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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재발견(1)-경주 낭산

이원석(문엄) 2010. 1. 30. 21:31

선덕여왕 잠든 경주 낭산 … '신성 신라'도 잠들어 있더라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경북의 재발견 - 1.경주 낭산(狼山)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경주 낭산

 

신라천년의 찬란한 경주의 '불교문화'와 안동 '유교문화', 고령의 '대가야문화' 등 경북은 한국문화의 원형이다. 경북일보는 위풍당당한 호랑이해 2010년을 맞아 한국 문화의 원형을 찾아나서는 의미있는 특집을 연재 한다.

통일신라의 초석을 마련한 신라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낭산을 시작으로 경북지역 곳곳에 산재한 문화재와 명소를 찾아 문화유산해설사 등 재야 고수들의 안내로 선조들의 숨결을 다시 느껴 본다. 편집자

"경주시 배반동에 자리잡고 있는 낭산은 해발이 불과 100여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선덕여왕릉과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 대군을 물리친 신라 최대 호국사찰인 사천왕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사찰 황복사를 품은 명실상부한 서라벌의 진산(鎭山)입니다."

 

선덕여왕릉

 

경주에서 태어나 문화재와 함께 해온 고복우(51) 경주문화원 사무국장은 '낭산은 경주 문화재의 중심'이라며 낭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연말을 맞아 바쁜 시간이지만 취재에 흔쾌히 응해준 고 국장과 함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난달 29일 낭산을 둘러봤다.

문화원 업무와 박물관대학 등 각종 단체와 모임에서 문화유산해설을 해 오고 있는 고 국장은 낭산에 대한 역사와 이면에 얽힌 이야기를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 나갔다.

"예전에는 경주지역 사람들조차도 낭산을 모를 만큼 역사에서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죠, 문화재를 연구하는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었고 그나마 세인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해 전문가들에게도 인기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지역 모 초등학교 교사가 교과서에 실려있는 '낭산(狼山)'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남산(南山)'의 오기(誤記)라고 설명을 했다가 어린이박물관학교 답사를 다녀온 학생이 낭산이 맞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선생님의 체면이 말이 아닌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사천왕사지 터의 목과 등이 잘린 거북석상

 

이처럼 잊혀졌던 낭산이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를 끌면서 예전과 같은 '서라벌의 중심'으로 복원됐다.

찾는 이가 없어 인적이 뜸하던 낭산에는 선덕여왕을 친견(親見) 하려는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낭산을 찾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선덕여왕릉을 찾고 있습니다. 누에고치 모양을 한 낭산 두개의 봉우리 중 남쪽 정상에 자리잡은 선덕여왕릉 가는 길은 춤추는 듯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하늘을 볼 수 없다가 정상에 있는 왕릉에 다다르면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면서 마음이 환해지는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1천300여년전에 이곳에 잠든 여왕이 환한 미소로 이들을 맞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터만 남은 사천왕사지

 

한반도 최초의 여왕으로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선덕여왕이 묻힌 낭산은 신라시대에 신이 내려와 놀던 '신유림'으로 불리던 신성한 곳이었다. 따라서 왕명(王命)으로 '신유림'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했다.

"낭산은 실성왕 12년인 413년, 산위로 누각처럼 생긴 구름이 뜨고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나 신령이 내려와 노닐어 '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해서 '신유림'으로 불렸습니다. 따라서 마을 이름도 하강선, 상강선 등 '강선 마을'로 통합니다.

그 이후 낭산은 신들의 특별한 공간으로 보호돼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낭산 자락에는 선덕여왕릉을 비롯해 진평왕릉,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 등 유난히 많은 왕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이리가 누워있는 형상이라는 '낭산'이라는 지명은 후대에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낭산은 '신들이 노니는 숲'인데다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인 '도리천'으로 알려져 신성시되던 곳이었습니다."

 

고복우 경주문화원 사무국장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던 신라 선덕여왕은 불교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의 안녕을 도모하는 불국토(佛國土) 건설에 힘을 쏟고 자신도 불교의 이상향인 도리천에 잠 들었다.

"삼국유사 속에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기삼사'란 선덕여왕이 선견지명으로 예측한 세 가지 일화로, 그 중 하나가 그녀의 능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어느날 불현듯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거든 도리천(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천(六天)의 제2천)에 묻어 달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되묻자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후 선덕여왕이 숨진 30여년 뒤 그 능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습니다. 불가에 따르면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선덕여왕의 말대로 낭산의 남쪽이 도리천이 되는 셈입니다."

낭산 자락에는 선덕여왕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덕여왕의 부친인 진평왕릉, 신문왕릉, 효공왕릉, 신무왕릉이 있고 사천왕사와 황복사, 망덕사, 중생사 등 유명 사찰터가 산재해 있다. 그 중 사천왕사와 망덕사에 관한 얘기는 흥미롭고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을 통일했으나 당나라가 신라를 복속하려는 야심으로 50만대병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 문무왕은 의상의 권유에따라 명랑법사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 밀교의 비법)을 행하니 50만 당군이 신라군과 접전을 하기도 전에 풍랑이 사납게 일어 배가 뒤집혀 수장(水葬)돼 나라를 구한 사천왕사는 신라 최대 호국사찰입니다. 최근 발굴이 진행중인 사천왕사는 목탑지 기단에 녹유전이 배치된 것이 확인됐고 앞으로 문두루비법에 관한 유적을 발굴해 비법에 대한 의문이 풀릴지 기대됩니다. 또 사천왕사 남쪽에 있는 망덕사지(望德寺址)는 찾는 사람이 드문데 아주 중요한 곳 입니다. 당나라 군이 문두루비법으로 참패하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당나라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라는 사신을 파견했는데 신라가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망덕사로 유인한 역사적 사실이 서려 있습니다."

 

"드라마 방영후 찾는 이 늘어 반짝 인기 되지 않았으면 …"

 

고복우 경주문화원 사무국장

"경주 낭산은 신라 궁궐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진산으로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역사가 살아있는 생생한 현장입니다. 최근에는 사천왕사 서쪽 귀부에서 끊어진 문무왕의 단비(斷碑)가 재발견 돼 세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고복우(51·사진) 경주문화원 사무국장은 이같이 경주 낭산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선덕여왕릉이 주목받기 이전 오래전부터 새벽마다 왕릉을 깨끗이 청소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드라마 방영 이후에는 왕릉에 꽃과 차, 향을 올리는 발길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아마도 1천300여년전의 선덕여왕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요?"라며 낭산에 얽힌 얘기를 소개한 고 씨는 최근에는 '선덕여왕릉에 꽃을 바치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소문과 함께 젊은 연인들이 많이 찾기도 한다고 전했다.

고 씨는 낭산이 '반짝 인기'에 그치지 말고 역사의 현장으로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며 경주시의 자전거 트레킹 코스와 낭산 둘레길을 조성 소식을 반겼다.

 

◇답사 팁 !

낭산 답사에는 드라마 선덕여왕 방영이후 널리 알려진 선덕여왕릉과 신라시대 최고의 조형예술가로 추앙 받고 있는 양지스님의 작품인 녹유전을 감상하는 것이 좋다. 선덕여왕을 찾아가는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하늘을 가려 마치 1천300여년전의 역사의 터널을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길을 걸으면 자연이 반기고 역사가 말을 걸어 온다. 사천왕상으로 알려진 녹유전은 현대인들도 감탄할 만큼 조형성이 뛰어난 걸작이다. 일제시대 동해남부선 철로를 개설하면서 호국사찰 사천왕사를 두 동강 내 버린 역사의 슬픈 현장도 볼 수 있다. 특히 보문 들녘을 사이로 부녀가 마주보고 있는 진평왕릉에서 낭산을 바라보는 늦가을 풍경은 '경주 가을'의 백미다. 진평왕이 통일의 기초를 마련 하느라 고생한 딸 선덕여왕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이버지의 따뜻한 눈길을 느낄 수 있다.

 

경북일보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