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53. 계포리(桂浦里)

이원석(문엄) 2011. 11. 13. 09:24

1) 마을의 자연환경

팔공산에서 동으로 뻗은 한 지맥이 연봉을 이루어 구릉야산이 되었다가 산맥이 그치는 곳이며, 문산제(文山堤)에서 흐르는 시내와 와곡제(瓦谷堤)에서 흐르는 두 물이 마을 앞에서 합수되어 청통천의 중류를 형성하고 구릉의 밭과 들의 논에서는 농산물이 많으므로 예부터 사람들이 살기에는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2) 마을의 역사

▶ 대재(大才) 조선시대 성종이 조정에서 신하와 선비들을 모아놓고 조정 내에도 쥐가 있느냐고 묻자 여러 대신들과 선비들 가운데 윤죽재(尹竹齋)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고 한다. 고양이를 기르는 가정에는 쥐가 진입하지 못합니다. 이런 명답을 하여 윤죽재는 왕으로부터 큰 재주꾼이라고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큰 재주가 있는 사람이 난 마을이라 해서 대재(大才)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낭산(朗山)과 김성칠(金聖七) 등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도 이 마을사람들은 언젠가 또 대재가 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 대포(大浦) 대재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큰 강이 하나 있는데 이 강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포(大浦)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비옥하고 물 대기에도 용이한데다 주위의 경치가 좋다.

▶ 보통골ㆍ하계(下桂) 이 마을 뒤편에 옛적부터 여러 가지 나무로 된 숲이 사시사철 우거져 있다고 하여 사람들이 하계(下桂)라고 불렀다.

     

죽재(竹齋) 윤긍(尹兢)<∼1493(성종 24)> ____________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초명은 흠(欽), 자는 경부(敬夫), 호는 죽재(竹齋). 증 이조참판 헌(憲)의 아들이다.

16세 때 생원, 진사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450년(세종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올랐다. 이조정랑의 벼슬에 있을 때 성종이 묻기를, “내 집에 쥐가 있느냐?” 하자, 다른 대신들은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고양이를 기르면 쥐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고 하여, 왕이 크게 칭찬하였다. 이때 일두 정여창(鄭汝昌)ㆍ한훤당 김굉필(金宏弼) 등의 인재를 천거하여 참봉에 임명하게 하였다.

노령으로 사직하고, 영천 팔공산 밑 대재촌(원래는 장승촌이었는데 성종임금께서 선생의 재주를 찬양하기 위해 대재촌이라 마을이름을 고치게 하였다.)에 들어가 집을 짓고 당호를 죽재라 하였으며 향당정풍잠(鄕黨正風箴)을 지어 그 지방의 풍속을 순화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당시 이름난 선비였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사가 서거정(徐巨正), 추강 남효온(南孝溫) 선생 등과 같이 성리학을 논의하였다. 1493년 70여세에 세상을 마치니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묘소 밑에 신원사를 짓고 공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였으며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참고문헌 : 영양지(永陽誌), 익양지(益陽誌), 연계록(蓮桂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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