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108. 사천리(沙川里)|

이원석(문엄) 2011. 11. 14. 08:42

1) 마을의 자연환경

기룡산맥이 서남을 뻗어오는 끝에 구릉지가 형성되고, 고현천 굽이치는 맑은 물이 마을 앞 언덕을 감돌아 흐르고, 동남간으로 펼쳐지는 넓은 들은 이 마을의 곡창지대를 형성하며, 개울가의 묵은 숲은 넓은 공지와 여름의 녹음을 조성하고 있다. 개울을 건너 멀리 보이는 기암절벽은 그 광경이 아름답고 넓은 들과 편리한 교통은 예부터 사람살기에 편리하고 또 이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행적들도 많은 곳이다.

 

2) 마을의 역사

▶ 상뜸ㆍ중뜸ㆍ하뜸ㆍ사라골<沙羅谷>ㆍ효자문(孝子門) 처음 정착하여 이 마을을 개척한 분은 미상이나, 그 후 약 420여 년 전 오천정씨 차순(次淳)이라는 분과 양산이씨(陽山李氏) 득정(得禎)ㆍ득록(得祿) 형제, 그리고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이곳에 우거,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 냇가에 금빛 나는 고운 모래가 많이 있기에 사라골이라 칭하여 왔다고 한다. 또한 정억(鄭嶷)ㆍ정잠(鄭岑) 형제가 효행이 지극하였다 하여 효자문(孝子門)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천1리로 개칭되었다.

 

▶ 안노방<內老方>ㆍ늘바우<노방(老方)>ㆍ상노방(上老方) 이 마을은 백연(白淵)이라는 분이 약 420년 전 처음 개척하여, 마을 위치가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늘바우라고 불러왔다. 얼마 후 김치해(金致海)라는 사람이 노방(老方)이라고 한자음으로 고쳤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사천2리가 되었으며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매배이ㆍ매방골<梅方谷> 처음 정착한 분은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방에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을 네방이라 불러 왔으나, 그 후 매방(梅方)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천2리가 되었다.

 

3) 마을의 특징

밀양박씨들의 420여 년간의 세거지이다. 증판서참의(贈判書參議)를 역임한 이성(李晟) 선생이 현 사천에 이거해 생존하였고 그의 아들 번영(蕃英), 손자 형제 득록ㆍ득정 중 형은 생존하였고 동생은 사천전(沙川戰)에서 전사했다. 학문하는 형의 거처에 왜군들이 와보고는 이곳은 서림(書林)이니 돌아가자고 했다한다. 학문하는 형과 순절한 아우, 이 형제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상들의 뜻을 빛내고 자손들의 번창을 꾀하려고 노력하는 마을이다.

정억이라는 선비는 오천인인데 천성이 지효하여 어버이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하고, 병든 어버이의 변을 맛보아 쓰면 걱정 없고 달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로서 병의 치유, 불치를 판가름하고, 겨울에 생고기회를 원하기에 개울에 가서 하늘보고 기도하고 큰소리로 우니 큰 고기가 튀어나왔다는 전설이 있으며, 돌아가심에 시묘살이 한즉 호랑이가 와서 도와주고, 임란이 나 외적들이 침입하였으나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천성이 효자라는 사실을 선조대왕은 들으시고 정려각을 하사하셨다. 그 자손들이 일부 세거해 오고 있다.

- 정려각(旌閭閣) : 사천1리 국도변에 있으며, 정 선생의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것이다.

- 만휴정(晩休亭) :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을 역임한 이승수(李承須) 선생의 정자. 명종 때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방화재(芳華齋) : 숙종 때 현의 어풍을 진작시킨 경주김씨, 구산박씨, 순흥안씨, 오천정씨의 네 문중이 합해서 지은 재사

- 장학소(獎學所) : 이승수 선생의 학당. 충간공의 기적비가 있다.

- 학송재(鶴松齋) : 기묘사화 때 황해도 찰방을 버리고 영천으로 이거한 안우곤(安愚坤) 선생의 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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