두어짐 있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사환에 뜻이 없어 주자서와 근사록 등의 책을 취하여 잠심
탐구하며 잠시라도 서책을 놓지 않았다. 사후에 대구 청호서원에 배
향했다.
대전마을에는 이들 이름난 유적 외에도 영모정, 오체정과 근년에
지은 듯한 대전서당 등이 남아있으나 마당에는 대부분 잡초가 우거
져 있고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또 떨어진 문짝과 무너진 담벼
락이 방문객의 마음을 안쓰럽게 하기도 했다.
영천조양각 __
화북 정각 별빛마을
신녕 화남
은해사
임고 삼매
자양 용산
_
21. 천문대 연계 밤하늘 별관찰,
전통문화 보존된 화북 정각 별빛마을
고향의 넉넉함과 향수‘물씬’- 절골, 삼층석탑
영천에서 30㎞ 남짓, 아이들의 체험학습을 위해 방문한 화북면 정
각리 별빛마을에서는 어린 시절 자랐던 고향의 넉넉함과 향수를 느
끼기에 충분했다.
신기해하며 번갈아가면서 질문을 하는 아이들에게 대답하며 지금
까지도 정겨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과 동네사람들에게 고
마운 마음이 들었다.
쟁기질하며 밤하늘 달과 별을 헤아리는 생태농촌 정각별빛마을은
농어촌지역의 건강한 자연환경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가 잘 보존
된 21세기 한국농촌의 모범상을 제시하는 마을이다.
정각리는 보현산 남쪽에 자리 잡은 산골마을로 보현산천문대 마을
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각(正覺: 바르게 깨달음)이라는 이름이 말
해주듯이 절골, 삼층석탑 등 불교와 관련한 역사유적이 분포되어 있
는 마을이기도 하다.
58가구 1백여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인심 좋은 마을
로 다랭이 논을 이용하여 저농약으로 쌀을 재배하고 산자락에는 사
과나무를 심어 가을에는 노란 벼와 빨간 사과가 어우러지는 아름다
운 마을이다.
최근에는 주민들이 공동작목반을 통해 미나리 재배를 시작하면서
공동체 마을, 생태마을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마을을 대표할 수
있는 주제는 보현산천문대와 연계한 별빛마을로 정했고 보현산천문
과학관을 개관했으며 별을 브랜드로 한 농산물도 생산하고 있다.
화북 정각 별빛마을 _
이미 생산하고 있는 쌀과 사과의 경
쟁력을 높이기 위해 친환경농업으로 전
환을 유도하고 새로운 작물인 미나리
재배에 힘을 기울여 미나리를 이용한
가공품이나 음식도 개발하고 있다.
정각리를 구성하고 있는 4개의 자연
부락을 마을 주도로와 순환도로로 연결
하고 마을별 쉼터와 센터를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마을내 원활한 동선을 확보하
고 정보교류를 증대시켜 주민복지와 도
농교류의 역할을 할 마을센터는 교육,
문화, 생산, 가공, 판매를 할 수 있는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되
며 평상시에는 마을주민들에게 개방되어 사용되지만 도농교류 행사
시에는 정각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편익을 제공하는 장소로
탈바꿈한다.
정각리의 4개 자연 부락 중 맨윗 마을인 절골 입구에서 3백미터
정도 들어가니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인 중앙에 경상북도지정 유형
문화재 제269호인 정각리 3층석탑이 길손들을 반겨주었다. 이층기
단위에 삼층탑신부를 올린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사방의 가장자리를
연화문으로 새겨 돌렸고 상륜부의 노반이상은 분실되었다.
본래는 이 근처에 사찰이 있었는데, 이 사찰의 스님이 밤에 자양면
보현리 탑전부락에서 칡넝쿨로 매어 옮겼다고 전하며 이 절은 임진
왜란 전후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산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곳곳
에 무속인들이 지성을 드리고 있는 흔적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
고 전국 각지에서 온 산악인들이 묶어놓은 리본이 초행자들의 보현
산 등산길을 안내하고 있다.
_
별빛마을에서는 봄에는 고로쇠수액
시음, 산나물 채취 여름에는 야생화관
찰, 자연생태학습, 가을에는 고구마 캐
기와 밤·도토리 줍기, 겨울에는 칡뿌
리 캐기와 밤 줍기, 도토리 줍기, 보현
산 해맞이행사(1월)를 계절별 프로그램
으로 준비하고 있다.
또한 연중 보현산천문대 별 관찰과 보
현산 패러글라이딩 활강대회를 펼친다.
정각마을 주변 관광코스로는 오리장림
과 옥간정, 보현산천문대, 영천댐, 임고
서원, 정각리삼층석탑 등이 어우러져 있고 마을 내에 토속음식을 요
리하는 식당과 여러 곳의 민박집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발 1,124m의 보현산천문대 산자락의 청정사과와
100% 원액으로 전국에 소문난 고로쇠수액, 저농약 고추로 별빛마을
주 소득원으로 각광받는 고추, 영천시에서 가장 청정하고 물 좋은
보현산의 토양과 별빛을 머금은 정각미나리를 싼값에 사갈 수 있다.
고로쇠수액 생산과 미나리재배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겨울농한기
에도 쉴 날이 없는 별빛마을 주민들.
동네주민들의 노력과 우리 영천시민들의 성원이 따른다면 우리 고
장에서도 경주의 양동마을이나 세심마을과 같은 테마마을에서 자녀
들과 함께 전통체험을 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보
인다.
화북 정각 별빛마을 _
22. 주위 경관 절경, 위인들 유적 많아
- 신녕 화남
권응수 장군 유물전시관… 영정, 장검, 교지, 병풍, 가전보첩
한광사… 9세기 조성 추측 삼층석탑ㆍ석불좌상 보물로 지정
신녕면 화남마을은 팔공산에서 뻗은 일지맥이 북으로 뻗어 구릉야
산을 이루다가 다시 높아져서 화산서 서쪽으로 뻗은 지맥과 합하여
앞뒤 산들이 되고 신녕천의 북부 발원지가 됨과 동시에 하나의 작은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는 깊은 골이다. 주위의 경관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예부터 위인들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갑티(갑현리)는 340여년전 안동권씨들이 구천인 치산서 이거해
왔고 두들(두야리)은 100여년 전에 갑현사람들이 이거해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딸꼴(지곡)은 온천리 부근에서 서쪽으로 4㎞ 떨어진
마을로 임진왜란 때 의성김씨, 무안박씨 등이 피난와서 살던 마을이
고 면천은 400여년전 경주손씨가 개척했다고 하며 냇물이 마을 앞
을 지나가다가 굽이쳐 흐른다.
_
이외에도 300여년전 청주한씨가 개척했고 고려장이 4곳이나 있는
무덤실, 고찰이 있었던 불당골, 의성김씨가 개척하여 안동권씨가
300여년간 세거해온 온내골, 무암아래에 있는 아랫동 등의 자연부
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갑현은 안동권씨 중시조인 권응수 장군의 자손들이 세거해 오면서
‘충·의·열·용’등 무인으로서의 정신을 계승하며 살아가는 마을
이다. 입구에 몇 년 전 도난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장군의 유물관이 있다.
보물 제668호로 지정된 이 유물전시관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
운 충의공 권응수 장군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79년
정부의 호국위인 유적정화사업으로 건립된 것이다.
신녕 화남 _
1900여 평의 대지에 전시관 20평, 사당이 15평이고 지정목록으로
는 선조대왕이 하사한 권응수 장군의 영정 1폭, 태평회맹도병풍 1첩
(4폭), 교지 및 장군간찰 1권(32매), 각대 1개, 선무공신록권 1축, 임
진왜란 당시 영천성을 복성할 때 왜장 법화에게서 노획한 장검 1개,
교지 및 유서 1권(33매), 가전보첩(상, 하) 2책 등이다.
본관이 안동인 권응수 장군은 1549년(명종 1) 화산면 가상리에서
권덕신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 화북면 금호동 중리로 이사해 그곳
에서 자랐다. 39세 때 별시무과에 급제하여 43세에 정략장군, 46세
에 어모장군이 되었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막하에 있다가 1592년(선조 25) 47세 때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수많은 전투에서 왜군을 무찔렀고 특히 경상좌도를 확보하는 동시
에 영남을 보전한 영천복성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경주성
탈환전에 선봉으로 참전하였으며, 문경의 당교와 산양 탑전, 안동의
모은후, 구담, 밀양, 황룡사, 충청도 창암 등에서 왜군의 주력부대와
싸워 대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때는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
수를 도와 1, 2차 울산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으로 화산군에 봉해졌으
며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렀다.
유물전시관에서 마을 안쪽으로 300~400m정도 들어가면 뒷골에
자리잡은 법왕종 종찰인 한광사가 나타난다.
_
한광사의 창건
연대는 알 길이
없으나 삼층석탑
과 석불좌상을 미
루어 볼 때 통일
신라시대로 추측
되며 사찰건물은
1백여년 전에 개
축한 것으로 추측
된다.
한광사 내에 있
던 조선 헌종시대
의 학자인 권치선이 만년에 학문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면천
정사는 허물어졌고 향나무 2그루와 소나무가 그 빈터를 차지하고
있다.
보물 제675호로 지정된 화남동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허물어져 없어진 옛 한광사 불전 앞에 동서로 서
있던 쌍탑 중 하나이다.
탑의 상층기단은 4장의 판석으로 사방의 면석으로 세우고 갑석을
덮은 곳에는 우주 즉 모서리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하층의 폭은
1m90cm, 상층은 1m18cm에 높이가 72cm이다. 탑신은 옥신과 옥
개석을 각각 같은 돌에 다듬은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석탑형식을 따
르고 있는데 옥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소박한 그대로이다.
신녕 화남 _
옥개석은 모두 4단 받침을 갖고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적당하
다. 탑신부 표면에는 이끼가 많이 끼어 있고 약간의 마멸은 있으나
떨어져 나간 부분은 없으며 탑의 맨 윗부분은 반만 있고 그 위에 자
연석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 탑은 아담하고 정연한 전형적인 한국석탑의 양식을 갖추고 있
다. 삼층석탑과 함께 놓여 있는 보물 제676호인 석불좌상은 원래 어
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불상과 관련된 광배 파편과 대좌가
남아 있어 광배, 대좌를 갖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완전히 맞추어
_
보면 신라 말 고려 초의 전형적인 비로자나석불상이다.
육계가 분명치 않은 나발 머리칼, 작고 둥근 현실적 얼굴, 좁은 어
깨, 빈약한 체구 등 단정하게 참선하고 있는 선사의 모습을 본떠 조
성한듯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아래위로 포개어 놓은 지
권인의 비로자나수인, 얇게 빗은 듯 규칙적인 평행밀집 옷주름 등은
바로 9세기 내지 10세기의 전형적인 비로자나석불 양식을 따르고
있다.
대좌 역시 중엽복판연화문이 새겨진 상대, 8각의 중대, 귀꽃과 복
련이 새겨진 하대 등도 당시의 대좌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은 한층 규격화 되고 섬약해진 것을 보아 9세기 중엽~10세
기경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된다.
화남마을에는 이외에도 권응수 장군 유물전시관 뒤쪽에 있는 경충
사와 면와, 송화정, 청류당, 화남재, 화포정, 현감청선비 등과 희미
해진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녕 화남 _
23. 인종태실 수호사찰 화엄교학의 본산 - 은해사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백흥암, 운부암, 인종대왕태실…
팔공산의 영봉이 높이 솟아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뻗은 일지맥이
급하게 낮아져 태실봉을 이루고 여기서 다시 낮아져서 구릉지를 형
성하고 있으며, 산정상에서 발한 시내는 계곡을 따라 흘러 좌우에는
기암절벽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는 청통면 치일리.
지곡은 청주한씨의 선조가 3백여 년 전에 개척했으며 당시 잔디언
덕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다 하고 부헝디미는 약150여 년 전에 차
영수라는 선비가 개척했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부흥리,
지곡리, 학곡리가 합해 치일리가 되었다.
영천시 청통면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은해사는 현재 대한
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809년(헌덕왕 1) 혜철국사가 해안
평에 창건한 사찰로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 했다. 그 뒤 1270
년 (원종 11)에 홍진국사가 중창했고 1275년(충렬왕 1)에는 원참이 중
건했으며, 1485년(성종 16)에는 죽청과 의찬이 묘봉암을 중창했다.
_
1546년(명종 1)에는 천교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해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
사라 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에 묘진이 중건했고, 1589
년(선조 22)에는 법당의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을 했다.
1712년(숙종 38)에는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고 1714
년에는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해 소나무를 심었으며 1761년에
는 천왕문을 세웠다. 1772년에는 자암이 대웅전 불상을 개금했으며,
도봉은 영산전과 시왕전(十王殿)의 불상을 개분했다. 이렇듯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이래 은해사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 명성을 날리면
서 여러 고승을 배출했다.
1847년(헌종 13)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 불이 났다. 이때의 화
재는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1,000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862년(철종 13) 3월 흔허지조가 지은‘은해사중건기’에 다음과 같
이 기록되어 있다.
은해사 _
_
“헌종 13년 정미(1847)에 실화로 은해사가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사우를 전소시키는데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며 영조 어제의
수호 완문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기 때문에 당시 영천군수 김기철
이 솔선하여 300꿰미의 돈을 박봉에서 털어내 시주하는 것을 비롯
대구 감영과 서울 왕실의 시주가 계속 답지하여 수만 냥의 재원을
확보, 3년여의 불사 끝에 헌종15년(1849)에는 그 중창불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때 지어진 건물은 대웅전·향실(香室)·고간(庫
間)·심검당(尋劍堂)·설선당(說禪堂)·청풍료(淸風寮)·보화루(寶
華걹)·옹호문(擁護門)·안양전(安養殿)·동별당(東別堂)·만월당
(滿月堂)·향적각(香積閣)·공객주(供客廚) 등이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은해사는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
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로 성장했다. 1943년까지만
해도 이 절은 논 46만 4천여 평, 밭 2만 8천여 평, 임야 920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2,484평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으
나, 현재는 논 2만 4천여 평, 밭 1만 7천여 평, 임야 851정보, 건물
19동, 승려 50여 명이 수도하고 있다.이곳은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
에는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조선후기의 고승
영파가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
날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문화재자료 제367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
설선당·심검당·종루·보화루·독성각·승당·요사채·객실 등
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거조암·기기암·백흥암·묘봉
암·중암암·백련암·서운암 등이 있다.
은해사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이 많이 전한다. 인근 파계사를
원찰로 하고 있던 영조가 왕자시절에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
(完文)을 지어 보낸 일이 있고 이것은 영조 등극 후에 어제완문(御製
完文)이라 하여 이 절을 수호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 시기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을 따라와
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할 때 은해사에 들렀을 것으로 짐작
하고 있다.
1862년에 쓰여진‘은해사중건기’에는 대웅전·보화루·불광(佛
光)의 삼대 편액이 추사 김정희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고
했다. 1879년 영천군수 이학래가 쓴‘은해사연혁변’에는“문액(門
額)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종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
(金侍걏)의 글씨이고 노전(爐殿)을 일로향각(一걙香閣)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했다. 이로 보면 은해사는 중창 후에
추사글씨를 많이 받아다 현판으로 새겨 걸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선생 글씨 중‘은해사’의 글씨를
은해사 _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
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
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
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이 글씨들은 9년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해 온갖 신산을 겪으며
한결 무르익고 원만해진 추사의 솜씨와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 차츰 노
성함을 뛰어 넘어 무심함의 경지로 다가가는 그런 글씨들인 것이다.
은해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거조암 영산전이 국보 제14호, 운부
암 청동보살좌상은 보물 제514호, 백흥암 수미단과 극락전은 보물
제486호와 790호, 은해사 괘불탱화가 보물 제12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소장금고와 감로왕도가 도지정유형문화재 제307호와 319호,
중암암 삼층석탑이 332호, 은해사 대웅전 후불탱화 및 삼장탱화가
342호, 인종태실이 350호로 지정되었고 은해사 대웅전이 문화재자
료 제367호로 지정되는 등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많은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수림장(樹林葬)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설지만 이
미 스위스, 독일,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대중화되어 있는 장묘
문화이다.
사람과 나무는 상생하며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섭
리에 근거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여 그 골분을 지정된 수
목 아래에 묻어서 그 수목과 숲에서 함께한다는 것이 수림장(樹林
_
葬)의 취지이다. 은해사 수림장은 스님집전, 명패, 문상객 공양, 설,
추석, 백중, 합동추모제 무료봉행 등의 혜택이 있으며 49재, 천도재,
지장보살, 영구위패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특징은 사시사철 사찰 경내에 있으므로 불경 소리를 들으며 극락
왕생할 수 있고 명패 외에는 다른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으므로 자연
경관을 해칠 필요가 없다. 또 개인, 부부, 가족 등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고 사찰에서 500년 이상 관리해 주며 매월 지장재일에 극락왕
생을 기원하는 합동 추모제를 올려준다고 한다.
은해사 _
24. ‘ 뒤티고개’전설간직, 맑은물흘러
- 임고 삼매
동인각… 이순신ㆍ김완 장군 추모, 격조 높은 건축물
자양서당… 퇴계 친필 현판, 향리 후진교육위해 창건
영천댐 바로 아랫마을인 임고면 삼매리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고속
도로 공사가 끝나면서 마을지도가 바뀌었다. 매곡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맞은편 도로를 유심히 살펴야 동인각과 자양서당으로 들어가
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몇 번째 실패 끝에 오늘은 운 좋게도 한 번에
진입로를 찾는 행운이 따랐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제법 불어난 자호천 위에 설치된 다리를 건넌
후 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왼쪽 길을 따라 500m 정도 들어가면 동인
각과 함께 자양서당을 만날 수 있다.
동인각 사적비와 자양서당, 동인각 등이 어우러진 이곳에서는 뻐
꾸기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청소가 안 돼 좀 지저분
하긴 해도 방문이나 마루 등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_
동인각(유형문화재 제77호)은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운 이순신
과 부장 김완 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원래는 자양면 노항리에 세웠
으나 정조 9년(1785) 5월 소실되어 정조 11년(1787)에 재건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동안 퇴락하여 1960년 자양면 성곡리로 이전·복
원하였으나 영천댐 수몰지구가 되어 1976년 7월 현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이 집은 중앙에 정면 2칸의 대청을 꾸미고 후벽 1칸에
는 위패를 봉안토록 하였고 기둥은 네모, 여덟모, 원형 등 세 종류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원출방의 철리(哲理)를 응용한 것으로 높은 격
조를 지니고 있다. 공포는 익공계 주심포 양식으로 안동, 영천지방
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수법으로 짜여져 있다.
이 건물은 중앙에 정면 2칸의 대청을 꾸미고 후벽 1칸, 전면에 신
주(神廚)를 두고 있다. 그래서 평면구성이 보통의 공청과는 약간 다
임고 삼매 _
르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3칸이다. 이 12칸의 평면 중에 마루가
깔린 면적이 6칸으로 전체면적의 반을 차지한다. 평면 좌우의 끝은
각각 2칸씩의 방이 있고 방 사이 2칸에 신주가 있는데 바닥은 역시
마루이다. 이러한 평면구성에서 신주가 없다면 도처에서 널리 보이
는 사랑채의 모습과 흡사한 평범한 것이 된다.
신주 2칸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고 띠살 무늬의 사분합비(四分閤
扉)가 달려있다. 밑으로 궁판이 있는 문비여서 키가 크고 갸름하다.
신주 2칸을 구분하는 기둥, 사분합이 좌우 주간(柱間)에 설치하게 된
중앙기둥은 특이하게도 팔각주이다. 사분합의 좌우측 기둥, 즉 대청
과 방과의 접합상의 기둥은 방주(方柱)이다. 그 외 나머지 기둥들은
모두 둥근 기둥이다.
결국 이 작은 집에 모나거나, 팔각 또는 둥근 세 가지의 기둥이 있
는 셈인데 원출방(圓出方)의 철리(哲理)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과
_
정에 채택되는 팔각의 도입은 건축주가 상당한 수준의 학식을 지녔
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노항동에서 태어난 김완 장군(1551~1607)은 선조 22년에 선전관
벼슬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진에 종사하여 옥포, 당포
에서 대첩을 하니 절충장군의 직책과 포상을 받았다. 또한 장군은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갔으나 굴하지 않고 탈출하여 귀국하니‘해동
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이 하사되고 함안군수로 제수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였으나 해전으로 인한 심한 여독으로 고향에 돌아와 생을
마치니 원종훈1등에 책록되었다.
동인각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자양서당(유형문화재 제78호)은 조
선 명종 원년(1546) 호조참의 김응생, 정윤량, 노수가 향리의 후진교
육을 위해 노항동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1976년 7월 영
천댐 수몰지구에 편입되어 현 위치에 이건하였는데, 이때 건물주위
에 담장을 두르고 일각문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서당건물은 전퇴(前
退)가 있으나 이 건물에는 없으며 서생들이 모여 글을 읽는 대청과
임고 삼매 _
숙박을 위한 방으로 평범하고 소박하게 짜여져 있다.
서당 내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동인각에
봉안하고 있는 김완 장군은 김응생의 셋째아들이다.
김응생(1496~1555)의 자는 덕수, 호는 명산, 본관은 경주로 13세
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성인과 같았으며 장례 후에 여묘살이
를 하니 큰 호랑이가 밤새껏 지켜주었다고 한다. 향중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했으며 진사에 올랐으나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면산의 남쪽 기슭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서적을 번역하여 마을 청
년들에게 보급하니 학업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문전에 모이는 지라
노촌 정윤량, 소암 노수와 함께“우리 향중은 정포은이 출생한 곳이
라 실지로 해동 백록동이라”하고 공동으로 재물을 모아 집을 건축하
고 태학의 제도와 같이 하여 퇴계 이황에게 묘우(廟宇)의 액(額)을 청
_
하고 학규를 정하여 임고서원을 창건하게 되었다.
자양서당에서 공부하는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은행나무 밑에서 학
문을 장려하려는 뜻에서 지은 이 시에 그의 사상과 유업이 담겨있는
듯하다.
삼매리는 동북으로 자양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으로는 화북면
과 접경하고 남쪽으로는 덕연리와 접하고 있다.
평천리에서 북동쪽으로 5㎞쯤 가면 큰 반석이 있고, 좋은 청석과
바위가 많아 반곡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벌바우(봉암)에도 바위와
토종벌이 많으며 마을 앞쪽에는 오미산이 있다.
반곡 동쪽에 있는 용천은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고 앞
으로 자양천의 맑은 물이 흘러 그런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삼매리에는 뒤티고개에 얽힌 전설이 남아있다. 뒤티마을 뒷산에 있
는 뒤티고개는 고개가 낮아서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는 경우가 많으므
로 여름에도‘추운 고개, 바람고개, 귀신고개, 슬픈 고개’라고 한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에 샛바람이 불게 되면 젊은 여자나 색시가
바람이 나고 그 해에 여자가 먼저 고개를 넘게 되면 마을사람들 중
에서 중병이 걸리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 동네의 시어머니들은 자기 며느리나 딸
이 바람나지 않도록 하려고 자애로운 마음가짐으로 오미산 골짜기
신바위에 치성을 드린 연유로 그 산골짜기를 산자고곡 또는 산자골
이라고 부른다.
임고 삼매 _
_
25. 극락세계 갈망, 수행자 발길 이어져
- 자양 용산
생육신 이맹전 충절기린 용계서원ㆍ부조묘ㆍ제단
영천댐 물과 산수 조화, 3백년된 은행나무 눈길
영천의 진산인 보현산은 불교의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수행처로 삼았던 곳이다.
법화, 보현, 자천, 정각으로 이어지는 서쪽 길이나 공덕, 정각으로
이어지는 남쪽 길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임고 선원마을에서 용화, 원
각, 정각에 이르는 동쪽 코스 역시 극락세계를 갈망하는 수행자들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자양댐을 거쳐 경은 이맹전의 충절이 배어있는 용산마을을 찾았
다. 기룡산에서 뻗은 일지맥이 동남쪽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낮아져
서 연봉을 이루고 이 산에서 발한 계곡이 원각 중앙을 흐르고 있어
계곡좌우에는 구릉지와 기암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에는 영
천댐 물이 넘실거리고 동서로는 높은 산이 솟아 산수가 조화를 이루
고 있는 마을이다.
용산리는 댐 수몰전 면소재지였던 마을로 원각, 월연, 인구가 있었
으나 1974년 이후 원각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몰되고 말았다. 남은
원각은 가장 산중에 있는 마을로 이지백이라는 선비가 개척했으며
개척할 당시 3개 자연부락 중 가장 윗마을이라 하여 원각이라 하였
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비 오는 날 방문한 객
을 반갑게 맞아주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입구의 원각쉼터에는 300년 된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자리잡고 있
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월달에 이곳에서 당굿을 하였다고 전한
다. 한밤중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살아있는 닭을 묶어 이 불무더기
앞에 둔다. 사람들이 호랑이 가죽을 그려서 덮어쓰고 농악을 울리면
서 불더미 부근을 왕래하다가 그 불더미를 뛰어넘어 닭을 안고 가버
린다.
자양 용산 _
이 당굿은 옛날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마을사람을 해치므로
이와 같은 의식이 생겼다고 전하며 닭을 안고 가는 것은 호랑이에게
제물을 먹이는 것을 의미한다.
마을 서쪽 산아래에 자리잡은 용계서원(유형문화재 제55호)은 조
선중기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경은 이맹전의 학덕과 충의
를 추모하기 위하여 정조 6년(1782) 왕명으로 토곡동에 건립된 것이
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노항리로 옮겨 서
당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현 위치로 옮겨
졌다.
생육신 이경은선생부조묘(유형문화재 제53호)는 정조 10년(1786)
에 어명으로 건립된 것이라 하는데 화강암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이며 제단(유형문화재 제54호)은 숙종 39년
(1713) 어명에 의하여 후손 이유룡, 이승룡 등이 건립한 것으로 화강
암 석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1칸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나라가 망한 것을 멀쩡히 눈을 뜬 채 본 사람인데 눈을 떠서 뭘 하
겠는가…”병조판서 심지의 아들로 선산군 구미읍 형곡리에서 태어
나 자란 경은 이맹전(1393~1481)은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몰
아내고 세조가 대신 왕위를 차지하자‘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27년 간이나 거짓 봉사, 거짓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충절을 굳게 지
켰다.
성삼문 등 죽음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에 비하여 세상
을 등지고 살던 선비 김시습, 남효온, 원호, 성담수, 조려 등과 더불
어 생육신으로 불리고 있다.
_
세종 9년(1427)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 정언을 거쳐 외임을 자
청, 거창현감이 되어 청렴결백하게 선정을 베풀고 있을 때, 수양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즉시 현감직을
내어놓고 선산 강정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전원에 묻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여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혹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
면 자기 눈이 멀었다고 하며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궐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 세상에 뜻이 없으니 생계의 걱정을
할 리도 없었다. 방바닥에는 까는 자리조차 없고 밥 먹을 때는 수저
조차 없었으나 조금도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때때로 아홉 명의 자녀들을 모아놓고“너희들이 아비를 잘못 만나
세상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 면목이 없구나.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한번 세상에 출사하여라. 나는 이 세상에 나가지 않겠지만
자양 용산 _
후일이면 반드시 너희들에게 좋은 날이 올 것이다”라고 위로했고 자
녀들도“아버님을 너무 염려하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버님 뜻하
신 대로 행하시옵소서. 소자들도 좋은 시대가 오면 세상에 나갈 것
입니다”하고 순종했다고 한다.
이맹전은 한평생 왕에 대한 의리를 지킨 후 89세의 고령으로 세상
을 떴고 정조 때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을 추증받았으며 정간공의
시호를 받았다.
용계서원 맞은편 개울 건너에는 용산정사와 독락당, 원계재가 나
란히 배치되어 있고 마을 입구에서 동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
에 용강정과 인구초당이 있다.
용산정사는 구한말의 선비로 청렴 강직하여 일제의 무수한 고문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민의 긍지를 지킨 영남학맥의 마지막 거
유였던 이태일(1860~1944)이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학
당이고 독락당은 조선 선조시대의 학자인 이지백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이다.
또 원계재는 벽진이씨 영천종중에서 종사를 논의하기 위해 고종
말엽에 지은 재사이며 용강정은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한 정석임
과 아들 중직 양대를 추모하여 지은 정자, 인구초당은 조선 고종시
대의 인물로 덕행 면학하였던 정진성의 사저이다.
용산마을에는 비가 오는 날씨 탓인지 외부에서 찾아드는 사람들의
발길은 보이지 않았으나 10여 년 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오히려 단아
해 보였고 인심 좋은 시골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_
영영천천조조양양각각 ___
자양 충효
교촌
대창 용호
성내
금호 신월·봉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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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산남의진 피로 얼룩진‘충’과‘효’서린 곳
- 자양 충효
정환직ㆍ용기 부자 고종밀지 받고 의병 일으켜
충효재, 화천지수비… 사룡산 금정암 제석탱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 되고 민족존망이 이에 있거늘 내가 앉아서
나라의 망함을 보고만 있겠는가?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
기로 하고 오늘 황제로부터 중대한 임무를 받았으니 너는 곧 고향으
로 돌아가 집안을 보살피도록 하라.”
“임금께서 신하에게 내리신 명령과 어버이가 자식에게 분부하는
것이 같사오니 나라를 구한 후에 사가를 보존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
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젊은 자식이 할 일이오니 바라옵건
대 소자에게 대임을 맡겨 주시오면 소자 힘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
고 부모님께 효도하여 집을 보존하겠습니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자 고종황제는 정환직을 불
러 짐망(朕望)이라는 밀지를 내려 화천의 물을 부탁한다고 했다.
‘화천의 물’이란 옛날 중국의 궁성에서 적국의 침범을 받자 유능
한 신하가 왕과 옷을 바꾸어 입고 목이 마르니 화천의 물을 떠오라
며 왕을 피신시킨 후 대신 처형당했던 고사를 빗대어 친일파 관리들
의 눈을 피하기 위한 고종황제의 재치였다. 집으로 돌아온 정환직이
아들에게 고종의 밀지를 보이며 집안을 돌볼 것을 명하고 대의를 행
하고자 하였으나 아들이 3일 동안 간청하여 결국 정용기가 먼저 산
남의진을 이끌게 되었다.
조선 철종 5년(1844)에 태어난 정환직은 의술을 배우다가 고종 24
년(1887)에 북부도사가 되고 1894년에 동학란이 일어나자 사남참오
령이 되어 황해도의 동학군 토벌에 참가했으며 1899년 종묘화재 때
신주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왕으로부터 패물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자양 충효 _
삼남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1905년 을미조약이
체결되자 흥해, 청하 등지에서 아들 용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대장을 맡았던 정용기가 청하, 청송에서 적과 대항하여 입암으로
진격하다 전사하자 정환직은 패병들을 재정비하여 흥해, 신해 등지
에서 많은 적을 격파하였으나 1907년 청하에서 적에게 붙들렸다. 적
은 여러 가지로 회유책을 썼으나 오히려 크게 꾸짖고‘몸은 죽어도
마음은 변치 않으리, 의가 중하니 죽음이 오히려 가볍도다. 뒷일을
누구에게 맡길꼬, 깊은 밤 오경을 말없이 앉아 세우도다’라는 유서
를 남기고 1907년 조양각 앞 천변에서 총살당했다.
자양면 충효리는 영덕군 지품면에서 발한 자호천, 화북면 정각리
와 자양면 보현리와의 경계지에서 발한 계곡물이 마을에서 합류되
어 영천댐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해발 960m인 기룡산에서 발한 일지맥이 정동으로 뻗어 작은 분지
를 형성하여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싼 기암절벽이 아름다운 광경을
이루며 영천댐의 형성으로 더욱 산수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예나 지
금이나 인재배출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일견군평 검단, 내검, 하거 일부가 합하여 1914년 읍·면 통폐합
시 충효리가 되었다. 군드래들은 삼한시대에 가야 군인들이 들을 개
척했다고 하고 한편으로는 약350년 전 안대결이라는 선비가 이 마
을을 개척했다고도 한다.
검단은 약330년 전에 이신범이란 선비가 개척했다고 전하는데 정
환직·정용기 부자의 출생지로 이들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충
_
효재와 유허비, 그리고 묘가 있
어 충효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솔목 내검단은 문하복이라는
선비가 약350년 전에 개척했
고 뒷산에서 군인들이 기마훈
련을 한 적도 있으며 말을 방목
하던 곳이라 솔목이라고 한다.
일견은 약350년 전 이일명이
라는 선비가, 화방촌은 강두만
이라는 선비가 개척했으며 꽃
피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충효재(경상북도 기념물 제81호)는 구한말 산남의진 대장으로 활
약하다가 순국한 정환직(1844~1907)·정용기(1862~1905)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생존 의사들이 검단동을 충효동으로 고
쳐 1923년에 건립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주위는 난간을
돌려 지었다. 정원에는 유허비와 화천지수(華川之水)비가 있으며 대
문 앞에는 충효동 사적비가 서있다.
충효재 뒤쪽에 위치한 충효사가 있는 자리는 보현사란 절을 옮겨
지었다고도 하고 도인이 어린아이와 함께 살았다는 얘기도 전하나
불명확하다. 다만 보현사가 이건된 후 산 이름을 빌어 기룡사라 했
다고 전하며 스님이 기거하지 않아 보살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자양 충효 _
해공 주지스님이
1990년에 들어와 동
네의 이름과 성현의
가르침이 일치한데서
충효사라 부르게 되었
으며 지금은 수많은
신도들이 복을 빌고
있는 지장도량으로 유
명한 절이 되었다.
이 절에 있는 사룡
산금정암제석탱(유형
문화재 제299호)은
조선 영조 40년(1764)의 작품으로 소형의 그림이면서 화격이 뛰어
난 불화로 화기에 따른 정확한 유래를 기록하는 등 금정암의 소암에
서 신장탱의 기능을 수행한 매우 희귀한 그림이다.
18세기의 제석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같이 소형의 신장탱이면서
그 형식을 모두 갖춘 유례가 거의 없어 조선시대 불화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원래 불교 신장탱인 제석탱은 일반적으로 크기가 2m
내외의 것이 보통이지만 이 제석탱은 전체 70×65㎝, 화폭 55×54
㎝의 소형인 점이 특이하다.
소형의 방자형식이면서도 화기에는 소임의 명칭을 약칭으로 기록
하였는데 증명·화원·공양·별좌·감원 등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즉 이용대 부처와 지철비구의 시주로서 수성화원에 의해 제작된 불
화임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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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의 전방 좌우에는 일월관을 쓴 일궁천자와 월궁천자가 시립하
였고 그 옆에는 높은 관을 쓴 천인이 좌우에서 바깥을 보며 서있다.
천인상 뒤쪽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동과 천녀 4인이 등장하여 피
리, 해금, 비파 등을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등장인물 주변에는 오색구름으로 가득 채웠는데 서운의 색상은 차
분하고 조화로워 그림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충효리는 이름에서 풍겨지듯이 마을 곳곳마다 풍전등화에 놓였던
조국강산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피로 얼룩져 있는 듯했다. 1천여
명이 젊은이들이 초개와 같이 산화한 산남의진의 의병들이 활약하
던 당시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조양공원 문화원 앞에 세워진 산남의진비는 그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의 후원을 받아 지난 1963년 3월에 세워진 것이다.
자양 충효 _
27. 유래루 올라 선비정신 되새겨 - 교촌동
18성현 신위 모신 향교 유교덕목 보급
충혼탑, 영천지구전적비 나라사랑 호소
초여름인데도 올해는 벌써부터 유난히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다.
향교로 들어가 유래루에 올라서니 영천시내가 내려다 보여 고층건
물들이 들어서기 전인 먼 옛날에는 제법 운치가 있었을 성싶다.
마현산 서·남쪽으로 형성된 교촌동은 마을뒤편에 향교가 있어 붙
여진 이름이다. 남쪽으로는 과전·성내동, 동쪽은 창구·문내동, 그
리고 서쪽으로는 화룡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여러 가지의 속칭이 있는데 마을에 동제나무가 있어
동네의 안위를 기원하였다 하여 불려진 지당골, 지역의 동구보다 안
으로 들어갈수록 넓다고 하여 붙여진 깍골, 영천에서 서쪽으로 만리
까지 갈 수 있다 하여 서만리골이 있다. 그 외에도 신사터, 새골, 잿
고개 등이 어울려 이룩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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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초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서당을 마친 유생들이 중등교육
을 수학하는 지방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었다. 향교는‘일읍일교(一
邑一校)’의 원칙대로 고을 수령이 파견된 주읍(主邑)에는 반드시 설
치되었다.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이라도 독서를 원하면 누구나 교육을 받
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양반 중심의 사회체제 속에서도 일단 향교
의 교생이 되면 사회신분을 문제 삼지 않았다. 향교의 교육과정은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유교교육의 효과를 높이고 학문의 심화를 위해 교육제도와 과거제
도를 유기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유능한 관리를 양성코자 했다. 그
러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지방의 교육·문
화를 선도하면서 유교사상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왔던 향교는 차
츰 문묘를 향사하는 일에 치중하게 되었다.
교촌동 _
오늘날 향교에서는 서울의 성균관과 연계하여 유도회를 조직하고
문묘의 향사와 함께 사회교육 사업을 전개하며 시대의 흐름에 적합
한 유교의 덕목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물 제616호로 지정된 영천향교 대성전은 유래루, 명륜당을 거쳐
맨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세종 17년(1435)에 창건, 중종 8년(1513)경 군수
김흠조가 중수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14년(1622) 황효
의 군수가 중건한 영천향교의 묘우이다. 경사지에 위치한 향교의 가
장 안쪽에 자리잡은 동남향의 집으로 앞쪽으로 명륜당과 문루인 유
래루가 동일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원주를 세워 정면 5칸, 측면 3칸을 구성한 단층
맞배집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
둥을 세워 주두(柱頭)와 익공(翼工)을 놓은 물익공식(勿翼工式)의 건
축물이다.
사묘 건축은 전퇴 한 칸을 개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여기서는 전
퇴를 두지 않고 정면의 평주칸에 바로 문과 창을 내었다. 정면 어칸
과 양 협칸에는 쌍여닫이 판문을 달고, 양 측칸에는 중방 위에 광창
을 내어 통풍과 채광을 도모했다. 5량가로 외일출목의 초익공집이
다. 기둥은 모두 원주인데 높게 구성하여 건물이 훤칠해 보인다.
내부의 가구는 전퇴가 없는 관계로 평주 위에서 시작되었다. 자연
스럽게 휘어진 굵은 소나무를 대들보로 걸고 삼문변작의 법식에 따
라 종량을 걸어 마루대공을 받았다.
_
중대공은 동자주를 세워 접시받침을 놓고 양봉과 첨차로 구성한
포대공이고 마루대공은 파련대공이다. 전퇴를 두지 않고 정면 평주
칸에 바로 창호를 설치하고 기둥을 높게 하여 상부의 가구를 간결하
게 처리하여 내부를 경쾌하게 구성한 것이 특이하다. 정북면에 공자
를 주벽으로 그 동쪽에 안자, 자사, 서쪽에 증자, 맹자 사성을 모셨
고 동서·종향에는 정자와 주자의 위패를 모셨다.
앞쪽에 자리잡은 동·서무에는 우리나라의 유현 18위를 모시고 있
다. 동무에는 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등 9선생의 위패를, 서무에는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
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새채 등 9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신위를 모신 향교는 윤리도덕을 밝히고 학
문을 연마하는 거룩한 장소로 그 분들의 덕행과 도학을 경모하고 본
교촌동 _
받기 위해 지금도 음력 2, 8월 상정에 석전대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
때는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소정의 절차에 따라 행사를 연다. 초헌
관·아헌관·종헌관은 특별한 제복을 입고, 다른 사람들은 유건과
도포를 입고 행사한다.
대성전 앞쪽에 있는 명륜당은 고을의 선비들이 향음주례와 향사례
를 치르며 젊은 영재들을 가르치던 유도진흥의 전당이었으나 서원
이 발달함에 따라 향교의 기능이 쇠퇴해 지면서 석전대제를 준비하
고 윤리도덕의 강론과 향내 효열·선행자를 표창하는 등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명륜당 앞에 있는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
하던 곳으로 요즘도 정재진씨의 지도로 동재에서 매주 2회씩 한문
교실이 열리고 있다.
유래루는 향교의 대문으로 유생들이 경치를 감상하며 시부를 짓고
읊조리던 곳이고 삼일재는 대소과에 등과한 선비들이 후진을 장학
하던 곳이다. 앞마당에는 보호수로 지정(94. 10. 21)된 4백년 된 회
화나무가 홀로 외로이 향교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주나라 때는 회화나무를 대궐 안에 심어 삼정승이 그 밑에서 송사
를 판결했고 당나라 때는 회화나무에 꽃이 피는 음력 7월에 과거를
보았으며 특히 당나라 낙양 동쪽에 회화나무 숲이 있었다.
이 숲 속에서 선비들이 손수 쓴 책을 사고팔며 강론을 했기에 이곳
을 괴시(槐市, 회화나무 밑의 시장)라 하고 후대에 와서는 대학을 괴
시라 부르게 되어 향교와 회화나무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_
“조국의 운명을 건 갈림길에 적구의 무리들이 영천뻘을 넘나드니
인과 철이 융융하는 전쟁터로 너, 나 뛰쳐나가 둑을 막아 내 고장을
지켰다. 저 기룡산은, 이 금호강은 너의 용자를 길이 간직하리”
마현산 정상에서 영천 시내를 내려보며 쓰러진 전우를 끌어안고
절규하는 국군용사의 모습을 새긴 영천지구전적비는 지난 80년에
건립되었다. 또 전적비에서 앞쪽으로 내려오면 6·25 때 이 지역에
서 전사한 국군장병 1,250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난 63년에 건립
된 충혼탑이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남은 이와 자라나는 젊은이들에
게 무엇인가를 항변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교촌동 _
28. 도화못 중심 그림 같은 전경 - 대창 용호
천년고찰 영지사, 조호익 배향한 도잠서원
하마비, 공룡발자국, 부도, 석탑 … 볼거리 많아
태풍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중·북부 지방에는 꽤 큰 피해를 입었
다고 전해지지만 우리 지역에는 그다지 피해가 없어 보였다. 비 개
인 들녘에는 생기 넘치는 농작물과 개울을 급하게 흐르는 물에는 힘
이 넘치고 있었다.
대창면 용호리는 구룡산에서 북으로 뻗은 지맥이 다시 서쪽으로
연이어서 깊은 계곡을 감싸고,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연봉들이 영지
사를 거쳐 서남쪽을 가로막아 마치 작은 한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유명한 도화못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마을은 각기 한 폭의 그림
처럼 아름답다. 사방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춘하추동
주위의 자연환경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마을로 탑마을, 산잠동, 원
촌, 송호, 용교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_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85. 8. 5)된 도잠서원은 조
선 광해군 5년(1613)에 성리학의 대통을 이은 학자이며 선산부사를
지낸 지산 조호익을 배향하기 위해 공이 평소 기거하며 학문을 닦던
망회정 뒤에 묘우를 건립하여 지봉서원이라 하였다가 1653년 현 위
치로 이건하였다.
숙종 4년(1678) 유생 정시간 등이 소를 올리자 나라에서는 도잠서
원이란 편액을 내리고 이상제를 보내어 사제하였는데 사제문(賜祭
文) 가운데‘우여심모’라는 글이 있었기에 병와 이형상이 사우를 성
모묘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고종 4년(1868)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7년 망회정 뒤
에 도잠서원을 중건하니 경내에는 정면 5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진 강당과 그가 만년에 학문을 닦았다는 망회정 등 6동의 건
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2동만 남아있으며 조호익의 신도비와 하마비
대창 용호 _
가 있다. 신도비는 높이 2.67m, 폭 90㎝, 두께 21㎝이고 비각 정면
과 측면이 1칸씩으로 되어있다.
구 서원 조금 위쪽에는 지난 95년 향내 유림들이 영천향교 명륜당
에 모여 도잠서원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한 후 99년 12월 16일에 서
원법규에 맞게 완공하고 2000년 음력 2월 하정일 춘향(春享)을 한 새
서원이 웅장한 모습으로 도화못을 굽어보며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지산 조호익(1545~1609)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연구,
명종 15년(1560) 생원·진사를 거쳐 문과에 합격했으나 선조 9년 경
상도 도사(都事) 최황의 무고에 의해 평안남도 강동에 유배되어 유
배지에서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칭호가 특사(特賜)
되었다. 부자라 함은 공자나 주자같이 덕행이 높아 모든 사람의 스
승이 될 만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배소에서 풀려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
민을 규합,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받았다.
그 후 성주목사를 거쳐 1595년 안주목사가 되고 이어 성천, 정주목
사를 역임한 뒤 사직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 뒤에 선산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
며 시호는 문간, 저서로는 지산집, 가례고증, 주역석해 등이 있다.
산 쪽으로 좀 더 들어가다가 영지사 조금 못 미친 곳에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다. 많은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 소리가 마치 폭포수처럼
장엄하게 들려 마음이 정화되는 듯했다.
_
쥐라기 말기와 백악기 초기의 암석에서 화석으로 발견되는 이구아노
돈(Iguanodon) 계통의 공룡으로 현재 12개의 발자국이 나타나 있다.
이구아노돈은 대형 초식성 공룡의 한 속(屬)으로 유럽·북아프리
카·동아시아 등에 걸쳐 나타난다. 몸길이는 10m 이상 되었으며,
땅에서 머리까지 높이는 4m였다. 두발로 걷는 이 동물은 뒷다리가
매우 발달했으며, 길고 육중한 꼬리로 몸의 균형을 유지했다.
앞다리도 비교적 잘 발달했는데 여기에는 날카로운 송곳과 같은
휘지 않는 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과 수직을 이루는 독특한 손
이 달려 있다. 여러 마리의 화석이 무리로 발견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떼를 지어 돌아다녔으며 부분적으로 수중생활도 하여
위협을 받으면 냇가나 호수로 피한 것 같다.
대창 용호 _
천년고찰 영지사는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하여 웅정암이라 했
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에 지산조사가 중수하여 영지사라고
했다. 사찰입구에는 임자갑유공비(壬子甲有功碑)가 있어 조선 영조
50년(1774)에 중수한 것을 알 수 있다.
구룡산과 오지산 십이봉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유서 깊은 전통
사찰로 경내에는 팔작지붕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명부전, 산
신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역대 주지스님들의 부도가 있다.
대웅전과 범종각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7호(88. 9. 23)로 지
정되었고 법당 앞의 삼층석탑은 탑마을에 세워졌던 것으로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무너진 것을 대창지서에서 임시 보관하다가 영지사
에 이건한 것으로, 탑의 기단은 용호리 탑마을에 있고 이곳에는 초층
(初層) 옥신 이하와 상륜부가 전실된 1.6m 높이의 탑만 남아있다.
자연 장대석을 허튼층쌓기로 기단을 축조하고, 자연석을 주석초로
틀고 둥근 기둥을 사용한 대웅전은 둥근 기둥 상부에 외부의 2출목
과 내부의 3출목의 4제공 갖은 삼포형식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를 놓았으며 불단 상부의 천장부분은 용화반자를,
그 외 부분은 우물반자에 단청이 되어있다. 정면 중안 칸 문에는 꽃
살문을, 정면외측과 측면에는 교살문을 달았고 건물 귀에는 서까래
잡이 기둥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범종각은 자연석의 덤벙초
석에 둥근 기둥을 한 겹처마 초익공계의 5량가구식 건물로 마루는
우물마루를 틀고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_
또 심검당으로 불리는 요사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박
공·합각지붕의 복합형태 건물로 막돌 허튼층 쌓기 기단위에 덤벙
초석을 다듬어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창방 상부에 소로가 받혀 있고 정면과 배면 3칸에 반칸 규모의 동
마루가 놓여 있으며 안쪽에는 온돌방으로 칸마다 여닫이문이 달린
것을 미닫이문으로 교체해 놓았다.
8개월 째 영지사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한 보살은“천년고찰을 구
경하기 위해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며“이곳은 공
기가 맑고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정신수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
이 좋은 곳”이라고 절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창 용호 _
29. 거북바위 언덕‘호연정’실학선구자
병와 이형상 기려 - 성내동
숭렬당… 여진토벌, 대마도 정벌한 이순몽 장군 봉제사
호연정을 방문한 날 저녁, 병와유고각 앞마당에서는 감미로운 색
소폰 음률 속에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문화유산답사회‘우리얼’의 번개모임이 열린 이날 수원, 여수, 부
산 등지와 대구·경북 일원에서 40여명의 회원들이 호연정에서의
작은 만남을 함께 하고자 속속 찾아들었고 한국연예협회 김천중 영
천지부장과 문하생들이 전통가옥에서 현대음악 연주를 펼치며 먼
곳에서 방문한 귀한 손님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사했다.
영천향토사연구회장인 이임괄씨가 전통조경에 맞게 복원한 나무
들을 감상하며 유물과 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져 시원한
바람과 함께 여흥을 돋워주었다. 호연정과 숭렬당으로 유명한 성내
_
동은 여러 지역의 자연부락이 통합되어 이루어진 마을이다.
지난 시대 성 안쪽의 서편 마을인 성내동을 비롯하여 성 밖 서쪽의
구호동, 서남쪽의 지소동, 그리고 동쪽의 과전동과 인접한 서과동
일부, 지침동 일부가 합하여 명명되었다.
또 이곳에는 속칭 구터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강 건너편 오수
동에 역촌이 생기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예전에 살던 동네를 가
리켜 부르게 된 이름이다. 거북바위 언덕 위에 있는 호연정은 조선
시대 실학의 기초를 닦은 숙종·영조 문인 병와 이형상(1653~1733)
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30여 년 간 후학양성과 저술에 전념한 정자
이다.
성내동 _
인천에서 효령대군의 9대손으로 태어난 이형상은 문과에 급제한
뒤 경주부윤, 제주목사, 영광군수, 한성부윤 등을 지냈으며 그때마
다 선정을 베풀고 큰 치적도 남겼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
였던 남인에 속해 당쟁의 화를 겪기도 했다. 벼슬을 그만둔 그는 영
천 성두둘(현 성내동)에 호연정을 짓고 첫 주인이 되었다.
영천은 이형상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곳이었으나 삼산이수의 고장
으로 널리 알려진 영천의 산수가 아름답고 또 포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어하던 차에 영천지방 친구들의 권유로
제2의 고향이 된 것이다.
안팎 두채와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 뒤에는‘육우단’이라는 연못을
팠다. 육우란 소나무, 국화, 매화, 대나무, 계수나무, 연꽃을 말하는
것으로 연못 둘레에 정원을 만들었다. 정자는 호연정이라 부르고 누
는 이양루라 명명했다.
병와선생은 호연정에 거주하면서 악학편고, 학악습령, 강도지, 남
환박물지, 탐라순력도를 비롯한 저서 225책 1,800여권을 저술했다.
이 방대한 저술과 유물을 일괄하여 국가에서 보물 제652호로 지정
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탐라순력도’는
병와가 화공인 김남길을 시켜 그린 것으로 말의 터럭 하나까지도 섬
세하게 그려진 채 화려한 색채를 잃지 않고 있어 예술적 가치가 높다.
병와는 국학 분야에서도‘악학편고’등 종래의 학설을 뒤엎을 수
_
있는 16종의 저서를 남겼다. 현재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 저
술 총 142종의 전모가 모두 밝혀진다면 실학과 국학의 선구자로서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19호로 지정된 유품으로는 인장 23종과 호패 9
점, 홀 1, 옥피리(상자 포함) 1, 칼 2, 인영(상아 1, 호박 1, 옥 1, 흑옥
입영 2), 거문고 1, 관자 4(옥 2, 호박관자 2) 등 총 12종 59점이다. 이
형상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영천향토사연구회와 초람서예연구실 박
세호 원장이 공동으로 병와선생의 유상을 목판으로 새기기도 했다.
보물 제521호인 숭렬당은 세종 15년(1433)에 건립된 중국식 건물
로서 그 구조와 형태가 아름답고 특이하다.
성내동 _
이 건물은 세종 원년(1419) 쓰시마 정벌과 야인토벌 등에 혁혁한
공적을 남겨 일명 복장군이라 불렸던 명장 위양공 이순몽이 평소 기
거했던 가옥이다. 관향이 영천이고 1386년 이응의 아들로 영천에서
태어난 이순몽은 여진을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큰공을 세
웠으나 후손이 없어 영천의 유림들이 봉제사해 왔다고 한다.
1970년에 보물로 지정된 후 해체복원과 담장 보수 및 부속시설 공
사가 진행되어 지금은 완전히 그 원형을 복원하고 있다. 남향인 이 건
물은 남쪽 숭렬당과 뒤쪽 사당이 남북으로 배열되고 사주(四周)는 잡
석토병이 장방형으로 축조되었으며 후문 양측에는 별조(別造) 내병이
있어서 전체가 숭렬당 구성(區城)과 사당 구성으로 나뉘어 있다.
잡석을 쌓은 높이 1m 미만의 토상석단(土床石壇)에 덤벙 주초석을
_
배열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별당식으로 주간(柱間)은 어향(御向)이
약 30.3㎝ 더 넓으며 6칸 대청이 기본이나 대청의 양측면은 똑같이 2
칸통(間通)의 온돌이 딸리고 온돌의 개구(開口)는 전면과 대청벽 쪽에
각 두 개의 이분합(二分閤)과 한 개의 외짝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양측 온돌간 대청은 기단부를 따내어 아궁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각 1칸씩의 누마루로 되었고 전면 주열외측(柱곢外側)으로 3칸에는
긴 툇마루를 부설하였다. 큰 부재(部材)의 익공, 부분적으로 완곡 유
력한 한편 건실한 기풍을 띤 초각(草刻)행공 배바닥의 간략한 초각
등 조선초기의 수법이 보이고 있으며 현재는 장군의 위패를 받들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성내동 _
30. 신월동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대표적 양식
- 금호 신월·봉죽
대나무 많은 죽림사 신라 헌덕왕 때 창건
예부터 일대에 대나무와 오동나무가 무성하고 예천수가 샘솟듯이
나오며 3년에 한 번씩 봉황이 모여들어 대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서
식했다는 유봉산. 유봉산에서 남으로 뻗은 산맥이 낮아져서 구릉지
를 형성하고 다시 낮아져서 평야를 이루어 넓은 들이 만들어졌다.
금호읍 신월리는 습지가 많은 평지가 아니고 구릉을 끼고 있는 마
을이어서 인류가 정착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월하와 신흥 일부로
이루어진 마을로 월하리 고개마루에 사당이 있어 당(堂)고개라 하던
것이 이 고개를 넘어갈 때 땀을 많이 흘리는 고개라 하여‘땀고개’
또는‘땅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을 싸고 있는 숲은 팔공산 도둑봉에서 보이지 않도록 소나
무와 대나무를 심어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대나무는 없고 소
나무만 있다.
_
이 소나무들의 수령은 100~150년으로 곧은 것, 휘어지거나 처진
다양한 형태로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분재전시관을 연
상시키고 있다. 금호읍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 받고 있는 이 소나
무 숲은 경상북도로부터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보호받
고 있다.
드문드문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자리잡고 있는 탑못은 신라시
대 큰절이 있었던 자리라고 전하는데 궁예와 왕건이 싸우다가 왕건
이 패해 팔공산으로 도망갈 때 사찰을 불태우고 말았다고 한다. 불
상은 죽림사로 옮겼고 탑은 일제 때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절
을 다시 지었다.
불교문화유적의 큰 발자취인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면서부
터 많은 사람들의 숭배대상이 되어 왔으며 천년 성상의 모진 풍파에
금호 신월 _
도 꼿꼿하게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사
찰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의 경
배대상이었다.
지난 68년 12월 19일 보물 제465호로 지정된 영천신월동삼층석탑
은 탑이 세워질 당시 절의 이름이나 규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현재 신흥사 내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 4.57m의 화강암 석
탑인 이 탑은 기단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기와집 모양의 탑신
을 3층으로 쌓아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기단은 위 아래층 모두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 부분에 기둥 모양
의 조각을 새겼으며, 위층 기단 각 면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다. 8부중상이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모습으로 석탑에서
는 주로 기단에 새긴다.
탑신에 모셔진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탑
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사용했으며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1층 몸돌에는 4면 모두 문짝 모
양의 조각을 새기고 각각 그 안에 자물쇠와 문고리 모양의 조각을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모두 4단으로 새겼고 처마선은 수평을 이루
나 두꺼워 보인다. 지붕돌 경사면의 네 귀퉁이는 이러한 두터운 지
붕돌에 비해 아주 경쾌하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1층
몸돌이 큰 것에서 오는 불균형이 있고 각 4면에 모두 조각을 새겨 과
장된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나 당시의 수법만은 잃지 않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_
이곳은 신라시대의 신흥사지(新興寺址)라고 하나 부근에는 사지임
을 증명할 만한 근거가 없다. 현재 탑 자체는 부분적인 손상을 입고 있
으며 옥개받침의 감소, 초층 옥신의 과대, 과장식(過裝飾)이 있다. 옥
신과 옥개는 각 일석으로 되어 있으며 각 옥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첫 층 옥신은 각면 중앙에 문짝과 문륜(門輪)이 모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원래 모두 잃어버렸는데 후대에 새로 만든 옥신석과 옥
개석, 그리고 노반·보주 등이 얹혀 있어 현재는 4층탑을 이루고 있
다. 봉죽리는 곡촌, 죽방, 봉산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곡촌은 1720
년대에 해주오씨가 개척했고 죽방은 김해김씨가 마을을 개척한 후
대나무를 많이 심어 온 마을이 대나무로 둘러싸였다 하여 붙여진 이
름이다.
새터는 거여면이었을 때 새 동네가 이루어졌다고 하여 붙여졌다.
금호 신월 _
봉황, 죽림, 유봉, 봉산, 냉천 등은 모두 상서로운 새인 봉황과 관계
있는 곳으로 신월리의 유봉산과 연관이 있는 지역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인 죽림사는 신라 헌덕왕 1년(869)에 창건되었으
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그 후 중건하였으며 6·25사변 때 폐허가
되어 현재 건물은 그 후에 복원한 것이다.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채
가 있으며 극락전은 4칸 단층 팔작지붕이다. 또 건물 앞에는 조그마
한 탑이 있는데 이 탑은 옛날에 해체된 탑재들을 주워 만든 것이다.
_
영천조양각 __
임고서원
환벽정
금호 오계
임고 고천
봉림사
자천교회
31. ‘ 동방이학지조’만고의 충신 포은 정몽주 배향
- 임고서원
두 번째 사액서원, 곳곳에 충과 효 아로새겨져
지난 1990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통해 웅장한 규모를 갖춘 임고서
원을 방문하니 경상북도기념물 제63호 지정된 은행나무의 잎사귀들
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_
‘해동에의인이났다’(목은이색),‘ 나는비로소학과행에있어서
스승을 만났다’(이존오)며 당시의 대학자들이 추앙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굳은 절개가 살아 숨 쉬는 서원 내에도 만추의 계절 가을향
이 물씬 느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에 이
어 세 번째로 사액된 임고서원은 진사 노수, 생원 김응생, 향로 정윤
량, 생원 정거 등 4현이 중심이 되어 1555년 원래 선생이 태어난 우
항리 인근 부래산 아래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3년 이
곳에 중창했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65년 다시 지었으나 협소하고 서원법규에 맞지 않아 영천유림
들이 합심하여 국비지원으로 지금의 서원이 완비되었다.
임고서원 _
뒤쪽에 자리 잡은 묘우는
선생의 시호를 따서 문충사
라 하고 예전에는 포은선생
을 주향으로 여헌 장현광과
지봉 황보인을 추배했으나
지금은 포은선생과 지봉선생
만을 모시고 있다.
강당인 흥문당과 동서재,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과 유
물보호각인 진영각과 문루인
영광루가 있어 서원의 면모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 현판 글
씨는 당대의 명필인 윤봉오
군수가 썼고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임고서원에는 선생의 영정과 소장도서가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보
호받고 있으며 5백여 년 풍상을 겪으며 묵묵히 서있는 은행나무와
우항리의 효자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소장전적은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 회찬송악무목왕정충록, 논어
언해, 심원록, 임고서원 전곡십물범례등록, 임고서원 장악계안 부
절목, 환성사결입안, 임고서원 범규, 서원규범 등이고 인조기사모본
정몽주 영정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_
1337년(고려 충숙왕 6) 외가인 임고 우항에서 아버지 고려 수문하
시중 운관 공과 어머니 변한국부인 영천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생
은 어릴적 몽란, 몽룡으로 불리다가 관례 후에 이름을 몽주라 고쳐
불렀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한 아들의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장차 대성시키기를 결심한 나머지 백로가(白걢歌)를 지어 간곡히 훈
계했다.
이 시에는 이씨부인의 고절한 인품과 자식교육에 대한 철학이 담
겨있다. 선생은 백로가의 훈계를 늘 가슴에 새겨 대의를 지켜 물욕
에 초연했다.
1355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산소 곁에 움막을 짓고 기거를 하면서
살아계실 때 못다 한 효도를 하면서 3년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당시
만 해도 부모상에 대한 예법이 미비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백일상을 지냈으나 1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 사람들이 행하지 않는
3년상을 여묘살이로 마치면서 효에 모범을 보였다.
또한 여진족과 왜구정벌에 큰 공을 세웠고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
으로 가서 어려운 외교문제를 해결했는가 하면 성균관에서 경서를
임고서원 _
_
강의하니 이색은 선생이 성리학에 밝음을 극구 찬양하여‘동방이학
지조(東方굊學之祖)’라고까지 했다.
또 주자가례를 준수하고 사당을 지어 부모와 조상들의 제사를 지
극한 정성으로 지냈으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이방원이 아버지인 이성계를 문병하러온 포은선생의 속마음을 떠
보기 위해 술자리에서 하여가를 부르니 선생이 단심가로 화답하며
일편단심 충성심을 보이자 1392년 4월 4일 선지교(選地橋)에서 심
복 조영규 등을 시켜 선생을 살해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 56세였으
며 선혈을 흘린 다리의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나
타냈다 하여 다리 이름을 선죽교(善竹橋)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굳게 지켜 마침내 만고의
충신으로 우리들 가슴속에 충절의 사표로 남게 된 것이다. 조선 태
종 원년(1401)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된 선생
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깊어가는 가을, 자녀들을 데리고 포은 선생의 사당인 문충사를 참
배한 후 이씨부인이 남긴 백로가를 들려주고 선생의 충절이 아로새
겨진 단심가를 함께 읊으면서 충과 효를 가르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임고서원 _
32. 시냇물 졸졸졸… 선경 같은 환벽정‘우뚝’
인근에 신녕향교, 성환산공원, 신녕현감 선정비군 남아
신녕면 화성리는 본래 신녕현의 소재지였고 지금도 신녕면의 소재
지이다. 예전에는 관아를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
부분 헐려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환벽정과 향교, 선정비군 등
을 통해 찬란했던 당시의 규모와 문화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케 하
고 있다.
“벼슬아치여! 끝내 탐욕을 내지 못할지니 절개 굳은 대나무가 그
대 집에 족하네. 줄기마다 곱게 서서 다투지 않고 죽순 또한 탁룡이
라, 하늘에 오를 듯 여원 돌, 찬 냇물은 푸른 빛 에워싸고, 성근 기둥
빈 난간은 청풍이 씻어주네. 어여쁘다 인(人)과 경(境)이 다 새로운
곳, 옛 사람 이어받아 지은 글귀 서툴기도 하네.”
_
금계 황준량이 황폐된 비벽정(斐碧亭)을 헐고 그 자리에 죽각(竹
閣)을 세운 후 퇴계 이황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직접 찾아와 황준량
으로 하여금 부정에 대한 경계를 하며 지어준 시이다.
갑자기 추워지면서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 찾은 성환산 밑 신
녕초등학교 뒤쪽 운동장 옆에 자리 잡은 6각의 정자 환벽정은 앞으
로 가천천 맑은 물이 흐르는 겹처마 익공집 육모지붕이다.
1516년(중종 11) 현감 이고가 북악 죽전 아래에 비벽정을 지어 자
기 호로 삼았고 그의 아들 이세남은 회재 이언적과 이 정자에서 노
닐면서 시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환벽정은 임진왜란으로 비벽정이
소실되자 1611년(광해군 3) 현감 송이창이 그 자리에 정자를 중건한
것이다.
송이창의 아들 동춘 송준길이 기문에 말하기를“만력 신해(1611)에
아버님께서 화산현(지금의 신녕) 현감이 되셨는데, 내 나이 겨우 6,
7세로 따라왔던 것이다. 그 때 내가 사리에 밝지 못할 때지만 지금도
객관 서쪽 조그만 정자가 생각난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바위 곁에
집을 세워 시냇물이 졸졸 뜰을 따라 흐르니 그윽하고 한적한데다가
깨끗하여 마치 인간세계가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이 이른바 환벽정인
것이다”하고 당시의 정자경치를 소개하고 있다.
비벽정 때는 회재 이언적이, 죽각 때는 퇴계 이황이, 환벽정 때는
동춘 송준길이 각각 시를 읊으며 경치를 감상한 소중한 이 정자는
1890년(고종 27) 민영후 현감과 1980년 오헌덕 군수가 중건해 지금
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환벽정 _
정자 뒤편의 성환산은 둥근
고리모양을 한 성터로서 외침
시 고을을 사수한 전적지이다.
신녕지구전승비는 한국전쟁
때 국군 제2군단과 인민군 제
2군단의 피아간 병력 2만5천
여 명이 벌인 치열한 전투에서
제6사단을 주축으로 한 아군
의 용전혈투 끝에 인민군을 북
으로 퇴각시켜 총반격의 계기를 만든 최대격전지 중의 하나였다.
이곳 신녕 전투에서 불멸의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한 영령들
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58년 10월 30일 육군 제1205공병단에
의해 높이 7m, 폭과 두께 62㎝ 크기로 세워진 비이다.
성환산은 경북고시 제94호(75. 5. 17)에 의거, 도시계획시설(공원)
로 결정 고시되었고 1986년에는 성환산 내에 마을 숲을 가꾸어 녹지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1998년에는 주민들의 체력증진을 위해 14종
의 체육시설을 설치했고 1999년에는 건강한 고장 만들기 사업의 일
환으로 사업비 2억 원을 들여 새로이 단장하여 공원으로서의 면모
를 갖추었다.
이곳에는 권규섭, 김수곡, 김준운, 한상택, 권태용 애국지사 추모
비가 건립되어 공원을 찾는 이들에게 호국애를 심어주고 있다. 전승
비에서 내려다보이는 신녕향교의 초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51년(명
종 6) 황준량 현감이 재임 시 중수했다고 하며 화산 밑 명천(鳴泉)위에
있었다고 한다.
_
환벽정 _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5년(광해군 7) 현 향교 뒤편에 중
건했다가 1686년(숙종 12) 현재위치로 이건했다고 전한다. 대성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02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 맞배지
붕 기와집으로 동서무가 없으며 동방명현 27위를 배향하고 있고 강
학공간인 명륜당(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8호)은 비교적 규모가 크
고 견실하며 지붕의 형태는 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팔작지붕
으로 되어 있다.
신녕향교에는 영천향교와 달리 동서무가 없어 우리나라의 18위 유
현들도 모두 대성전에 모셨고 동종향(東從享)에 주돈이 정이 양선생
과 서종향(西從享)에 정호 주희 양선생을 모셨으며 사마소가 없다.
신녕면사무소 입구 양쪽에는 신녕현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역대
현감과 관찰들의 선정비 32기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33. 반가형식 갖춘 만취당 사대부 생활모습‘물씬’
- 금호 오계
마을 뒤 수고 12m, 나무둘레 1.1m인 280본 소나무 위용
금호에서 대창으로 가다 고속도로 조금 못 미친 왼쪽마을인 오계
리로 들어가다 보면 오계1리 쉼터옆에 산림유전자원보호림(천연보
호림)으로 지정(96. 4. 10)된 수고 4~16m, 수령 30~200년된 소나
무외 4종의 나무가 나타난다.
이곳과 같은 날짜에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된 뒤쪽의 오계
숲은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1732~1800)이 만취당을 건
립한 뒤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데 수고 12m, 나무둘레 1.1m인 180년
된 280본의 소나무가 1.31㏊의 면적에 그 위용을 과시하며 줄지어
서있다.
새소리, 맑은 바람소리와 함께 이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는 개 짖
는 소리를 들으면서 상추와 무, 열무 등이 심긴 텃밭을 바라보며 소
_
나무 숲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만취당 초입에 자리 잡은 유형문화
재 제333호(01. 11. 1) 금산당이 자리잡고 있다.
금산당은 능참봉 조병문이 둘째아들의 살림집으로 건립했다고 하
는데 건물의 배치는‘ㄱ’자형 평면의 사랑채가 전면에 남향으로 자
리하고 뒤쪽에‘ㅡ’자형 안채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초건 당시에
는 안채 전면 좌측에 3칸 집이 자리하여 전체적으로 트인‘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었으며, 안채 우측 쪽으로 협문을 두어 만취당으로
직접 연결했으나 만취당 보수 시 협문을 없앴다.
현재 출입부에 대문채가 있었고 사랑 좌측 편에 고방 및 방앗간채
가 자리하였다 한다. 그리고 고방채 앞쪽으로 마구 및 초당방이 있
어 반가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2동만 자리하
고 있다.
금호 오계 _
중요민속자료 제175호(84. 1. 10)인 만취당(晩翠堂)은 지산 조호익
의 7세손인 조학신이 젊은 시절 송림조성과 함께 지은 살림집으로
앞쪽의 광명헌(光明軒)과 후방에 배치된 별묘(別廟) 및 보본재(報本
齋)는 후대에 추가로 건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조학신은 치재 선적의 아들로 태어남에 도량과 사람됨이 뛰어났고
1759년 영조의 부름에 나아가 칼 쓰는 시합을 보였더니 왕이 장하다
고 크게 칭찬하여 사복(司僕) 내승(內乘)으로 임명했다. 내직으로는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았고, 밖으로는 여러 고을의 목사(牧使)를 지
냈다.
그가 백성을 다스림에 정성을 다하니 정조가 높이 칭찬하여 규장
각지(奎章閣誌)와 대전통편(大典通偏) 등 각각 1부와 말 한 필을 하
사했고 세상을 하직하매 왕으로부터 부조와 제문이 내려졌다.
이 집은 야산의 송림이 낮게 둘러싼 평지마을의 중심부에 넓게 자
리 잡았으며 길 쪽의 새 사랑채와 행랑채의 솟을대문 지붕사이로 사
랑채와 안채의 지붕마루가 조금씩 보이는 평면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만취당을 한번 올려다보면 담장과 솟을
대문 지붕사이로 살림채의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솟을대문, 평대
문, 월광문, 정려문과 사립문까지.
행랑채를 넓은 사랑마당을 통하여 멀리 떨어지게 배치한 사랑채는
안채와 튼‘ㅁ’자를 이루었고 오른편에 사당이 위치했으며 그 뒤쪽
에 체천위[ 遞遷位, 봉사손의 대가 끊긴 신주를 최장방(最長旁)의 집
으로 옮겨서 제사 지내는 것 ]를 모신 별묘와 보본재 등이 자리 잡고
_
있어서 사대부 저택의 면모를 갖추었다.
안채는‘ㅁ’자형으로 남향했으며 그 중앙부 4칸 중 오른쪽 2칸은
툇마루의 뒤쪽에 안방을 통칸으로 구성했다. 중앙부 4칸의 양끝에
서는 마당을 에워싸듯이 동향, 서향한 양익(겱翼)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 대칭을 이루었는데 안방 쪽에는 부엌 3칸과 고방 2칸을 설치했
고 대청 쪽에는 모서리에 작은방 1칸을 두고 그 앞쪽으로 아랫방과
마루방 등을 같은 크기인 5칸 크기로 배설했다.
만취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큰 사랑채는 현주인인 조익현씨의 할아
버지 조석환씨가 한말 독립군의 군자금 헌납사건으로 일제관헌에
의해 재해를 당한 것을 중수한 것이다. 정면 5칸인데 그중 왼쪽 2칸
은 사랑방으로 앞쪽에 툇마루를 꾸몄으며 오른쪽 2칸에는 앞이 트
인 대청을 드렸다.
금호 오계 _
그리고 오른쪽 끝 1칸은 앞뒷면에 툇마루를 시설한 재방(齋房)으로
꾸몄으며 재방의 뒷벽에는 두 짝 여닫이 살문을 달아 뒤쪽의 사당과
밀접하게 연결되도록 했다. 설날과 추석의 경우에는 사당에서 재를 지
내고 일반제사의 경우에는 재방에 신주를 모셔 와서 지낸다고 한다.
사랑채의 왼쪽으로는 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간 및
2칸의 중 사랑방과 마루 1칸이‘一’자로 배열된 중 사랑채가 있다.
안채의 구조는 잡석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방형(方形)초석을 놓
아 네모기둥을 세웠고, 대창상부는 3량(三樑)으로 구름 위에 달이 떠
있는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판대공을 세워서 마루도리와 장
여를 받고 있다.
_
사랑채는 마루 주위에는 두리기둥(圓柱)을, 방에는 네모기둥(方柱)
을 세웠고 대청의 상부가구는 5량으로 초각(草刻)한 판대공을 사용
했다. 두리기둥을 둥근 주춧돌이 받치고 있는 모습은 이질적으로 느
껴질 수도 있는 나무와 돌의 개념을 깨고 있다.
두리기둥의 다른 부분과 달리 둥근 주춧돌과 접한 부분은 하얗게
탈색되어 있는데, 이것은 나무가 썩지 않도록 하기위해 돌 밑에 소
금을 넣었기 때문이다. 길가에서 느껴지는 장중함과 사랑채 뒤쪽으
로 접근하면서 경사지를 적극 이용한 동선을 만나게 된다.
대문채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 집은 조선후기의 주택으로 방앗간
채는 철거되었으나 정침(正寢)을 비롯하여 사랑채, 새 사랑채, 별묘
재사인 보본재, 전국에서 유일하다는 체천위별묘에 이르기까지 사
대부 주택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서 당시의 건축양식과 주
생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오계리에는 만취당과 금산당 이외에도 을사사화 때 부당한 정사를
충간하여 반대파의 무고로 장살(杖殺)당한 경재 곽순을 추모하기 위
해 후손들이 지은 사당인 경재사당(警齋祠堂)과 고려 우왕 때 문과
에 급제하여 회천군수로 봉직했고 조선조에 강계도 좌익병마사로
제수되었으나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로 영천으로 은둔한
조신충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재사인 사효재(思孝
齋), 그리고 창녕 조씨들이 후손들의 학업을 위해 세운 서당인 함양
재 등이 남아 있다.
금호 오계 _
34. 고천 10의사 충의 아직도 귓가에‘쟁쟁’
- 임고 고천
“원수 눈앞에 두고 죽더라도 물러설 수 없다”
“충성에 분발하여 적개심을 불태워 생명을 버리고 의로운 길에 나
아갔도다. 십현의 사적이 같이 전해옴에 함께 제사지내나니”
대산 이상정이 지은 고천서원 상향축문으로 충성과 의리를 생명보
다 더 귀하게 여겨 귀중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10의사의 장렬
한 순국사적과 충렬정신을 추모한 글이다.
임고면 소재지에서 수성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임고중학교에서 다
시 우회전해서 죽 들어가니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고천리 경로당
이 나왔다. 10여 년 전에 한번 찾은 적이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거려
_
어르신들께 서원 가는 길과 부래산에 대해서 안내를 받았다.
고천리 경로당에서 바라본 부래산(浮걐山)은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산이라기보다는 언덕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해 7월, 붕어같이 생긴 작은 산이 운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
었는데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이 산이
홍수에 떠내려 왔다고 한다.
지난 7월부터 11월까지 영천시에서 옛 임고면 우항리 부래산에 있는
옛 임고서원 부지에 팔각정과 표지석, 잔디밭, 쉼터 등을 설치했다.
동쪽 기슭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배향한 임고서원 터가 남아 있
는데 명종 8년(1533)에 노수, 김응생, 정윤량, 정거 등이 합세하여
서원을 짓고 사액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5년
(1602) 양항리로 옮겨지었다. 고천리는 동쪽과 남쪽은 고경면과 경
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양항리와 접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6백여년 전인 고려 말에 형성되었다고 전하는데
북쪽으로는 운주산 골짜기의 맑은 물이 흘러 고천이라는 지명이 생
겼다고 한다. 현재 74세대 180여 주민들이 대부분 농사일을 하며 마
을을 지키고 있다.
고천서원(향토문화재 9-15-1)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에 대
한 적개심을 참을 수 없어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의진
에 나아가 경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생을 마감한 10의사를 배향한 곳
으로 소곡 김대해, 노항 김연, 만정 최인제, 충효재 정석남, 쌍계 이
영근, 사촌 이지암, 남전 이일장, 추계 이득룡, 대재 이득린, 남계 손
임고 고천 _
응현으로 세칭 고천 10
현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3) 조선
을 침략한 왜군들이 부
산을 함락하고 북진하
여 나라의 장래가 위급
하게 되었을 때 곳곳에
서 국가를 수호하기 위
한 의사들이 일어나 뭉
쳐서 창대 정대임의 진
에 나아가니 이때 뜻을 같이한 선비가 60여명이었고 이에 호응하여
모여든 장정이 900여명이었다.
대오를 갖추고 의병의 깃발을 높이 세워 일사보국을 맹세하며 5월
초에 대동(大洞)에서 적을 파하고 7월초에 당지산(영천~금호간의
산)에 잠복했다가 신녕, 북습, 와촌으로부터 영천으로 돌아오는 왜
병 20명을 사살하고 40명을 참수했다.
또 7월 14일 박연에서 신녕, 의흥 의진과 합세하여 왜적을 대파하
고 27일 신녕, 하양, 의흥, 경산, 자인, 경주 의진 및 관군과 합세하
여 영천성 중에 둔거한 적 대병을 무찔러 섬멸하니 임진왜란 중 성
수복은 가장 먼저요 육전에서는 가장 큰 승리였다.
적의 세력이 남북으로 분산되어 반격전의 기틀을 닦게 되자 경주
성을 회복하기로 의논하고 8월 21일 서문을 돌파하고 시가지까지
진격했으나 서천 숲속에 숨어있던 적군에게 기습을 당해 관군의 대
_
오가 흐트러지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전멸을 당할 위기에 몰렸다.
이에 격분한 의사들은“원수를 눈앞에 두고 싸우다 죽을지언정 물
러설 수는 없다”며 휘하의 병사들을 득책하여 일심동체 결사보국을
맹세하고 온종일 치열한 전투를 치르니 피아의 사상자로 서천내를
막았고 피는 바다를 이루었다. 아군의 응원병이 끊기고 고립된 의사
진은 적의 집중공격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중과부적으로 전원이 장
렬히 전사했다.
이날의 전사자가 2천명이 넘었다고 전하는데 금산 700의사들의
전투보다도 한결 더 치열한 항전이었다. 이들의 결사항전으로 동북
쪽으로 후퇴했던 아군이 군사를 재정돈하여 다음날 경주판관 박의
장과 합세, 결국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숭고한 정신과 장렬한 죽음은 왜인들까지도 기리게 되었고
후에 의사들의 충절에 대해 초유사 학봉 김성일과 관찰사 인재 최현
의 장계로 증직의 포전과 글을 남겨 후세에 전하고 있다.
1705년(숙종 31) 건립된 고천서원은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
폐되었다가 1908년 향내 유림들이 복원했다. 경내에는 강당 4칸을
비롯하여 묘당, 신문, 삼문 등 4동의 건물이 있고 입구에 10의사기
적비가 그들을 기리고 있다.
사당인 순국사(殉國祠) 우측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고천 10의사
들의 대쪽 같은 절개가 느껴지게 했고 관리소홀로 방치된 많은 서원
들처럼 이곳에서도 관리사 마당에 덩그러니 버려진 냉장고에 눈살
이 찌푸려졌다.
임고 고천 _
35. 산새 울음 따라 불경소리 들리는 조용한 산사
이건전설 남아있는 봉림사 석가모니후불탱 문화재 지정
화북면 자천리의 학가산에 자리 잡고 있는 봉림사(鳳林寺)는 대한
불교조계종 소속 사찰로 조계종 제10교구의 본사인 팔공산 은해사
의 말사이다.
조선 영조 18년인 1742년에 징월(澄月)이 세운 비교적 역사가 짧
은 절로 징월은 인근 보현산의 법화사를 옮겨서 이곳에 절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법화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했다는 전설
이 있는 오래된 사찰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징월이 절을 창립한 18세기 중반의 건물로 추정되는 대웅전은 앞
면과 옆면이 모두 3칸인 맞배지붕 형식의 건물이며 조선 철종 때 중
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 외에 산신각과 요사채가 남
아 있고, 대웅전의 불화 석가모니후불탱은 경상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위쪽으로 다져놓은 건물터가 머지않아 이 절에 중창불사가
_
이뤄져 옛 영화를 되찾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은 영천에 전하고 있는 봉림사 이건에 관한 전설이다.
봉림사 _
_
봉림사 _
_
그 후 보현사를 폐찰하고 그 곳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다 옮겨지
은 것이 바로 봉림사라 불리는 절인데 이것이 약 500여 년 전의 일
로 추측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림
사를 찾는 신도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스님들 역시 그 사실을
잊은 듯 수풀 속에서 노니는 산새의 울음을 벗 삼고 물 흐르는 소리
를 따라 조용히 불경만이 흐르고 있다.
봉림사 _
36. 1백년 신앙요람지 자천교회 지방문화재 지정
- 화북 자천
예로부터 영천에서 살기 좋은 세 곳 중 으뜸으로 꼽혀
예로부터 영천에서 살기 좋은 세 곳‘일 자천, 이 환고, 삼 평호’
중 으뜸으로 꼽혔던 화북면 소재지인 자천은 보현산맥의 지맥이 서
쪽으로 뻗어 마을의 뒤를 막아주고 있고 기룡산맥의 지맥이 마을의
앞을 막아 서쪽으로 뻗어있으며 정각리 보현산에서 발원한 횡계천
과 노고령에서 발원한 고현천이 옥계에서 합류하여 마을 앞을 가로
질러 흐르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내가 乙자형으로 흐른다 하여 자을천(慈乙川) 또는
잘내로 부르다가 乙자가 빠지게 되어 자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천3리 동네 안쪽에 위치한 자천교회를 만나는 순간 언젠가 시골
을 배경으로 남녀 고교생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고풍스런 건물에 높이 솟아있는 종탑과
_
‘一자형’단층의 기와지붕으로 된 예배당 내부의 나무로 만든 천장
과 기둥들이 인상적이었다.
예배당 중앙의 네 개 기둥은 두 가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一자형’교회를 지을 때 내부공간을 더 넓게 쓰기 위한 방편
으로, 또 다른 하나는 구한말의 사회상을 잘 드러내어주는 남녀칠세
부동석의 시대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기둥을 이용하여 중간에 칸막이를 함으로써 예배를 드릴 때 남자
와 여자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했고 기둥 외에도 예배당 안에
들어갈 때 남녀가 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문을 구분한 것
에서도 1백년 동안 보존되어 온 자천교회가 유교적 사고 위에 세워
졌음을 엿볼 수 있다.
자천교회 _
그러나 1948년경 교회가 부흥하면서 좌우의 남녀 구분하는 문을
없애고 예배당 뒤편에 출입문을 새로 만들었다. 예전 문에는‘예배
당’이라 쓰여진 현판을 걸었다. 예배당 내부의 특징이 중앙에 서있
는 네 개의 기둥이라면 외부의 특징은 우진각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지붕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우진각 지붕은 건물 사면에 지붕면이 있어 귀마루(내림마루)가 용
마루에서 만나게 되는 형태이다. 이는 일자형 평면의 지붕 형태로
초가지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추녀가 네 귀에 구성된 처마
에 의해 구조되며 지붕 좌우에 합각이 없는 형태이다.
이 지붕의 구성을 위해서는 앞뒤에 장·단연(長短椽) 설치와 함께
측면에서 종도리까지 높이로 서까래를 치받아 설치한다. 거기에 쓰
이는 특별한 서까래의 긴 몸을 지붕 각도에 따라 휘어 깎아 쓰는 데
에서 우진각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6·25와 관련하여 넓고 평평한 우진각 지붕위에 얽힌 이야기가 있
다. 미군 비행기의 공중폭격이 심해지자 성도들이 지붕에 올라가 흰
횟가루로‘CHURCH (교회)’라고 영어로 표시하여 폭격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1903년 4월에 창립되어 올해로 106년째를 맞은 자천교회는 2004
년 1월 15일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 452호로 지정받았다. 경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
중 장로는 노귀재에서 안의와(James. E. Adams) 선교사를 만나 예
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고 자천리에 작은 초가삼간을 구입, 그곳
에 머물며 성경말씀을 배웠다. 권헌중은 자신의 초가집에서 낮에는
_
한문을 가르치
고 저녁에는 함
께 성경공부를
했다.
초가집으로 시
작된 당시 교인
은 서당에 다니
던 문동과 권헌
중을 따라온 노
비와 머슴들이 전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권
헌중은 당시 나라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신이 먼저 상투
를 잘랐을 만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개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
유의 몸으로 풀어주었다. 복음에 대한 권헌중의 열심에 안의와 선교
사도 신이나 대구에서 자천까지 열악한 도로상황에도 불구하고 자
주 방문하여 성경에 관해 토론하며 확실한 교인들로 만들어 나갔다.
신자가 늘어나면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졌고 권헌중은 주재소
(지금의 지서)와 신촌면사무소를 건축해주는 조건으로 새로운 교회
를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지역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경제적 부담을 안고 우여곡절 끝에 교회를 헌당하게 되었다.
암울했던 일제치하와 유교적 토양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
성된 자천교회는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투박한 시
골의 성도들과 1백년 신앙 요람지를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자천교회 _
_
자천교회는 당시 건축한 예배당이 협소하여 1950년 강단 뒷부분
(170㎝, 290㎝)을 벽만 허물고 증축하여 강단으로 사용하다가 지금
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1980년 현관 출입문(260㎝, 860㎝)을
시멘트 블록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증축했다. 그러나 벽만 허물었을
뿐 원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므로 벽 부분만 복원하면 원형 그대
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동노회 영천시찰에 소속된 자천교회는 소규모
시골교회이지만 한 세기 전 순수한 열정으로 교회를 설립했던 당시 신
앙인들의‘십자가를 등에 지고, 태극기를 손에 들고’의신앙즉, 예수사
랑과 이웃사랑, 하나님 사랑과 민족사랑을 실천한 정신을 이어받아 노
인들의 사회교육 및 여가지도, 결연, 가정봉사원 파견, 식사 및 목욕 서
비스, 이·미용 봉사, 물리치료실 운영과 주민들에 대한 사회교육, 편
의시설 제공, 청소년교육 등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교회 인근에는 오동리까지 숲의 길이가 5리(2㎞)나 되기에 오리장림
으로 불리는 자천숲(천연기념물 제404호)이 있어 10여종이 넘는 나무
들이 분재박물관을 연상시킨다.
숲을 이루는 수종은 12종 282본이고 수령은 20~350년으로 추정되
며 수고 6~24m, 수관 폭은 8~28m로 노거목들이 많다. 또 오리장림에
서 산쪽으로 3㎞ 정도 들어가면 약 1200년 전에 법화리 보현산 중턱에
자리 잡았다가 1742년(영조 18) 옮겨온 천년고찰 봉림사가 나온다. 잠
시 속세를 떠난 여유로움을 맛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천자천조천조양교양각회각 __
대창 대재·신광
기룡산 묘각사
임고 우항
화북 오동·오산·공덕
청통 보성·신덕
37. 청백리 조치후 나라에서 옥비 하사
- 대창 대재·신광
‘관서부자’칭송 조호익 종택인 지산고택 신광리에 남아
조선 성종 때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에 녹선된 조치우
(1459~1529)가 공부하는 후세사람들에게 남긴 시이다.
채약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일지맥이 연이어져 마을 동편으로 병풍
처럼 가리고 있고 북쪽은 구릉야산이 전개되어 금호강의 강변까지 봉
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넓은 들과 편리한 교통을 자랑하는 대창면 대
_
재리. 대창면사무소를 지나 북안 쪽으로 가다가 조곡교를 건너 좌회
전하여 약남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대재리가 나온다.
마을 반대편 길로 들어서 대재못을 조금 지나면 문화재자료 제140
호로 지정된 유후재(遺厚齋)와 옥비(玉碑)가 나온다. 복숭아가 주 소
득원으로 밴마아 또는 배마실로도 불리는 대재리에는 63세대 163명
(남 76, 여 87)의 주민들이 한 가족처럼 오순도순 살아가는데 김해
허씨와 밀양박씨가 주성이다.
- 송청서당 당장
대창 대재·신광 _
후손들에 의해 유후재와 옥비, 그리고 이 일대 송청산(松淸山)이
성역화로 보호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치우의 재사인 유후재
는 좌측에 두 칸, 우측에 한 칸의 방과 사이에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앞쪽으로 쪽마루를 둔 팔작지붕 건물이며 지난 1993년 목재의 부식
이 심하고 곳곳에 물이 새 보수공사를 했다.
대구부사 재직 때 선정으로 하사받은 옥비는 원래 두 좌였는데 이
곳 옥비각에 한 좌가, 또 한 좌는 부인 창원박씨의 묘소가 있는 경남
창원의 청룡산(靑龍山) 아래 모원재(慕遠齋) 내의 옥비각에 보관되
어 있다.
옥비각은 정·측면 모두 1칸의 맞배지붕인 익공계 건물로 내사옥
비각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옥비의 귀부는 77(길이) 64(너비)
32(높이)㎝, 이수는 51(너비) 46(높이)㎝, 비신은 94(높이) 34(너비)
15(두께)㎝이다.
자가 순경(舜卿), 본관이 창녕인 조치우는 고려말엽 좌정승 하성부
원군 조익청의 후손으로 고조는 조신충(강계도 좌익병마사), 증조는
조상명(덕원부사), 조부는 조경무(사직), 아버지는 조말손(영암군수)
이다.
조치후는 1459년(세조 5) 영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
아하고 자라남에 따라 효행이 지극하여 향내에 소문나더니 1494년
(성종 25) 사마시와 별시문과에 합격, 예문관 한림으로 벼슬길에 올
_
랐다. 1498년(연산군 4)
에는 정언,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
러나 연산군의 학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
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나라의 질서가 바로잡히
자 사헌부 장령, 내섬시
정, 예천군수 등을 거쳤
다. 대구부사로 있을 때
청백리로 뽑혔고 뒤에 주
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또 효행이 지극하다는 소문을 들은 임금이 옥비 두 좌와 소학(小
學)을 하사했다.
그 후 사옹원정이란 벼슬을 지냈으나 55세 때인 1513년(중종 8) 늙
으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
와 극진히 어머니를 섬겼으나 1529년 세상을 뜨고 다음해 자신 또한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조치우의 피를 이어받은 증손 5형제가 이름을 떨쳤는데 조광익은
대창 대재·신광 _
효자로 정려가 세워졌고 조희익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영천복성
전투에서 맹활약했으며 조호익은 도덕과 문장이 훌륭하여 관서부자
로 칭송을 받았다.
북안 쪽으로 가다가 영지사 방면으로 조금 들어가면 신광리가 나
오는데 이 마을에는 선조 때 문신인 지산 조호익(1545~1609)의 종
택인 지산고택(문화재자료 제99호)이 자리 잡고 있다.
대문간채와 중간채, 행랑채 등은 도괴되었고 지금은 사랑채와 안
채 그리고 사당만 남아있다. 그나마 비닐하우스와 농기계가 마당에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운 마
음이 들었다.
_
조호익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연구, 문과에 급제했고
무고로 귀향 간 강동에서 후진을 잘 양성하여 관서부자라는 칭호가
특사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을 규합하여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받
았다. 그 후 성주, 성천, 정주 등의 목사를 역임했으며 1597년 정유
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뒤에 선산부사에 임
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지산집, 가례고증, 주역
석해 등이 있다. 용호리에 그의 신도비와 하마비가 있으며 새로 복
원된 도잠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대창 대재·신광 _
38. 천년고찰 묘각사 올라 자연과 동화 - 자양 용화
무난한 등산코스, 동해용왕과 의상대사 설화 간직
마을이 생긴지 600년 만에 처음으로 시내버스가 들어온 2008년
11월 7일 자양면 용화리는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원래 기룡산 자락의 작은 계곡마다 형성된 화전민촌을 포함해 107
가구가 살던 제법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화전민들이 모두 떠나고
29가구 70여명이 벼농사와 고추, 콩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기룡산(騎龍山) 묘각사(妙覺寺)는 약 1천3백여년 전인 신라 선덕여
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도량으로 요사채는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일반가옥형태인 ㄷ자형 양식을 따랐으며 입구가 부처님 어간(정중
앙)을 비켜간 것이 특이하다.
임진왜란으로 사찰전모가 소실되었으나 1644년 현재의 요사채를
_
창건했다. 또 영조 36년(1706)에 삼성각을 중창했으며 1889년 다시
법당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산의 이름이 기룡산이 된 것은 묘각사를 창건할 당시 동해용왕이
의상대사에게 그 법을 청하고자 말처럼 달려왔다는 데서 유래된 것
으로 전하는데 날듯이 비상하여 달려온 용왕은 대사에게 곧바로 법
을 설해 줄 것을 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사가 법성계 일구를 설하자 홀연히 묘한 깨달음을 얻은 용
왕은 곧바로 승천하여 감로의 비를 뿌렸는데 이는 당시 관내의 오랜
가뭄을 해소하는 단비가 되었음은 물론 기근과 가뭄으로 피폐한 민
심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의상대사는 이를 기리기 위해 사찰의 이름을 묘한 깨달음을 얻었
자양 용화 _
다 하여 묘각사라 지었고 후대에 와서 이곳에서 용왕제와 기우제를
자주 지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좌보처 관음보살과 우보처 지장보살
의 삼존불로 모시는 극락전의 형식으로 현재는 아미타불과 지장보
살만 모시고 있다. 극락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꾸며놓은 전각으
로 이 세계의 주재자이신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어 아미타전이나 무
량수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이곳은 문헌이나 지명에서 느낄 수 있듯이 불보성지였음을
알 수 있는데 뒷산이 보현산이고 마을입구로부터 용화, 삼매, 덕연,
선원, 원각, 공덕, 정각 등 수많은 지명이 마치 화장세계 불국정토를
표현한 듯하다. 이렇듯 10만억 국토를 지닌 서방정토가 이곳 기룡산
에 유연찰토를 정하며 바로 이 사바에 시현되어 있는 것이다.
자양면 용화리는 해발 960m인 기룡산에 발한 여러 산맥 중 특히
정남으로 뻗은 지맥이 갑자기 낮아져 좁은 협곡을 형성하고 역시 이
산에서 발한 계천과 서편 시루봉에서 발한 계천이 이 마을 위에서 합
수되어 마을 중앙을 흐르고 있어 계곡 좌우에는 기압절벽이 절경을
이루며 마을에서 조금 남으로 내려가면 영천댐의 물이 넘실거린다.
큰 마을, 건너마을, 아린머리, 운태골 등이 있으며 본동은 가장 큰
마을로서 큰 마을 또는 큰 마실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훌륭한 인
재가 많이 났는데 일본인들이 산의 맥을 잘랐더니 용이 승천했다고
한다.
마을 초입에 자리 잡은 야옹정(野翁亭)은 예조정랑을 거쳐 평안도
_
도사 겸 춘추관 기주관을 지내고 상주 창암서원에 배향된 이영갑
(1622~1677)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로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좌우 뒤쪽에 각 1칸씩 방을 두고 전체를 대
청으로 설치했으며 앞쪽에 쪽마루와 헌함을 설치했다.
용화리에서 묘각사까지는 4.5km 정도로 시멘트 표장이 완료되어
자동차로도 쉽게 진입이 가능하고 경사가 그다지 심하지 않아 1시간
정도의 가벼운 등산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묘각사에서 용화리로 이
어지는 이 계곡을 묘각골이라 부르는데 반야교를 지나 걸어 들어가
니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는 물을 보호하기 위해 철조망이 군데군
데 쳐져있었고 며칠 전 내린 큰 눈으로 인해 계곡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다.
배수로가 낙엽에 막혀 집중호우 때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닐까? 라
자양 용화 _
는 생각이 들었다. 골짜기 옆으로 수려한 산세를 감상하고 시원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쉬엄쉬엄 걷다보면 규모는 별로 크지 않지만 역
사가 깊은 묘각사가 나온다.
천년고찰 묘각사에는 평소에는 찾는 이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
지만 빽빽한 산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면 가슴이 후련해진다. 오룡수
(悟龍水) 한잔을 들이키고 경내를 둘러보면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숨을 고른 후 산을 내려와도 별로 아쉬울 것이 없다. 신선
한 공기를 마시며 자연에 동화되어 심신의 활력을 찾았으니까.
산행이 좀더 하고 싶으면 기룡산으로 올라가 꼬깔산, 구 자양초등
학교교를 거쳐 용화리로 돌아올 수도 있다. 기룡산에서 능선을 따라
호젓한 산행을 즐기며 영천댐을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묘각사에서 기룡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절을 중심으로 좌우로 열려
있다. 주차장 오른쪽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능선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는 길은 길이는 짧지만 많이 힘든 코스이고 주차장 왼쪽
텃밭이 있는 사면을 타고 산허리를 휘어 돌아 지릉에 붙은 후 시루
봉 갈림길과 암릉길을 통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2.5km 정도로 1
시간 30분쯤 걸린다.
정상은 암봉으로 되어있고 표석도 세워져있다. 북사면 급경사 아
래로 보현리가 내려다보이고 건너편에 보현산천문대와 면봉산, 베
틀봉이 하얗게 건너다보인다. 남동쪽으로는 저 멀리 승마자연휴양
림이 조성된 운주산이 자리하고 있다.
꼬깔산을 거쳐 성곡리 방향으로 하산길을 택하게 되면 오천정씨들
_
의 문중무덤인 천하명당 하절, 댐이 건설되면서 한 곳으로 모은 강
호정과 하천재, 삼휴정, 사의당에서 선조들의 자취를 되새겨보는 재
미도 맛볼 수 있다.
자양 용화 _
39. 포은선생 태생지 충효 깃든 유적 많아
- 임고 우항
효자리비, 우고서사, 석연정, 모우정 등 풍수와 조화
임고면 우항리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태생지로 청백리로 이름난
청풍당(淸風堂) 박영손(朴英孫)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해온 마을이
다. 금호-고경 간 우회도로가 개통되면서 마을위로 지나가는 자동
차로 인해 마을이 한층 개방된 느낌이 들었다.
우항리는 동쪽과 남쪽으로는 고경면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고천리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자호천과 운주산 골짜기의 냇물이 합
쳐지는 곳이다. 울목〔鳴項〕이라는 지명도 두 내〔川〕가 합쳐지는 곳
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굽들〔曲坪〕은 지형이 굽은 활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옛날에
_
는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연하(곝河)는 일명 연화(곝
花)라고도 불리는데 동네 앞 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생긴 이름이다.
이 마을은 조선 세조 때 사간원 헌납 등 내직을 두루 거치고 황해
도 풍천군수로 재직시에 지방정사를 살피고 돌아온 암행어사의 보
고에‘청렴고결하고 빙옥처럼 맑다’고 하여 왕으로부터 청풍당이란
호를 하사받은 박영손(1442~1486)의 자손들이 세거해온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 편에 우고서사가 나온다. 우고서사는
박영손을 추모하기 위해 향인들이 건립한 사원으로 사호청풍당박선
생유허비(賜號淸風堂朴先生遺墟碑)가 우뚝 서있으며 유인문(由仁
門)을 지나면 위패를 봉안한 전면 3칸, 측면 2칸의 웅장한 상청사(尙
淸祠)가 나온다. 서원 경내 앞쪽 선생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인 청풍
당이 있다.
1422년(세종 4) 연기현감 순조(順祖)의 아들로 태어난 박영손은
39세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했다. 그 다음해 봄에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했고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헌납을 역임했다.
성종 1년(1470) 4월 삼공육경(三公괯卿)들에게 명하여 특별히 시강
문학을 할 수 있는 선비들을 선출하라 했는데 10여 명 중에 선출되
어 일을 훌륭하게 수행, 홍문관 교리로 옮겨갔다.
당시 점필재 김종직과 함께 교대로 왕이 거처하는 곳을 맡아 보았
는데 두 사람 모두 뜻이 같고 의리가 서로 통해 왕에게 올리는 글이
나 책을 편찬하는 일을 잘 처리했고 음흉한 소인배들의 질투로 결국
외직인 황해도 풍천군수로 내몰리게 되었으나 백성들을 잘 보살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임고 우항 _
마침 암행어사가 내려와 풍천군수의 정사를 잘 살펴보고 왕께 보
고하기를“청렴하고 밝고 깨끗하고 맑아서 얼음과 옥에 흠이 없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곫明淸潔氷玉無瑕〕”라고 아뢰니 왕이 그것을 아
름답게 생각하여 청풍당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이때 성한(成翰)이
시를 지어 축하했다.
“달존이 세상에 많다고 하나 헤아려보니 현후(어진 군수)가 홀로
우뚝하구나. 조정에서 군명을 올바르게 기록하니 간사한 무리가 굴
복하고 외읍을 다스림에 임금의 근심 나누었네. 훌륭한 정사는 촉나
라 문옹을 보는 것 같고 대임을 처리함은 온나라 전설 같아. 청풍이
란 아름다운 호를 내리시니 천만년 임금의 은혜임은 그대 같으리.”
나이가 많고 쇄병하여 벼슬을 사절하고 우항에 물러나와 수석(水
石)이 좋은 곳을 가려서 집을 짓고 책을 보는데 낙을 부쳐서 세월을
보내다가 그가 왕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시종이 한결같아 때
때로 벗과 함께 지은 시편에 나타나 있고 정성을 다해 가르치니 고
을의 수재들이 글을 배우려고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1486년(성종
17) 봄에 65세로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도승지로 증직했다.
우고서사 건너편의 석연정(石淵亭)은 숙종 때 성균관 학정에 재직
중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자연과 어울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
을 양성하며 청아하고 고결한 인품으로 주위의 추앙을 받았던 석연
박성세(朴聖世, 1652~1705)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정자로
연못과 잘 어우러져 있다.
마을 안쪽 들판에는 포은 정몽주 유허비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_
제272호)이 있다. 화강암으
로 되어있는 비 중앙에는
효자리(孝子里)라는 세 글
자가 새겨져 잇고 우측에는
공신찬성사대제학정몽주익
양군경오봉충의군(功臣贊
成事大提學鄭夢周益陽君庚
午封忠義君)이, 좌측에는
홍무기사삼월영천군수정유입비(洪武己巳三月永川郡守鄭宥굤碑)라
고 새겨져 있다.
홍무 원년이면 1389년 공양왕 원년에 해당되며 당시 포은선생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대명관계를 개선하고 돌아와 문하시중
으로 있을 때로 비를 세운 유래는 포은선생이 19세이던 공민왕 5년
(1355) 정원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다하니 조정에서 그 뜻
을 높이 기리기 위해 당시 군수인 정유로 하여금 선생의 태생지인
우항리에 효자리란 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성종 18년(1487) 경상도관찰사 손순효가 이 동
네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에 포은선생이 나타나 현몽하
기를“이 마을 밭에 나의 비가 묻혀있으니 촌 늙은이에게 찾아가서
확실하게 물어보라!”고 해 다음날 마을 촌로에게 물어보니 사실과
같아 그 자리에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효자리비로 가는 길목에서 본 길 중앙의 소나무를 피해 만든 길이
인상 깊었던 이 마을에는 이외에도 모우정과 가정, 고산재와 고천재
등이 남아 선조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임고 우항 _
40. 독립투사·효자배출, 올곧은 기개와 순수함 간직…
화북 오동·오산 ·공덕
이진영·안병철·이원대 애국지사 충의 숨쉬는 곳
“우리민족의 수난기 일제하에 태어나 잃어버린 조국의 광복위해
중국대륙의 항일전선을 누비시던 독립투사로 되찾은 조국의 땅에서
는 자유수호의 선봉에 섰던 애국지사 이진영, 오로지 나라와 겨레위
해 바친 임의 숭고한 얼은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살아 영원히 꺼지
지 않는 호국의 등불이 되리라.”
화북면 오동리(梧桐里) 입구에 자리한 애국지사 이진영의 추모비
내용으로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에서 세웠고 며느리 한결 심
란숙이 썼다. 이곳에는 황보 근·황보 선 애국지사 추모비와 6·25
참전 전공비가 나란히 건립되어 있다.
기룡산 지맥의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달리다가 마을에 이르러
끊겨졌으며 마을 앞 서쪽으로 방가산의 지맥이 뻗어내려 봉기덤을
_
만들고 그 덤 아래의 금호강의 지류인 고현천이 흐르고 있는 화북면
오동리는 국도 35호선이 마을 앞을 통과하고 있다. 산은 얕고 들은
넓어 예부터 사람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약 5백여 년 전 조선 중종 때 안우곤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으
며 봉황산 밑에 자리 잡았다 하여 봉하리라 칭했다. 조선 말엽 철종
때 행정구역이 신녕군에 속했다하여 신녕 땅, 영천군에 속했다하여
영천 땅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오동이 지번 상으로 봉
하리와 신녕 땅은 오산지번으로 영천 땅과 강변마을은 오동지번을
쓰고 있다.
또한 마을이름이 오동으로 되어있어 오동나무와 같이 속이 비어야
된다는 전설에 따라 지금도 마을 복판을 비워두고 있다하며 1914년
화북 오동 ·오산·공덕 _
행정구역 개편 시 오동으로 통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세대 197명의 주민(04. 6. 30일 기준)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1934년 지방 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화북면에 편입되었고 해방 이후
오동 또는 오리로 불리어오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실
시한 일제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오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곳으로
이진영, 안병철 등 독립투사를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오동마을에서 제오헌으로 가는 중간에 독립투사 이진영 열사의 생
가가 있다. 이진영 열사는 백학학원을 거쳐 자천보통학교를 졸업하
고 조재만과 접촉하면서 항일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고향에서
지하운동을 전개하다가 의열단공작원인 안병철의 권유로 1933년 8
월경 이원대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이진영은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 간부학교(조선
_
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황포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1935
년 7월 남경에서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특파공작원으
로서 2년여 간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
분교에 입교하여 6개월간의 훈련과정을 모두 마치고 1938년 10월
10일 호북성 한구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에 가입하
여 중경 판사처, 의창 판사처 주임으로 임명되어 대원모집과 일선지
대 지원활동을 전담했다.
조선의용대원 대부분이 화북으로 진출하고 중경의 본부요원과 일
부대원만 남게 되자 이진영은 서안으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 광복군
중교(부령)루 총사령부 총무처 경리과와 참모처 제3과에 근무했으며
잠시 제1지구대 본부 구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이듬해 귀국한 이진영은 육군사관학교를
특7기로 졸업하고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1951년 4월 13일 공산
침략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오동리에는 조선 인조때의 문인으로 경사에 밝아 세인들에게 칭찬
을 받았던 안진경·진성형제를 추모하여 후손들이 지은 재사인 모
의재(慕宜齋)와 창녕조씨, 안동권씨, 순흥안씨의 3문중에서 고암 조
한린, 권해운의 배위인 창녕조씨(북계 조용석의 딸), 안국권의 배위
인 경주김씨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삼존재(三尊齋), 조선 광
화북 오동 ·오산·공덕 _
해군 때의 선비로 동궁 시강을 지낸 학자 안응의를 추모하여 후손들
이 지은 강학소 제오헌(霽梧軒) 그리고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높은
학문과 청직한 성품으로 황해도 지방의 찰방을 역임한 안우곤을 추
모하여 지은 정자 죽송양화당(竹松揚花堂) 등이 남아있다.
오동리에서 공덕리 방면으로 좀 더 들어가면 전국에서 명품사과로
유명한 오산리가 나온다. 1·2리 합쳐 80세대 180여명의 주민이 살
고 있는 오산리는 본래 신녕면 지곡리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지(越旨), 운산(雲山), 오동(梧桐)의 각 일부를 병합
하여 오동과 운산의 이름을 따서 오산리라 하여 영천군 지곡면에 편
입되었다가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화북면에 편입되었다. 운
산마을 뒷산에는 학이 대규모로 서식하고 있어 학마을로도 널리 알
려져 있다.
월지는 약5백여 년 전에 황씨와 범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농사를 짓기 위해 못을 막아 범지(범못)라 부르고 있고 마을 앞산 모
양이 반월같이 생겨 월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앞 뒷산이 높
이 솟아 구름이 걸려있다 하여 부르게 된 운산은 약 4백여 년 전 경
주이씨인 이왕삼 선비가 화동면 생천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
었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의공 권응수 장군의 아버지
인 능라군 권덕신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재사인 광사재(廣思
齋)와 이옥삼,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운 이온수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경주이씨 후손들이 세운 재사인 영사재(永思
_
齋), 조선 선조때의 문신 조황을 추모한 우모재(寓慕齋), 조선 순조
때 효자로 일찍 편모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흉년에는 인근을 구휼한
이상업을 추모하여 추앙하는 사람들이 지은 정자인 운강정사(雲岡
精舍), 영조 때의 학자 조진옥·상옥형제가 강학하던 정자인 이호당
(二皓堂), 역시 영조조의 학자로 무신년 이인좌의 난 때 의병으로 출
진한 조용한의 정자인 자계정(慈溪亭) 등이 남아있다.
오산리 운산마을에는 이 마을에서 출생했으며 백학학원과 자천보
통학교를 거쳐 영천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조재만의 항일운동에
큰 감명을 받고 기회를 모색하던 중 의열단 공작원인 안병철의 권유
로 1933년 8월경 이진영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전선
에 가담하게 된 이원대 열사의 생가와 묘소가 마을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화북 오동 ·오산·공덕 _
중국으로 건너간 이원대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 간부학교(조선
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황포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1935
년 7월 남경에서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특파공작원으
로서 남경·상해 등지에서 2년여 간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이
원대는 공문덕, 마덕산이라는 이명을 사용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
분교에 입교하여 6개월간의 훈련과정을 모두 마치고 이듬해 10월
10일 호북성 한구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가입하여 장사대회전
등 수십 차례의 대일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41년 3월 조선의용대의 북상계획에 따라 화북으로 진출하여 산
서성·하북성 변경의 태항산 일대에서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반소
탕전·읍성전투 등 여러 차례의 대일전투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입
혔다.
그러나 대원모집을 위해 석문시에 잠입, 활동을 전개하던 중 불행
히도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군사 정탐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1943년
6월 17일 32세의 나이로 북경 일본헌병대에서 총살을 당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
고 1998년‘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열사의 항일독립정신을 추
모, 선양했다.
운산마을은 왜가리(황새) 서식지로 유명하다, 운산 숲을 중심으로
_
매년 2월 15일경이 되면 왜가리 떼가 찾아와서 둥지를 치고 새끼를
치며 살다가 초복(7월 15일)부터 떠나기 시작하여 중복(7월 25일)때
가 되면 전부 날아간다고 하는데 둥지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새끼에
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왜가리의 자식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다
워 보였다. 농약 공해 등으로 한때 왜가리가 찾아들지 않자 마을주
민들이 걱정하기도 했으나 점차 돌아오게 되었고 지금은 왜가리와
백로가 함께 서식하고 있다.
오산1리에 자리한 오산자연학교(교장 정홍규 신부)는 우주와 하나
되는 체험의 장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봄(3, 4, 5월)에는 꽃과 나무,
여름(6, 7, 8월)에는 물과 흙, 가을(9, 10, 11월)에는 땅과 하늘, 겨울
(12, 1, 2월)에는 별과 달의 축제 등 계절별로 다양한 테마체험 프로
화북 오동 ·오산·공덕 _
그램을 운영하며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아이들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시설관람, 천연염색, 곤충채집, 만들기(자연물), 수확하기, 문화행
사, 모심기, 식물 가꾸기, 유치원·어린이집·초중고생·종교단
체·교사·성인 등을 대상으로 물놀이, 야영, 관찰채집 및 모종분
양, 계절음식 만들기, 별 보기, 우주이야기, 미로걷기, 우주걷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 3년째 자연과 명상체험을 하는데 대
구경북 일원에서 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맨 안쪽 마을인 공덕리에는 46세대 1백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본
래 영천군 자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공덕과
천상 일부가 합쳐져 영천군 신촌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화북면
에 편입되었다.
댕댕이못을 지나 담배 밭 안에 공덕동 3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
료 제103호)이 방치된 상태로 서있다. 이 탑은 단층 기단위에 3층 탑
신부를 형성한 석탑으로 지대석은 2매의 판석을 결합시켜 괴임 1단
을 각출했으며 면석은 없고 갑석이 바로 놓인 약식기단이다.
옥신은 우주를 모각했고 옥개는 4단받침으로 괴임 1단을 각출했
다. 옥개의 낙수면이 짧고 육중한 옥개의 조각솜씨로 보아 고려시대
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하며 높이는 2.1m이다. 원래 공덕사내에 있
었으나 사찰이 없어진 후 서씨 문중의 송계정사로 옮겨졌다가 거리
가 멀어 관리가 어렵게 되자 1973년 동리입구로 옮겨졌고 이 탑을
옮긴 후 흉사가 자주 발생하자 1974년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기게
_
되었으며 3층 부분이 도난당해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 마을에는 3층석탑 좀 못 미친 곳에 극진한 효성으로 칭송이 자
자했던 이재영 효자각과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했다가 병환으
로 귀환한 아버지 대신 어린나이로 의병에 가담한 서호를 추모하여
지은 재사인 송계정사(松溪精舍)가 남아 그들의 효성을 기리고 있다.
효자 이재영은 천성이 지극 효순하여 부모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
고 아버지의 병환에 경명주사를 얻지 못함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넣어 입에 넣어드리니 그 다음날 쾌차하였다고 한다. 겨울에 물고기
가 드시고 싶다고 하면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드리고, 홍시가
드시고 싶다하면 아무리 멀어도 구해드렸으며 집에 불이 나서 어버
이의 수의를 잃을 지경이 되자 불 속으로 뛰어들어 수의를 꺼내기도
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3년을 시묘했고 제사에는 집안은 물론, 멀리
산소까지 정결히 하고 마을 어귀까지 나가 혼백을 받들었다. 고을에
서 천거하여 고종 10년 조정에서 정려하고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벼
슬을 추증했다.
왜가리 서식지와 오산자연학교, 이진영과 이원대 열사 등 독립투
사를 배출한곳, 효자 이재영과 서호…. 자연과 동화되어 순응하고
독립투사와 효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인 오동·오산·공덕 세
마을을 되돌아 나오면서 마을 사람들의 올곧은 기개와 순수함이 느
껴졌다.
화북 오동 ·오산·공덕 _
민족교육 요람 백학서원‘폐허’로 방치
이육사, 이원대, 이진영 등 항일독립투사 양성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열사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민족교육의 요람 백학서원이 허
물어지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방치돼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백학서원은 1555년(명종 10) 당시 신녕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유림들과 더불어 양강소 위 백학산에 건립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12년(광해군 4)에 중건했다.
1658년(효종 9) 현재 위치인 화남면 안천리로 옮겨 퇴계 이황 선생
_
화북 오동 ·오산·공덕 _
을 제향하고 황준량 선생을 배향했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서당
으로 복건했다.
이후 1921년 창년조씨 문중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이 힘을 합해
신학문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을 건립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
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많은 항일독립투사를 양성한 곳이다.
지금은 기와와 담벽이 심하게 훼손돼 있고 마당에는 양봉을 하고 있
으며 볏짚과 박스를 쌓아놓은 채 폐허상태로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영천향토사연구회 김애림 회원은 “10여 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며“하루빨리 본래의 모
습으로 복원돼 민족의식 고취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고 말했다.
41. 보성리 암각화 선사시대 문화규명에 중요한 역할
- 청통 보성·신덕
성황당-구도현 연결 성산봉수대 비교적 원형 잘 보존
남쪽으로는 쌍계동 성황당봉수대, 북쪽으로는 청통면 계지리 구도
현(仇道峴)봉수대와 연결되는 청통면 신덕리의 성산(城山)봉수대.
둘레 30m, 높이 3m인 이 봉수대는 토성을 쌓아 봉수대를 만들었으
며 그 중심에 봉화단이 있다.
보성리 암각화 주변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도로를 건너 비교적 잘
정비된 길을 따라 30여분 정도 걸어 봉화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성산
봉수대가 나오는데 영천에 남아있는 6기의 봉수대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집터와 기와조각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이곳에는 지난 1994
년 11월 27일 영천향토사연구회와 보이·걸스카우트 영천지구
1270 BBS 골벌지역대에서 세운 표석비가 우두커니 서있다.
_
신덕리는 본래 영천군 산저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
폐합에 따라 덕리(德里)와 성리(城里)를 병합하여 신덕이라 해서 청
통면에 편입되었다. 올라갈 때와 달리 10여년 전 표석비를 운반하던
완만한 길을 따라 보성리로 되돌아 나왔다.
보목은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뒷산의 봉수에 쓰일 나무를 가
져다주면서 봉화지기들을 크게 도와주어서 생긴 이름이고 목성은
각종 수목이 울창하고 주위의 산들이 성처럼 쌓여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보목(甫木)의 보자와 목성(木城)의 목자를
따서 보성리(甫城里)라 했다.
유형문화재 제286호(1994. 4. 16)로 지정된 보성리 암각화(岩刻
청통 보성·신덕 _
畵)는 지난 1993년 6월경 영천향토사연구회원들이 청통지역을 답사
하던 중 보성리 마을 어귀에서 거북모양의 바위에 새겨진 이상한 형
태의 문양을 발견, 자체 자료를 수집하여,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에
통보함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천전자고 조인호 교장이 골벌 9집에 발표한‘영천 보성리 암각
화의 성격’논문중 일부를 요약해 보았다.
_
청통 보성·신덕 _
보성리 암각화는 영천의 문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발견되
어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문화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조인호씨의 논문으로 실체에 한층 더 접근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만물이 약동하는 새봄이 오면 우리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찾는 발
걸음들이 많이 이어졌으면 한다.
_
임란의병 한천승첩지
성혈
아차골
고인돌여행
중암암
42.‘ 의병창의횃불발화’한천승첩재조명
육지최초 영천성 수복, 임란전쟁 국면 역전 일조 평가
임진왜란으로 왜적에게 침탈당한 영천성 복성 419주년인 9월 15
일(음력 7월 27일) 화남면 삼창리 임란의병 한천승첩 유적지에서는
백의사(百義祠) 위패봉안 및 편액 게미(揭楣) 제막식이 열렸다.
사단법인 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후손 1백여 명이 참석하여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을 위란에서 구한
의병들의 고귀한 뜻을 기렸고 사당인 백의사에 그들의 위패봉안과
편액을 걸게 됨을 기뻐했다.
편액은 한국서예협회 권오경 대구시부지부장의 서체이고 위패제
주는 대구 농어서숙 장병훈 서사가, 위패봉안은 후손대표가 했으며
판각은 대구 덕산공방 남홍근 사장이 한 것이다.
백의사는 살신성인한 임란의병의 구국정신을 숭모하며 민족정기
_
를 함양할 정신적 유적지로 삼기 위해 2004년 문화유적지 성역화사
업 추진계획에 따라 국비교부금 5억6천만원을 받아 1차 사업으로
대지 1,300평을 매입하고 380여 평에 백의사 사우(祠宇) 3칸 15평,
의사문(義士門), 전사청(典祀廳) 담장공사를 영천시가 발주하여 창
성건설주식회사 문화재부가 시공했으며 문화재청 목공기능 1379호
보유자 김창호 도편수가 건축했다.
백의사에 봉향된 의병장은
임란의병 한천승첩지 _
등 42위와 무명제위의사이다.(단, 선무원종녹권에 녹훈기록이 있더
라도 당시 10세미만 인사는 제외)
한천승첩 유적지는 역사적 장소를 보존하고 의사들의 넋을 위로하
며 선열들의 애국 애족심을 선양 고취시켜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교
육의 도장으로 활용케 하고자 하는 사업목적에 맞게 전통양식으로
설계되었다. 평면은 사당이 면적 50.45㎡(15.25평), 정면 3칸, 측면
1.5칸이고 내삼문은 17.35㎡(5.29평), 전사청은 11.75㎡(3.55평) 정
면 2칸, 측면 1칸이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왜구가 침공하여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왜구의 일격에 함락당하고 관군은 제대로 항거조차 못한 채 궤멸되
_
었으며 22일에는 경주성, 영천성, 신녕현이 함락당했다. 이에 신음
하는 백성과 초토화되는 강토를 구하고자 신녕현 추곡 가래실(현 화
산면 가상리)의 안동권문에서 충의정신으로 향인, 노비 등과 함께 4
월 27일 창의 기병했다.
의병들이 5월 6일 한천(漢川)땅 대동(大洞, 한천 덤 건너 큰골·화
남면 삼창3리)에서 피난민을 약탈하던 왜구 3명을 활로 죽이고 칼로
10여급의 목을 베었으며 왜의 첩자 희손 일당 30여명을 소탕한 한천
전투는 의병창의 횃불의 발화점이 되어 뜻있는 열읍 의병이 분기하
여 육지에서 최초로 영천성을 수복하고 경상좌도의 왜구소탕과 임
란전쟁의 국면을 역전시키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7월 14일에는 박연(朴淵, 화산면 석촌리)전투에서 왜군 30여급
을 참살하고 총검을 다수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7월 22일 고현
임란의병 한천승첩지 _
(古縣), 사천(沙川)전투에서는 생원 최인제와 전삼익, 전삼달 형제가
먼저와 기다리다 참전하여, 하양을 거쳐 대구로 진격하려던 왜구를
물리쳤다.
신녕의병의 연전연승 소식을 들은 의흥, 청송, 영천, 하양, 경산,
자인, 경주 등의 의병 3,650명이 7월 23일 신녕현 남면(경산시 와촌
면)에 운집하여‘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깃발아래 다음날 추평(楸
坪)에서 대오를 편성, 26·27일 양일간 임란사상 최초로 영천성을
수복했고 왜구는 경주로 도망갔다고 한다.(백운재실기)
한천승첩지 성역화사업은 지난 1992년 4월 13일 임란400주년 추
모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영천성 복성행사가 당시
당국의 묵살로 인해 열리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 후손들이 그해 4
월 27일 신녕의병창의추모회를 조직, 신녕의병창의일을 기해 신녕
_
임란의병 한천승첩지 _
경충사에서 추모행사를 했고 사단법인 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
회를 조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0년 12월 도비 7천만 원과 시비 1억4천만 원, 후손부담 2천만
원으로 최초 임란의병승첩탑 건립예산으로 확보하여 2002년 8월에
승첩탑을 준공했으며 탑명은 당시 민족정기선양위원장이던 최창규
성균관 관장이 찬했다. 2004년 2월에는 영천시가 경상북도에 이곳
을 문화유적지로 신청하여 지난 1월 14일 문화재전문위원들이 1차
현장조사를 했다.
2차 공사는 승첩기념탑 앞쪽에 충훈당(忠勳堂), 승첩재(勝捷齋),
복성재(겖城齋), 창의문(倡義門), 유물전시관, 관리사를 완공하여 이
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혹독했던 임진왜란의 치욕적인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의사들의 충의정신을 상기할 수 있는 문화유적지로 조
성할 계획으로 2차 공사가 마무리되면 유적지로서의 면모를 충실히
갖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06년 2월 16일 경상북도 기념물 156호 지정된 임란의병한천승
첩지는 2008년 8월 25일 충훈당 준공에 이어 지난 6월 23일 진입도
로를 개설했다.
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회 권상석 회장은“늦은감은 있지만 한
천전승첩지의 사업이 어느정도 진행되어 의병들의 넋을 기릴 수 있
게 돼 기쁜 마음 그지없지만 아직까지도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며 회
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_
43. “ 기룡이노니는그곳에성혈이있었네”
임란 때 포은 선생 영정, 오성위 위패 피난
“우와! 우와!”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빗줄기를 흠뻑 머금은 기룡산 중턱의 산천은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
했고 또한 찾아온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양면 소재지를 조금 지나면 왼쪽에 성현암과 신선암의 표지판이
연이어 나타난다. 성혈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비탈길을 거슬
러 1㎞정도 올라가면 협
곡사이로 신선이 노닐었
음직한 풍광이 나타난다.
먼저 신선암 대웅전이
나오고 위쪽으로 50m정
도 더 들어가면 성현암이
나타난다. 성현암 왼쪽에
성혈 _
조립식 패널로 입구
를 감싼 성혈이 있
었다.
지극정성으로 기
도를 하는 곳임을
알게 했고 기룡산에
서 흘러내린 약수는
심신을 시원하게 했
으며 작은 불상도
놓여있었다.
일명‘성혈’로 불리는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영정과 영천향교 오성위(五聖位)의 위패를 피난시킨 곳으로 임고서
원 원지에‘임진년 4월에 왜구가 침입해 심히 급한 시기에 사인 이
현남(굃縣男)이 선생의 영정을 자양 성혈사(聖穴寺)로 옮겼다’는 내
용이 나온다.
이듬해에 조종대(趙宗岱)의 계정(溪亭: 지금의 자계정)으로 옮겨
모셨다가 4년 뒤인 정유재란에는 장항(獐項) 명상곡(明爽谷)에 숨겨
졌으며 이듬해 원각촌사(圓覺村舍)로 옮겨 봉안했다.
1600년 옛터의 초가 1칸을 지어 봉안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년 만에 도일동에 임고서원을 다시 지어 영정을 옮겨 모셨다는 기
록이 있다.
44. 왜군이‘아차’하며 돌아갔다는‘아차골’
연이은 하송, 상송, 청송에 왜장 기겁해 줄행랑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어 매복을 우려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등
청정(加藤淸正)>가 사로잡아 향도로 쓰던 촌로에게“이곳이 어디
냐?”라고 물었다. 촌로가 답하되“하송입니다.”
드디어재밑에당도해다시한번물었다.“ 이곳이어디냐?”촌로
가 답하기를“여기는 상송이고 이재를 넘어가면 청송입니다”라고 대
답하니 본국에서 떠날 때 삼송을 조심하라는 아내의 말이 떠오른 왜
장이 크게 놀라 회군했다.
천한 종들(왜군)이 물러간‘성스러운 고개’란 뜻에서 노귀재라 했
고 길을 안내한 촌로가 보현보살의 현신이라고 믿어 그 산을 보현보
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해 보현산으로 명명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또‘아차’하며 왜군이 돌아섰다는 상송의 북쪽 마을을 아차 또는
_
아칠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노귀재에 올라서 멀리 보이는 영천과 청송의 지세를 살핀 후
50~60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5~6가구 정도 남아있는 아차골로 들
어갔다.
영천에서 청송방면으로 가다가 굽어지는 곳에 스마일휴게식당과
함께 전통찻집 아차골 다방이 나타난다. 마을 안쪽까지 500여m정
도 길이 포장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산딸기가 행인
을 유혹했고 과
수농사와 함께
소와 개 사육이
이 마을의 주된
수입원임을 짐
작하게 했다.
방치된 밭과 경운기, 잡초가 무성한 집들이 원주민들의 이주를 아
쉬워하게했고 일본제국주의 때 지금의 도로가 개설되기 전 청송으
로 넘어가는 길이었다는 조진호(81) 영천문화원 자문위원의 말처럼
마을 뒤로도 산으로 오르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서 매복을 만난다면 승패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상송, 하송, 청송이 됐건, 이여송, 송도, 송운대사가 됐
건 굳이 삼송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더라도 일국의 장수라면 쉽게 넘
을 수 없는 고개였을 것이다.
아차골 _
45.‘ 파묻고, 깨어서버리고, 옮기고…’갈수록사라져
임고 양평리 돌빼기, 화산 암기리, 북안 명주리 고인돌 여행
“매년 정월 대보름에 보름달을 제일먼저 보면 시집, 장가든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동네에서 나이든 처녀총각들은 죄다 여기로 모
여들었습니다.”
40대로 보이는 한 주민은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마을 복판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서 마을명이 붙여진 임고면 양
평1리 양암(일명 돌빼기)마을. 선사시대의 유물인 돌빼기는 이름 그
대로 마을의 상징이다.
자양면에서 내려오는 계천이 이루는 평야가 서로 합쳐지는 삼각지
대의 구릉지인 점과 1962년 사리에 임고지가 건설되어 구릉야산의
밭을 논으로 전환시킴과 동시에 경지정리를 수년간에 걸쳐서 추진
할 당시 화살촉이 출토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예로부터 군사적, 경
_
제적으로 요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 2.2m, 가로 2.6m, 세로 1.55m인 이 지석묘는 중국 진시황
때에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필요한 바윗돌을 운반하다가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버렸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
고 있으며 남방형에 속하는 것으로 4개의 지석위에 장방형의 반석
을 얹은 것이다.
화산면 암기리 상신기 서쪽에 있는 지그마마을. 들에 큰 돌이 두
개 있었는데 한 개는 일제강점기 때 사방공사를 하느라고 부숴버렸
다고 한다.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
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인 고인돌. 고인돌은 보통 무덤으로 많이 알
고인돌여행 _
_
려져 있지만 이외에도 묘표석, 제단, 신앙의 대상 등의 기능을 하기
도 했다.
옛날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돌을 채찍질해 가다가 두
개를 못 가져가게 됐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남은 돌의 높이는 1.5~2m,
둘레는 8.5m정도가 된다. 정남향이며 남방식인 개석식이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인 이재수 박사는“마을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
는 시내가 있고 입암(굤岩)마을 입구에 같은 바위 두개가 기둥같이 우
뚝 서있는 걸로 봐서 선사시대 때 중요한 위치였던 것 같다.”고 했다.
“파묻기도 하고 깨어서 버리기도 하고, 또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했어요. 논 주인이 하나하나 없애다 보니 지금은 이 일대에 남은 게
몇 개 없어요.”
북안면 명주리 양성복(65)씨는“어릴 때 올라타고 놀던 고인돌이
거의 없어졌지만 자신의 밭 아래에 있는 고인돌은 한 풍수가가 돌이
있는 것이 집안에 좋다고 해서 그나마 이 자리에 지금처럼 돌이 남
아있게 됐다”고 말했다.
5기가 남아있다고 전해진 북안면 명주리에는 2기가 남아있었고
수십 기가 들에 펼쳐져 있었다는 용계리 범벅이들에서는 자취를 찾
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야산 쪽에 깨어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이는 돌
들이 제법 보였다.
주민 박태춘(75)씨에 따르면“이 들에 임금님의 자국이라던 돌들
이 아주 많았다. 아이들이 올라가서 놀면 위험하다고 내려오라고 했
던 기억이 난다”며“30여년전 경지정리를 할 때 모두 없어졌다”고
회상했다.
고인돌여행 _
_
46. 화랑 김유신이 수련했던‘중악석굴’이 극락굴?
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삼인암, 극락굴, 삼층석탑
중암암 _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 나오는 중악석굴에 관한 내용으로 소년
김유신이 큰 뜻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게 된 과정을 잘 기술하고 있다.
_
경주 단석산에 이어 근자에 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중악석굴로 거
론되고 있는 은해사 중암암 일대를 답사했다. 중악석굴은 1969년 5
월 한국일보사 주관인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이 단석산으로 비정한 이
래 거의 정설로 굳어졌으나 문경현 교수 등에 의해 중암암 일대라는
설이 제기됐다.
문경현 경북대 명예교수는‘삼국사기’김유신열전의 중악(中嶽)이
란, 3권으로 된 김유신열전의 원전(原典)인‘김유신행록(갏庾信궋
걧)’이 김유신의 현손이었던 김장청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통일 이후
의 개념으로 설사 통일이전에 중악이 있었다 하더라도 경주분지의
중심을 벗어나 있는 단석산은 중악이 될 수 없다는 점과 단석산이
호국신의 주처(主處)인 삼산(三山)의 중앙에 위치하므로 중악이라
불렀다 하나 삼산 가운데 혈례(穴禮·靑道)의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
으므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역사상 단석산을 중악이라 호칭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단
석산이 곧 중악이라는 설은 단석산의 암석 형상을 김유신전설과 결
부시킨 후대의 전승을 수록한‘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비롯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악이란 다름 아닌 대구의 팔공산이며, 은
해사의 암자인 중암암 뒤의 석굴이 곧 중악석굴이라고 주장했다.<문
경현, 1983, 「소위 중악석굴에 대하여」, (신라사연구, 경북대출판
부)>
은해사의 산내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암암(中巖庵)
에 이르는 길은 마치 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자연바위를 거쳐야 한
다. 이 바위 덕분에‘돌구멍 절’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중암암 _
중암암은 통일신라 때인 834년(흥덕왕 9)에 동화사를 창건한 분으
로 진표와 영심을 이은 신라 법상종의 제3조인 심지왕사가 창건했
다. 정확한 창건의 사정은 전하지 않지만 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후 산내 곳곳에 수행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묘봉암과 함께 이곳 중
암암이 들어선 것 같다.
중암암은 가파른 산세와 험한 지형이지만 팔공산의 절경 가운데서
도 손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속인의 눈에야 그저 경관의 빼어남만
보이겠지만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수행처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건 이래 별다른 변천 사실은 전하지 않으나 암자 뒤
편의 산중턱에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 등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또 주위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어 절의 유구한
_
역사를 말해준다.
1823년(순조 23) 태여(太如) 대사가, 1834년(순조 34)에는 우일(宇
一)과 유엽(有曄) 대사가 힘을 합쳐 중수했으며 지금의 가람은 최근
에 중건된 것으로 법당과 산신각은 1958년에, 요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었다.
중암암은 돌구멍을 통해 절을 드나들게 돼있고 현재는 사용을 안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 건들바위, 만년
송, 장군수, 삼인암, 극락굴, 삼층석탑 등 볼거리도 참 많다.
특히 크고 아름다운 널따란 바위와 보검으로 내려친 듯이 쫙 갈라
져 있는 두 동강 난 여러 개의 바위가 먼 옛날 삼국을 호령하던 김유
신 장군의 수도처일거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으로 지난 1990년‘골화성에 대하여 -골화소
국과 관련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던 이재수 박사(58·경북대 강사)
는“아직까지 여러 가지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김유신과 백석의
설화가 남아있는 신라의 삼산이었던 골화성(금강산성)의 존재로 봐
서도 이곳이 중악석굴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내다봤다.
중암암 _
진불암
비녀비각
용의 배꼽
황성옛터
47.“ 진불암계곡부처굴이제1석굴암이래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삼존불 봉안했던 석굴 발견
봄을 마중하는 비였지만 제법 굵어진 빗방울이 주위의 기온을 떨어
뜨리면서 한겨울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
들만큼 상쾌했다.
“드디어 찾았다!”2010년 3월 6일 봄비가 대지를 적시는 가운데 팔
공산 치산벨트 염불골 계곡의 물소리가 만들어내는 청아한 소리와 한
가롭게 산새들이 일대를 날아다니면서 평온함을 선사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식산국 산림과에서 임야 가운데 있는 고적 유물
을 조사해 고적대장을 만들고 그것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조선
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를 기초로 지난 2006년 3
월 19일 첫 답사를 나선 이래로 거의 4년만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의 영천군조의 불상항에「팔공산 아래 진
_
불암 계곡의 암석지내(巖石地內)의 일부에 수도사에서부터 약 20정
(약 2.2km), 진불암에서 수정(겤町:1정은 약109m)의 산중턱에 거대
한 화강암 굴속에 자연석에 조각한 높이 3척, 흉폭 1척8촌의 좌불상 1
구, 높이 3척4촌 흉폭 1척2촌과 높이 2척5촌, 흉폭 1척2촌의 수호불
각 1개가 있는데 표면에 균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다른 두
구는 일부 파손된 곳이 있어도 거의 완전에 가까우며 근처에 분쇄되
어버린 2, 3구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해 11월 18일과 이듬해인 2007년 4월 15일 경북대학교 역사교육
학과 교수 및 학생들의 답사 이후 관망하다가 지난해 8월 팔공산이
좋아 진불암과 건너편 동아골에서 20여년간 생활했던 진불암의 산역
사로 알려진 삼봉스님(73)을 만나기 위해 군위군 고로면 낙전리의 보
림암을 찾아가기도 했다.
진불암 _
지난달 말 영천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박성찬(49)씨가 대구 팔공산
지킴이가 석굴을 찾았다는 제보를 해왔다. 팔공산지킴이 카페지기 서
태숙(49)씨와 연락을 취하면서 2월 28일 홀로 나섰지만 녹지 않은 눈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3월 4일 기어이 석굴을 찾았다며 퇴근 무렵 필자를 찾아온 박씨가
입구부터 석굴까지 필자를 위해 표시를 해뒀다고 했다. 마음이 급해
져서 찾기 위해 떠나는 마지막 답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
나, 팔공산지킴이 서태숙 씨로부터 함께 가자는 연락이 왔다.
6일 오전 대구 팔공산지킴이 조명래(53·경주 불국사 문화재위원/
문화유산해설사)·박용근(55)·서태숙(49) 회원과 함께 이런저런 이
야기를 나누면서 우중 답사에 나섰다.
공산폭포를 지난 후 현수교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직진하면 진불
암 1.3㎞, 동봉 3.2㎞, 수도사 1.7㎞ 지점에 6·25동란 이후 산판을
했던 제재소 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개울을 건너지 않고 등산로를 죽
따라가다가 갈림길에서 위로 올라가면 거대한 화강암 석굴이 우뚝서
있다.
석굴은 입구 폭 230cm, 높이 140cm, 굴 안 가로 폭 470cm, 최고
높이 190cm, 길이 490cm의 아치형으로 성인 7-8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입구 우측의 바위에 넘어진 나무뿌리로 인한 파손이
있어 보수가 필요하고, 굴 안의 바위도 손으로 당기면 떨어지나 대체
로 양호한 상태이다. 수도사에서 동남쪽으로 약20정(2.2㎞)이지만 직
선거리는 650m 정도이며 GPS로 측정해보니 해발은 620m정도였
다.
_
석굴은 찾았지만 삼존불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일본으로 건너갔을
수도 있고, 6·25사변 후 산판(벌목 또는 벌목을 하는 곳을 가리키는
강원도 사투리)을 하면서 누군가가 가져갔을 경우 등으로 추측되지만
삼존석불의 존재는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고려 말 승려 신돈이 실각하면서 일대의 불상을 부처굴에 모두 숨
겼다고 합니다. 좋은 불상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
었지요. 산판 당시 인부들이 '저안에 부처 들었다'며 굴을 향해 손가락
질하면 반드시 다쳤어요.”
내려오는 길에 산 아래 마을인 치산리에서 자랐다는 대한불교태고
종 영지사 주지 이상열(72)씨를 방문하니 어릴 때 기억을 이야기했다.
이씨는 이어서 일설에는 우리나라에 3개의 석굴암이 있는데 경주석
굴암이 제3석굴암이고 군위삼존석굴이 제2석굴암이며, 치산계곡에
있는 석굴암 즉, 부처굴이 제1석굴암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고도 했
다.
진불암 _
48.‘ 며느리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로 버름보 통수’
- 비녀비각
양수 선생 후진양성하며 구곡원림 경영한 횡계구곡(橫溪九曲)
개울에 둥근 구슬 같은 암반이 많고 물이 맑은 화북면 옥계리. 자을
천에서 흐르는 물을 이용하기 위해 보를 막고 제방을 구축한 버름보
위에 제방을 구축한 사람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비녀비가 세워져 있
다.
보 공사 당시 커다란 바위가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
의 책임자였던 시아버지가 매일 정(釘)으로 바위를 뚫었으나 좀체 뚫
을 수가 없었다. 마침 점심을 갖고 온 며느리가 머리에 꽂고 있던 비
녀로 그 바위를 쪼아 마침내 통수(通水)하게 됐다는 것.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상억)에서 보현산댐 건설이 한창 진행중
인 비녀비를 찾았다. 한쪽에 외로이 방치(?)돼 있었지만 비녀각 안에
서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다행히 댐 제방보다 아래에 있어서
_
수몰위기는 넘긴 듯하지만 수변공원이 조성되면 잘 보전하든지 적당
한 위치로 옮겨야 될 것 같았다.
이어 정만양·규양형제의 우의와 풍류가 깃든 횡계구곡의 원류찾
기에 나섰다. 제1곡 쌍계(雙溪)에서 시작해 제2곡 공암(孔巖), 3곡 태
고와(太古窩), 4곡 옥간정(玉磵亭), 5곡 와룡암(臥龍巖), 6곡 벽만(碧
灣), 7곡 신제(新堤), 8곡 채약동(採藥洞)을 차례로 둘러보았으나 저수
지 건너편에 있는 고암(高菴)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기약하고 돌아왔
다.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본 따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읊었던 구곡
가계, 영천에는 횡계구곡과 병와 이형상 선생이 지은 성고구곡이 남
아있다.
비녀비각 _
형제인 훈수 정만양 선생과 지수 정규양 선생은 병와 선생과 동시
대에 살면서 서로 교유하며 자신의 근거지에 구곡원림을 설정하고 경
영하며 주자의 삶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실현했다.
橫溪九曲(횡계구곡)
_
비녀비각 _
_
비녀비각 _
49. 화남면 용계리‘용의 배꼽’, 괴연동 상여집을 아
세요?
날이 갈수록 사라지는 지역 문화유산 시 차원 보존해야
“예전부터 날이 많이 가물면 구전리와 용계리 주민들이 모여서 이
곳 용의 배꼽에서 기우제를 지냈어요. 기우제를 지내다가 비가 와서
마을로 내려갈 때도 많았을 정도로 큰 효과가 있었지요.”
매화마을로도 유명한 영천시 화남면 용계리 마을 노인회장인 윤원
화(77) 어르신은 마을 상류의 작은 구멍에서 용이 났다고 하여 용계
(괟溪) 또는 파계(巴溪)라고 불렸다는 마을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기우제에 대해 설명했다.
기우제를 지내기 하루 전에 두 마을 대표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는
데 빨래나 목욕 등 계곡의 사용을 못하게 하고 개를 잡아서 그 피를
용의 배꼽 바위에 발라 그 개의 껍질을 널어두고 고기를 나누어 먹은
후 마을로 내려간다고 했다.
_
제사를 지내고 나면 대부분 바위에 발라놓은 피가 씻겨 내려갈 정
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하며 50여 년 전에는 제사를 지낼 사람이
담배를 피우자 산에서 범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언론을 통해 매화마을로 널리 알려지면서 봄철의 토·일요일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도 하는 용계리에는 아직까지 버스가 다니
지 않는다. 따라서 버스를 타려면 구전리까지 5㎞ 정도를 걸어서 나
가야한다.
도로가 좁아 화북댐 건설 피해보상금으로 조금씩 도로공사를 하고
있지만 내년까지 5년간 한시적으로 예정되어 있어 도로가 완공되어
버스가 다니려면 아직 시간이 좀더 걸릴 듯하다.
용의 배꼽 답사를 마친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상억) 회원들은
마을로 들어갈 때와는 반대로 방가산(方駕山)을 넘어 화북면 죽전리
용의 배꼽 _
로 내려오면서 아름다운 오지마을을 감상했다.
일명 정관산으로도 불리는 방가산은 오랜 옛날 동해에 해일이 일어
나 온천지가 물에 잠길 때 남은 봉우리의 모습의 방갓, 탕건, 큰 갓 모
양을 닮았다 하여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점심식사 후에는 괴연동 상여집으로 향했다.
상여집(행상집)은 곳집 또는 고새이 집으로도 불렸으며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느 마을이던 한곳은 꼭 있었으며 주로 산
아래나 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언덕 위나 밭 주변에 지었다.
집의 상량보에는 융희 3년이라는 연호가 적혀있었다. 이에 따르면
1909년(순조 3년) 9월 11일 건립되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괴연동 상여집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많이 쇠락해 있었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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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장은 유삼 골짜기에 있었던 암자의 것으로 짐작되는 기와도 많이
상했지만 장례 때 사용하는 기구들은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상여집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동네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 한
분과 아주머니 한분이 다가왔다.
할머니는“바로 옆이 길이었는데 옛날에는 무서워서 이리로 지나다
니지도 못했다. 날이 갈수록 놋쇠요롱 등 많은 것이 없어져서 안타깝
다.”며“영천시 차원에서 관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용의 배꼽 _
50.‘ 황성옛터’작사가 왕평 이응호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수정사, 묘소, 집, 노래비’
영천출신인 왕평 이응호(1908-1941)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혼
을 일깨웠던‘황성옛터’의 노랫말이다.
1927년 어느 여름날 황해도 개성의 백천여인숙, 극단 연극사(硏劇
舍)의 일원으로 공연하며 연일 쏟아지는 장마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
는 와중에 문득 허물어진 옛 궁터인 개성 만월대를 생각하며 지은 것
이다.
_
전수린이 바이올린 곡조를 오선지에 옮기며 작곡을 하고 이애리수
의 노래로 그해 가을 단성사에서 무대에 올려지게 됐다. 슬프다 못해
절망적인 아픔으로 엄습해오는 이애리수의 애잔한 노래에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렸다.
왕평과 전수린은 일경에 불려 다니면서 모진 고초를 당했고 황성옛
터는 공연 금지곡이 되어버렸지만 이 노래는 점점 더 민족가요로 사
랑을 받았다.
왕평은 이후에도 민족성 강한 노랫말을 담은 대한팔경, 조선행진곡
같은 노랫말을 만들었으나 모두 금지곡이 됐고 1941년 평북 강계에서
연극‘아버지’를 공연하던 중 무대에서 쓰러져 33세의 나이로 요절했
다.
왕평 선생의 생애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가요사 자료에
는 1901년, 영천지역 신문과 기타 자료에는 1904년으로 나와 있지만
호적부에는 1908년으로 나와 있다.
또 사망연도도 1940년, 41년, 43년설 등이 있지만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본 결과 1908년 출생에 1941년 사망이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
인다. 이 연도를 기준으로 생애를 정리해봤다.
왕평 이응호 선생은 1908년 3월 15일 경북 영천군 영천읍 성내동
13번지에서 부친 동암 이권조(1885-1971)씨와 모친 김침동(1888-
1913)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4년부터 1916년(6-8세)에는 수정사 주지를 맡았던 아버지를 따
황성옛터 _
라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2번지 수정사 입구 마을의 민가에서 거주했
다.
9세 때인 1917년 영천보통학교(지금의 영천초등학교)에 입학했으
며 16세 때인 1924년 서울 배재중학교에 입학해 졸업 후 조선배우학
교에 다닌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포리돌 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유행가 115편, 서정소곡 3편,
재즈송 3편, 민요·속요·신민요 33편, 합창·행진곡 5편, 극·극영
화 30편, 난센스 21편, 스케치·만담 5편, 승방애화·전지미담 2편
등 작품 195편을 창작했으며 가요시가 전체의 58%이상을 차지했다.
만담가 나품심과 정식 혼례를 올리지 않은 채 동거생활을 했고
1930년대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두루 돌면서 악극단 공연에 중
점을 뒀다.
1941년 평북 강계에서 극 공연 도중 고혈압으로 사망했으며 서울
태고사(현 조계사)에서 화장 후 수정사 앞에 묘소를 조성했다.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상억)에서는 왕평 이응호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일원에 남아있는 아버지가 주지로 근무했던
수정사와 묘소, 당시 살았던 집, 청송군에서 건립한 황성옛터 노래비
를 보기 위해 청송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화북면에서 청송으로 가다가 길안 방면으로 핸들을 돌려 진보면에
_
서 국도 31번을 타고 청송읍 방향-송강리 목계솔밭에서 좌회전해 계
곡으로 2.3km 정도 지점에 위치한 수정사(파천면 송강리 2번지).
청송팔경중 하나로 꼽히는 수정사는 고려시대 공민왕대(1352-
1374)에 나옹화상이 창건했는데,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산 속에서 흘
러내리는 샘물과 계곡에 흩어진 돌이 수정같이 깨끗해 수정사라 불렀
다고 한다. 대웅전이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73호로 지정돼 있다.
한참을 머무르며 안내자를 찾아보았지만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수정사 앞산(송강리 3번지)에 왕평 선생의 묘소가 있다고 하는데 우
거진 수풀로 인해 좀처럼 산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잠시 갈등을 하다가 김덕주 부회장이 앞장서기로 했다. 낫을 구해
황성옛터 _
가파른 길을 오르며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넘어지고 긁히기를 20
여분 드디어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조금 큰 봉분 옆에 있는 작은 봉분 옆에 조그마한 비석이 서있었다.
앞면에는‘王平굃應鎬之墓’, 뒷면에는‘황성옛터詩人, 近園갏洋東
書’라고 적혀있었다.
옆의 산소가 아버지 이권조씨의 산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마을에서 확인한 결과 왕평 선생의 윗대 어른 중 한명의 무덤일 것이
라는 대답을 들었다.
볕이 잘 들지 않아서인지 무덤 군데군데에 이끼가 끼어 있었고 풀
이 잘 자라지 않아 보였다. 회원들이 함께 산소의 벌초를 하고 산 아
래로 내려왔다.
청송에서 잠시 살았다는 집(송강리 119-139)으로 향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기웃거리고 있는 사이 이 집에 10년째 세 들어 살고 있다는
배성근(67)씨가 낯선 객들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주변에서 일하다가
_
다가왔다.
“틈틈이 사람들이 찾아와서 왕평 선생에 대해서 묻곤 합니다. 요즘
은 가족과 군청에서도 자주 이곳 송강리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집은 현재 왕평 선생의 부친이 주지로 있었던 수정사 소유이고 집
아래에 왕평 선생 부모의 묘소가 있다.
송강리 입구 목계솔밭에 지난 2009년 10월 10일 (사)청송향토문화
발전회의 후원을 받아 청송군에서 건립한 황성옛터 노래비가 웅장하
게 서 있었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들은 기념촬영을 마치고 진보면 신촌식당에서
닭불고기와 백숙으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한 후 청송군이 자랑하는 야
송미술관과 청송꽃돌수석전시관을 관람하고 영천으로 돌아왔다.
긴 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성내동 65번지 카 무인 모텔 건축현장
에 모였다. 문화재와 교회 사이에 건축되고 있는 모텔공사현장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으로 성내동 13번지를 검색해보았다. 13번지
는 잡히지 않고 숭렬당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왼쪽 편에 13-1번지가
나왔다. 지금의 65번지와는 제법 떨어진 거리였다.
긴 세월을 흘러오는 동안 도로가 새로 생기면서 지형이 많이 바뀌
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지 영
천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지혜를 짜내야 할 때이다.
황성옛터 _
_
마을을 따라 흐르는 냇가의 물소리, 돌로 쌓은 담벼락, 굴뚝연기, 한낮에 울어대는 촌닭, 미처 녹지
못한 잔설….
지난 2002년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찾았던 정각리 별빛마을에서 본 풍경들이다. 이날의 감흥이
수년 후 영천시 농특산물 공동브랜드인‘별빛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99년 말 영천으로 이사와 2002년 영천문화원 문화재가이드반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지역문화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매주 지역의 명소를 찾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고향의 넉넉함과 향수를
느꼈고 영천향토사연구회와 문화유산답사회‘우리얼’, 경주박물관대학 답사를 통해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 나갔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6개월 정도 답사하다 보면 영천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한번 둘러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7년이 지난 지금도 찾아보지 못한 곳들이 많다.
첫 인상이 무척 강렬했던 하절을 비롯한 자양 용산리 유적, 풍수가 빼어난 광릉과 선원마을,
형제간의 우애와‘충ㆍ효ㆍ공ㆍ검’정신을 가르쳐준 옥간정과 모고헌,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보여준
고인돌 사랑무덤, 영천의 정신을 결집할 천혜의 호국성지인 금강산성….
선원ㆍ대환ㆍ매곡ㆍ신원ㆍ대전ㆍ도남ㆍ충효ㆍ도유ㆍ도천 등 혼자만의 외로운 답사가 진행되면서
산재한 우수한 문화유산들을 보고 많이 놀랐다. ‘옛 선인의 충의가 숨쉬는 고장’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전공분야가 아닌 만큼 전문적 지식과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급적 사진을 많이 찍었고
자료를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흔히들 답사를 일컬어‘관심과 느낌을 통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발간을
통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중간기착지에 도착한 것 같다. 지금까지 영천의 문화유산을 되짚어볼
수 있도록 동행하면서 격려해준 영천향토사연구회원들과 이 책이 발간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성영
관 영천문화원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오랜 객지생활 끝에 찾은 고향에서 처음 답사를 시작할 때의 목표는 달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앞으로도 쓰고 싶고 써야할 곳들이 많이 남아있다. 언젠가가 될지는 몰라도 후속편이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영천문화원 사무국장 이 원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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