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기룡산에서 뻗은 일지맥이 동남쪽으로 향하여 갑자기 낮아져서 연봉을 이루며 이 산에서 발한 계곡이 원각 중앙을 흐르고 있어 계곡 좌우에는 구릉지와 기암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은 영천댐의 물이 넘실거리고 동서의 양편은 높은 산이 솟아 산수가 조화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2) 마을의 역사
원각(元覺), 장밭, 월연(月淵), 인구(仁邱)가 있었으나 1974년 이후 원각을 제외하고 모두 수몰되고 말았다.
▶ 원각(元覺) 이지백(李知白)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할 당시 3개 자연 부락 중 가장 윗마을이라 하여 원각(元覺)이라 하였고 1901년 행정구역 개편 때 뒷산이 기룡산이라 한데서 마을 이름을 용산(龍山)이라고 칭하고 있다. 원각 마을은 벽진이씨(碧珍李氏)들이 주성이며 이맹전(李孟專)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이맹전(李孟專, 1393~148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본관은 벽진,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심지(李審之)의 아들로 구미(龜尾)에서 태어났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419년 천시과거 팔인선(八人選)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입원하여 학업을 닦고 사간원정언(正言) 벼슬에 올라 소격서령(昭格署令)으로서 간언직을 맡았다. 계묘정란 후는 국정에 뜻이 없어 외직으로 거창현감(居昌縣監)에 부임했다.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를 지키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짓봉사, 거짓 귀머거리가 되어 27년간의 긴 세월동안 오직 단종만 생각하며 외인과의 접촉을 끊고 89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떴다. 정조 때에 이르러 이조판서(吏曹判書), 홍문(弘文)ㆍ예문(藝文) 대제학(大提學)을 증직(贈職)하고 정간공(靖簡公)의 시호를 받고 용계서원(龍溪書院)에서 향사 지내는 생육신(生六臣)의 한분이다.
3) 마을의 특징
- 이맹전 부조묘(李孟專 不祧廟, 지방유형문화재 53호) : 세종조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경은 이맹전 선생을 추모하여 조선 정조 10년(1786년) 어명으로 건립한 것이다. 건물은 화강암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 이맹전 제당(李孟專 祭堂, 지방유형문화재 54호) : 1713년(숙종 39) 후손들이 건립한 제당으로 화강암 석대(石台)위에 정면 5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건물
- 용계서원(龍溪書院, 지방유형문화재 55호) : 1782년(정조 6) 왕의 명령으로 자양면 토골에 건립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노항리(魯巷里)로 이건하여 서당으로 개칭하였다. 1976년 영천댐 건설로 현 위치에 다시 이건하였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 익공(翼工) 팔작지붕으로 전면 양쪽에 활주(活柱)가 있으며 측면에 난간을 뚫었다.
- 정씨종택(鄭氏宗宅) 및 묘우(廟宇, 지방유형문화재 72호) : 종택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정세아를 따라 의병으로 활약하며 영천, 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원 정수번(鄭守藩)의 셋째 아들 호신(好信)의 분가주택으로 1620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다. 건물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이다. 또한 묘우는 조선 효종 6년(1655년)에 건립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이다.
- 인구초당(仁丘草堂) : 고종 때 덕행이 탁월한 정진성(鄭鎭聖) 선생의 사저
- 독락당(獨樂堂) 선조 때 승사당 내자시 봉사의 관직을 역임한 이지백(李知白) 선생의 정자
- 용강정(龍岡亭) : 숙종 때 문과급제한 정석임(鄭碩臨) 선생과 역시 문과급제한 그의 아들 정중직(鄭重稷) 선생 양대(兩代)의 정자
- 용산정사(龍山精舍) : 구한말 일제에 항거한 이태일(李泰一) 선생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
- 원계재(圓溪齋) : 벽진이씨 영천문중서 종사(宗事)를 논하기 위해 지은 재사
- 원모재(遠慕齋) : 김준(金濬)과 김응생(金應生) 양대(兩代)의 재사
- 추모재(追慕齋) : 중종시대 중추부지사를 역임한 김흡(金潝) 선생의 재사
(2) 당굿
마을 입구에 큰 당(棠)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에서 얼마 전만 해도 당굿을 하였다. 당굿이란 한밤중에 장작불을 피워 놓고 산 닭을 묶어서 이 불무더기 앞에 두고 사람들이 호랑이 가죽을 그려서 덮어쓰고 농악을 울리면서 불더미 부근을 왕래하다가 그 불더미를 뛰어 넘어 닭을 안고 가버린다. 이 당굿이 생긴 까닭은 옛날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을 헤치므로 이와 같은 의식이 생겼고 닭을 안고 가는 것은 호랑이에게 제물을 먹이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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