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서부동(西部洞) - 15. 교촌동(校村洞)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41

1) 자연환경

마현산 서남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마현산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고 남쪽으로는 과전동과 성내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동쪽으로는 창구동과 문내동이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화룡동과 경계를 만들고 있다. 지금은 마현산 공원이 되어 있으며 6ㆍ25전적비, 충혼탑 등이 건립되어 ‘호국의 고장’ 영천의 상징이 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교촌동은 마을 뒤편에 위치한 마현산 비탈에 향교가 있어 명명된 마을이다. 행정명칭으로는 노상동(路上洞), 교촌동(校村洞)이 내서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조정 때 내동면 창구동 일부와 합하여 교촌동 1ㆍ2구로 명명되고 영천면에 속하였다. 그 후 다시 1981년 영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교동(校洞)에 속하였다가 1998년 서부동에 속하게 되었다.

▶ 향교골ㆍ교촌(校村) 영천군 서부면의 지역으로서 영천향교가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향교골 또는 교촌동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상동(路上洞)과 내도면 창구동(倉邱洞)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영천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시지역의 마을로 인근의 자연부락과 연결되어 발전하고 있다.

▶ 지당골 향교 동쪽의 계곡마을로 옛날 당나무가 있어 해마다 마을사람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당(堂)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향교골과 연결되어 있다.

▶ 깍골ㆍ깟골 충혼탑 뒤편의 계곡마을이다. 이 계곡은 화룡동(化龍洞) 쪽으로 뻗은 입구보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며 거꾸로 된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또는 갈퀴처럼 생긴 골짜기라 하여 깟골이라고도 부른다.

▶ 새애골ㆍ샛골 사이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교촌동과 창구동 사이의 좁고 깊은 계곡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금은 시 지역에 연결된 촌락으로 변했다.

▶ 새마리ㆍ서만리(西萬里) 영화초등학교 동편의 마을로 명나라 이여송이 혈혈(血穴)을 자르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곳이라 해서 전해진 이름이다. 또는 영천으로 들어오는 국도라 하여 서쪽으로 만리를 갈 수 있는 출로(出路)라 하여 서만리라 한다.

▶ 노상동(路上洞) 교촌 북쪽의 마을로서 향교 쪽으로 통하고 있는 큰길 뒤쪽의 마을이라 해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동네 뒤에 잿고개라는 산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화약을 폭발시켜서 재를 날려 성안에 있는 왜군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 큰 전공을 올렸다고 해서 전해진 이름이다.

▶ 읍소(邑所) 구 읍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구 엽연초 생산조합 부근으로 최초로 영천읍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3) 마을의 특징

(1) 영천향교(永川鄕校, 보물 제616호)

영천시 교촌동 46번지에 소재한 영천향교는 1502년에 건립하였고 명종 때 명륜당을 건축하였다. 1570년에 실화로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중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성전 5칸, 명륜당 5칸, 동재 3칸, 서재 3칸, 유래루 4칸, 전사청 2칸, 신삼문 3칸, 관리사, 삼일재 등의 건물이 있다.

(2) 영천지구전적비

1980년 건립한 이 비는 6ㆍ25동란 때 치열했던 영천지구전투를 상기하기 위해 세운 비다. 비의 높이는 9.05m, 동상의 높이는 2.7m이다. 위치는 영천시 교촌동 산 11-33이다.

(3) 충혼탑(忠魂塔)

영천시 교촌동 산 215-1에 소재한 이 탑은 1963년 6월에 건립한 것이다. 6ㆍ25전투 때 영천지역에서 전사한 국군장병 1,250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