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기룡산에서 뻗은 한 산맥이 서남쪽으로 향하여 작은 연봉을 이루고 그 산기슭에서 발한 시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는 것을 큰 못을 막아 마치 못 안에 뜬 마을처럼 새로운 호수가 형성되었으니 그 광경이 또 장관이다. 더욱 못밖에 형성한 신흥(新興)은 오목한 산골에 아담하고 따뜻한 양지쪽에 있으니 예부터 인심 좋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2) 마을의 역사
▶ 대내실ㆍ다내곡(多內谷) 임진왜란 때 김순부(金順富)의 처 현풍곽씨(玄風郭氏)가 두 아들을 데리고 피난 와서 이 마을을 개척하고 뒷산이 다(多)자형으로 생겼다 하여 다내곡(多內谷)이라 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호2리로 되었다.
▶ 사라들<沙羅谷> 이 마을 앞에 있는 들에서 쌀 생산이 많았으며 들이 금빛 나는 모래흙으로 되어 있어 사라들이라고 하였다. 오천정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는 신호1리에 속해 있다.
▶ 야수골<也水谷>ㆍ신흥(新興) 최헌(崔憲)이란 선비가 약 420년 전에 이곳을 처음 개척하여, 마을 모양이 也(야)자형으로 생겼다 하여 야수골이라 하였다. 그 후 약 260년 전에 이씨(李氏)가 이 마을을 다시 이루었다 하여 신흥(新興)이라 개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호1리로 되었다.
3) 마을의 특징
- 용호서당(龍湖書堂) :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공이 많은 김상기(金基相), 김애상(金愛相)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서당
- 전적지 :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인민군이 침입하여 인민공화국이 되었으며, 당시 2km밖에서는 국군 제8사단 22연대가 대응하여 치열한 싸움을 하였으며 9월 15일 인민군은 패하고 말았다.
이 마을에 있는 고목을 벌채하여 제재소에 가져가면 제재해 주지 않는다. 나무의 여러 곳에 탄두와 포탄파편이 박혀 있어서 ‘톱’을 못쓰게 한다고 한다. 이 정도로 피아간의 탄환이 오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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