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기룡산(騎龍山)에서 뻗은 지맥이 남으로 향하여 힘차게 내려와 여러 개의 연봉을 이루며 이 연봉들이 고이 감싸 구릉지를 형성하여 분지를 이루고 마을에서 정남에 위치한 오미산(烏尾山)은 이 지형의 아름다운 광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으니 예부터 고인(古人)들의 유적이 많으며 지금은 영천댐의 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 회룡(回龍) 뒤에 있는 기룡산(騎龍山)이 마치 꿈틀거리는 용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본동에서 이사를 나가는 사람은 좋지 못하고, 본동으로 이사를 오는 사람은 부유하게 된다고 한다. 이 마을은 약 370년 전에 이만수라는 선비가 개척하고 뒷산이 용이 꿈틀거리는 모양이라서 회룡(回龍)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 마을은 기룡산 중턱에 성현암(聖賢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큰 구멍이 있어 약 1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자암(趙紫岩) 선생이 영천향교에 있는 오성위패(五聖位牌)와 임고서원의 정몽주 선생 영정을 이곳에 이관 봉안하고 또 80세 되는 노모를 봉양했다 하여 후세의 향인(鄕人)들이 성현암(聖賢岩)이라 부르고 있다. 댐 건설후 새로 자양면 소재지가 되었다.
▶ 창말(倉里)ㆍ관방(冠防) 옛날에 나라의 창고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 때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警察官駐在所)가 있었다. 이 마을은 약 380년 전 이정수라는 선비가 관방(冠防)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영천이씨(永川李氏),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수몰되었다.
▶ 동룡(同龍) 동인각(東麟閣)이 있었던 마을이며 경주김씨와 경주이씨, 오천정씨, 기타 성씨들이 거주했다. 수몰선 상단에 현 면소재지가 형성되었다.
▶ 토곡(土谷)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집성촌으로 수몰되고 말았다. 수몰선 상단에 하천재(夏泉齋)를 건립하여 선조의 제향소로 삼고 있다.
▶ 하절 일대(기룡산 유적) 마을 서편 산기슭에 울창한 노송들이 둘레 약2km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우거져 있고 그 도래솔안 벌에 큰 무덤과 비석들이 있으며 그 근처 솔밭사이 사이에는 기와집들이 있다. 이 명당의 둘레 산기슭에는 하천재(夏泉齋, 지방문화재 73호), 강호정(江湖亭, 지방문화재 71호), 호수 정세아 선생 신도비(湖叟 鄭世雅 先生 神道碑), 삼휴정(三休亭, 지방문화재 75호), 오회공종택(五懷公宗宅, 지방문화재 72호), 오회당(五懷堂, 지방문화재 76호) 등 오천정씨 중시조인 정윤량(鄭允良) 선생 후손의 유물들이 서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줄지어져 있다. 원래 이 지방의 각 마을에 산재해 있었던 것을 댐이 됨으로써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이곳으로 이건했던 것이다.
▶ 시총(詩塚)과 충노 억수(億壽)의 묘 이 명당에 또 하나 아름다운 역사가 있으니 이는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있는 두 개의 무덤에 대한 얘기다. 하나는 호수 선생의 맏아들 백암(栢巖) 정의번(鄭宜藩) 선생의 묘소요, 또 하나는 선생 몸종 억수(億壽)의 무덤이다. 주종(主從)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영천복성과 경주성 싸움에 큰 공을 세운 아버지 호수를 따라 출전하였다. 적에게 포위당한 아버지를 구출키 위해 적진에 돌입했다가 죽으니 뒤에 시체조차 찾을 길 없어 이를 애통해하는 친지들의 제문(祭文)과 옷가지를 모아 묻어 무덤을 만드니 이것이 바로 시총(詩塚)이다. 그 옆에 시체 없는 억수(億壽)의 무덤도 함께 있다. 또 자손들은 묘사 때 억수의 충복됨을 잊지 않고 제수를 차려 그 넋을 달래준다.
3) 마을의 특징
영천댐이 생긴 이후 이웃 용산리(龍山里)에 있던 자양면의 각 기관들이 모두 수몰되어 이곳으로 이전됨에 따라 평지에 있었던 마을이 산 중턱으로 이전하였다. 영천~자양~청송으로 연결되던 국도도 모두 산중턱으로 신설되고 도로도 새로 포장되었다.
(1) 문화재
- 강호정(江湖亭, 지방유형문화재 71호)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정세아 장군이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선조(1599) 때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紫湖) 언덕에 정자를 짓고 교우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양옆으로는 방이고 중앙은 대청인 익공(翼工)형의 집이다. 1974년 영천댐 공사로 이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현 위치로 이건하게 되었다.
- 하천재(夏泉齋, 지방유형문화재 73호) :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봉직하던 정호례(鄭好禮)가 선조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조선 인조 15년(1637)에 건립한 재사이다. 경내에는 하천재를 비롯한 4동의 건물과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다. 하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추원당(追遠堂)은 정면 4칸, 측면 1칸에 역시 맞배지붕이다. 또 이곳에는 정세아 장군의 신도비가 있는데 높이 1.8m, 폭 70cm, 두께 25cm이다. 1976년 영천댐 공사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 사의당(四宜堂, 지방유형문화재 74호) :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람들이 건립하여 인격을 높이고 학문을 연구하였다.<정중호(鄭重鎬)ㆍ중기(重岐)ㆍ중범(重範)ㆍ중락(重洛)의 4형제> 순조 2년(1926)에 건물이 낡고 허물어져 자양면 용산리 949번지로 이건하였는데 형태는 축대위에 정면 5칸, 측면 1칸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그 후 1975년 영천댐 공사로 수몰지구가 되어 다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 삼휴정(三休亭, 지방유형문화재 75호) : 조선 인조 13년(1635) 정호신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들이 건립하였다. 건물은 정면 4칸,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그리고 양쪽으로는 방을 만들었고 중앙 2칸과 전면 툇간은 마루를 만들어 누각형식으로 난간을 둘렀다.
- 오회당(五懷堂, 지방 유형문화재 76호) : 오회당 정석현(鄭碩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조 3년(1727)에 관찰사 권대규(權大規)의 후원으로 도내 인사들이 건립하였다. 정면 4칸에 양쪽에 각각 툇간<退間>을 한 칸씩 달았고 측면을 한 칸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툇간을 달아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 삼휴종택(三休宗宅) : 호수 정세아 선생의 첫째집의 3째 손자인 정호신(鄭好信) 선생의 종택, 지방유형문화재 72호
- 용산재(龍川齋) : 숙종 때의 이시참(李時參) 선생의 강론처
- 자천재(紫泉齋) : 고려 말의 문관(文官)으로 감무(監務)를 역임한 이찬(李攢) 선생 재사
- 자계정(紫溪亭) : 조선 중종 때 조광조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조문림(趙文淋) 선생의 강론처
- 하천재(夏泉齋) : 중종 때 이배원(李培源) 선생과 아들 이의(李椅), 동배인 이수눌(李守訥), 이수겸(李守謙) 선생의 재사
강호정, 하절, 오회공종택… 오천정씨 문중 무덤과 유적____________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맑은 날을 기다리며 하루, 이틀이 지났고 어느덧 수요일. 원고마감도 마음에 걸렸고 비 오는 날의 산행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김밥을 주문하고 물과 음료수도 챙겼다.
미리 식사를 해결하고 출발해도 무리는 없었지만 혼자 산에서 도시락을 먹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었다. 추수가 끝난 시간의 여유로움을 간직한 들녘을 지나 영천댐에 이르니 굵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하늘과 산, 물이 하나였다. 김민기가 불렀던 ‘친구’가 생각났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비 오는 날의 영천댐 물은 원래 이런 색이었던가? 오늘따라 유난히 누렇게 보이는 댐 물을 생각하고 있는데 코오롱 마라톤 선수들이 달려온다. 마라톤 선수들은 비가 와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시청에서 18㎞.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천정씨 문중묘소인 ‘하절’과 유형문화재 71-76호로 지정된 강호정, 하천재, 오회공종택, 오회당, 사의당, 삼휴정이 어우러진 곳. 첫 방문 후 느낌이 너무 좋아 울적할 때마다 찾고 싶었던 곳이다.
누렇던 댐 물도 강호정 앞만큼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아직 지지 않은 마지막 단풍잎이나 바닥에 떨어진 샛노란 은행잎을 밟으면서 비록 혼자였지만 늦가을 정취를 만끽했다.
입구에서부터 호수 정세아 장군이 임란 후 고향에 돌아와 자호언덕에 정자를 짓고 여러 교우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강호정, 오천정씨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 정세아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목사인 정호인이 창건한 하천재, 정세아의 넷째 아들인 수번이 그의 셋째 아들 호신의 분가주택으로 건립한 오회공종택, 정석현을 추모하기 위하여 관찰사 권대규의 후원으로 건립한 오회당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중호ㆍ중기ㆍ중범ㆍ중락 4형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사의당과 삼휴 정호신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한 삼휴정이 역사의 풍광을 보여준다. 정호신이 조부인 호수 정세아가 살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 풍경을 노래한 ‘삼휴’는 당시의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좋은 봄날 꽃을 즐기다가 꽃이 지면 쉬고 맑은 저녁달을 즐기다가 달이 지면 쉬고 한적한데 술을 덜어 즐기다가 술이 다 되면 쉬노라”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고도 논공행상에 개의치 않고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 등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조용히 여생을 마친 호수 선생이 강론했던 강호정.
묘터로서는 영천에서 가장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하절은 꼬깔산의 운무와 함께 절경을 보여주었다. 맨 위쪽 호수공 부부의 무덤을 비롯하여 눈어림으로 세어보니 1백 여기 정도 되어 보였다. 백암 정의번 무덤 앞의 작은 무덤에 ‘충노억수지묘’라는 비석이 서있다. 경주전투에서 주인을 구한 충성스러운 종 억수를 기리기 위한 무덤인데 400년 이상을 오천정씨 후손들로부터 제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시로 말을 바꾸고 권모술수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을 보고 억수는 어떤 말이 하고 싶어질까?
이곳에서는 꼬깔산(2.5㎞), 기룡산(5.8㎞), 묘각사(7.8㎞)로의 등산로가 비교적 잘 닦여져 있어 가족이나 단체의 산행도 즐길 수 있으며 어린 자녀들을 동반한 경우라면 1.5㎞정도까지 다녀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산행 후에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충효삼거리에서 화북방면으로 들어가 진한 부부애를 느낄 수 있는 오원복 노인의 무덤을 들러보고 옥간정에서 정만양ㆍ규양 양수선생의 형제애를 느끼는 것도 보람된 여정이 될 것이다.
“기룡이 노니는 그곳에 성혈이 있었네”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와!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빗줄기를 흠뻑 머금은 기룡산 중턱의 산천은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했고 또한 찾아온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양면 소재지를 조금 지나면 왼쪽에 성현암과 신선암의 표지판이 연이어 나타난다. 성혈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비탈길을 거슬러 1㎞정도 올라가면 협곡사이로 신선이 노닐었음직한 풍광이 나타난다.
먼저 신선암 대웅전이 나오고 위쪽으로 50m정도 더 들어가면 성현암이 나타난다. 성현암 왼쪽에 조립식 패널로 입구를 감싼 성혈이 있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는 곳임을 알게 했고 기룡산에서 흘러내린 약수는 심신을 시원하게 했으며 작은 불상도 놓여있었다.
일명 ‘성혈’로 불리는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영정과 영천향교 오성위(五聖位)의 위패를 피난시킨 곳으로 임고서원 원지에 ‘임진년 4월에 왜구가 침입해 심히 급한 시기에 사인 이현남(李縣男)이 선생의 영정을 자양 성혈사(聖穴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듬해에 조종대(趙宗岱)의 계정(溪亭, 지금의 자계정)으로 옮겨 모셨다가 4년 뒤인 정유재란에는 장항(獐項) 명상곡(明爽谷)에 숨겨졌으며 이듬해 원각촌사(圓覺村舍)로 옮겨 봉안했다.
1600년 옛터의 초가 1칸을 지어 봉안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년 만에 도일동에 임고서원을 다시 지어 영정을 옮겨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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