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아득한 1천522년전인 488년, 신라의 수도 경주 남산(南山) 동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연못 속에서 나온 노인이 왕에게 전해 준 편지 내용 해석을 두고 왕과 신하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편지 겉봉에 '떼어보면 두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는 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감동을 주는 문화유산해설사'로 명성이 높은 김윤근(66) 신라문화동인회장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남산 자락에서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서출지에 관한 설화를 온몸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털어놨다.
"신라 제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함)이 즉위한지 10년되는 무진년(488년)에 천천정에 행차할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소서'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이 말을 탄 무사들에게 명령해 뒤따르게 했습니다. 왕의 일행이 남쪽으로 피촌(지금의 양피사촌으로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도착했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는데 일행들이 주저주저하며 그것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 버리고 길가에서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편지를 주었습니다. 이 편지 겉봉에 문제의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던 것이지요. 호위 무사가 와서 그것을 바치니 왕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하기를 "두사람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떼지 않고 단 한사람만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자, 왕의 말을 듣고 있던 일관(日官)이 말씀 드리기를 "두 사람이란 것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것은 왕입니다"라 하자, 왕도 그렇게 여겨 편지를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 속에는 '거문고 집을 쏘라'는 뜻의 '사금갑(射琴匣)'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내용대로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 집을 보고 활을 쏘았는데 그 속에는 놀랍게도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는 중과 궁주(宮主)가 은밀하게 사귀면서 간통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을 처형했습니다. 여기에서 궁주란 비빈(妃嬪) 또는 왕의 친척인 것으로 추정되나 박창화가 필사한 '화랑세기'에는 '왕궁에는 왕의 비빈을 위한 집을 '궁'이라 칭하고 그 궁의 주인 되는 비빈을 '궁주'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속에 매년 정월 첫 돼지날과 첫 쥐날, 첫 말의 날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삼가서 함부로 움직이지 아니했습니다. 정월 보름을 까마귀의 제삿날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를 지냈으니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편지가 나온 못을 서출지라 이름 붙였습니다."
김윤근 회장은 마치 눈으로 본 듯이 설화를 생생하게 이야기했다. 김 회장은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들일 것이 아니라 설화가 형성된 시대적 상황을 파악해 그 배경을 추정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서출지 설화의 시대적 배경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흐른 시기입니다. 설화 내용에 불교의 중이 왕의 비빈과 간통을 하다가 들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오고 있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왜 왕이 아끼는 비빈과 은밀히 간통을 하는 대상자를 중으로 설정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신라 전통 종교 세력이 외래 종교인 불교의 공인에 대한 반발심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서라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전통 종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신라에 전래된 불교에 의해 설 자리를 잃으면서 불교를 신라에서 퇴출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전통 종교인들은 불교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격'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특히 불교가 전래되면서 신라 왕실이 불교에 심취하면서 서라벌을 불교의 이상향인 불국토(佛國土)로 만들려는 시도에 위기감을 느끼게 됐을 겁니다. 왕실이 그동안 의지해 왔던 전통종교 보다 불교에 의지하면서 불교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종교는 한마디로 '퇴출'의 위기를 맞은 것이지요. 거기에다가 불교가 왕실에서 일반 대중에게로 확산되면서 전통종교의 기반이 위태로워 졌습니다. '왕실'에 이어 '백성'에게까지 기반을 잃을 처지에 놓인 것이지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대책으로 중을 부도덕한 무리로 만들어 불교를 퇴출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왕실과 떼어 놓기 위해 왕의 분노를 살 만한 사건을 만드는 것이 키 포인트 였겠지요.
그래서 왕이 가장 아끼는 비빈을 중이 간통하는 것으로 꾸며 왕의 분노를 유발시켜 자연스레 불교의 세력약화를 도모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완벽하게 꾸며진 이야기로 불교를 서라벌에서 영원히 추방을 하고 전통종교가 예전의 위상을 찾으려는 '고도의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 전통종교가 세력을 잃지 않고 불교에 대항한 사실도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만큼 뿌리가 깊었던 것으로 파악을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불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통종교에 접목해 우리의 종교로 발전을 시켰습니다.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특유의 '경상도인의 정서'가 살아 있는 것이지요"
"서출지 설화는 전통과 현대의 충돌 의미"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장
"서출지 설화는 '전통'과 '현대'의 거대한 문화적 충돌입니다."
김윤근(66·사진) 신라문화동인회장은 일반적인 문화유산해설의 차원을 넘어 '설화'를 문명사적인 사건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전통과 현대의 충돌로 인한 갈등이 있게 마련이지요. 아득한 1천500여년전인 신라시대에도 전통종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와의 마찰은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즉 '전통'의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보수와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는 진보세력의 다툼으로 인한 필연적인 하나의 사건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통과 현대의 충돌에서는 보수의 반발이 일정기간 동안 지속되다가 사라지고 진보가 다시 '새로운 진보'를 만나 보수로 바뀌면서 역사가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 당시 신라 왕실이 보수세력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불교의 진리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또 '왕즉불(王卽佛)'사상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왕이 곧 부처다'라는 논리를 제공해주는 왕즉불 사상은 신라 왕실로서는 백성을 통치하기에 더없이 좋은 '통치 이념'이었을 겁니다."
'설화'를 단순히 전해오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진보 과정의 하나로 주장하는 김윤근 회장은 "서출지 설화에는 뭇 생명을 중요시하는 불교의 세계관이 숨어 있다"고 강조했다.
"불교는 인간 뿐만아니라 동물과 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佛性)이 있는 고귀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동안 추운 정월에 '까막 까치 밥'을 집 주변 나뭇가지나 담장 등에 갖다 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왕의 목숨을 구해 준 까마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특히 추운 겨울에 먹이를 구하지 못해 생사(生死)의 기로에 놓인 까마귀를 비롯한 동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불교의 보시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설화는 단순한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