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삼인암, 극락굴, 삼층석탑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 나오는 중악석굴에 관한 내용으로 소년 김유신이 큰 뜻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게 된 과정을 잘 기술하고 있다.
경주 단석산에 이어 근자에 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중악석굴로 거론되고 있는 은해사 중암암 일대를 답사했다. 중악석굴은 1969년 5월 한국일보사 주관인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이 단석산으로 비정한 이래 거의 정설로 굳어졌으나 문경현 교수 등에 의해 중암암 일대라는 설이 제기됐다.
문경현 경북대 명예교수는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중악(中嶽)이란, 3권으로 된 김유신열전의 원전(原典)인 ‘김유신행록’이 김유신의 현손이었던 김장청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통일 이후의 개념으로 설사 통일이전에 중악이 있었다 하더라도 경주분지의 중심을 벗어나 있는 단석산은 중악이 될 수 없다는 점과 단석산이 호국신의 주처(主處)인 삼산(三山)의 중앙에 위치하므로 중악이라 불렀다 하나 삼산 가운데 혈례(穴禮·靑道)의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으므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역사상 단석산을 중악이라 호칭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단석산이 곧 중악이라는 설은 단석산의 암석 형상을 김유신전설과 결부시킨 후대의 전승을 수록한‘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악이란 다름 아닌 대구의 팔공산이며, 은해사의 암자인 중암암 뒤의 석굴이 곧 중악석굴이라고 주장했다.<문경현, 1983, 「소위 중악석굴에 대하여」, (신라사연구, 경북대출판부)>
은해사의 산내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암암(中巖庵)에 이르는 길은 마치 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자연바위를 거쳐야 한다. 이 바위 덕분에 ‘돌구멍 절’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중암암은 통일신라 때인 834년(흥덕왕 9)에 동화사를 창건한 분으로 진표와 영심을 이은 신라 법상종의 제3조인 심지왕사가 창건했다. 정확한 창건의 사정은 전하지 않지만 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후 산내 곳곳에 수행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묘봉암과 함께 이곳 중암암이 들어선 것 같다.
중암암은 가파른 산세와 험한 지형이지만 팔공산의 절경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속인의 눈에야 그저 경관의 빼어남만 보이겠지만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수행처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건 이래 별다른 변천 사실은 전하지 않으나 암자 뒤편의 산중턱에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 등이 파손된 채 남아있다. 또 주위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어 절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1823년(순조 23) 태여(太如) 대사가, 1834년(순조 34)에는 우일(宇一)과 유엽(有曄) 대사가 힘을 합쳐 중수했으며 지금의 가람은 최근에 중건된 것으로 법당과 산신각은 1958년에, 요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었다.
중암암은 돌구멍을 통해 절을 드나들게 돼있고 현재는 사용을 안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 건들바위, 만년송, 장군수, 삼인암, 극락굴, 삼층석탑 등 볼거리도 참 많다.
특히 크고 아름다운 널따란 바위와 보검으로 내려친 듯이 쫙 갈라져 있는 두 동강 난 여러 개의 바위가 먼 옛날 삼국을 호령하던 김유신 장군의 수도처일거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으로 지난 1990년 ‘골화성에 대하여-골화소국과 관련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던 이재수 박사(58·경북대 강사)는 “아직까지 여러 가지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김유신과 백석의 설화가 남아있는 신라의 삼산이었던 골화성(금강산성)의 존재로 봐서도 이곳이 중악석굴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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