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시와 연애를 하자(장병훈 편집위원)

차표 한 장 - 강은교(1945~)

이원석(문엄) 2009. 8. 10. 08:31

                                                                                                       
바람이 그냥 지나가는 오후, 버스를 기다리고 있네, 여자애들 셋이 호호호― 입을 가리며 웃고 지나가고, 헌 잠바를 입은 늙은 아저씨, 혼잡한 길을 정리하느라, 바삐 왔다갔다하는 오후, 차표 한 장 달랑 들고 서 있는 봄날 오후, 아직 버스는 오지 않네
아직 기다리는 이도 오지 않고, 양털 구름도 오지 않고, 긴 전율 오지 않고, 긴 눈물 오지 않고, 공기들의 탄식소리만 가득 찬 길 위, 오지않는 것투성이
바람이 귀를 닫으며 그냥 지나가는 오후, 일찍 온 눈물 하나만 왔다갔다하는 오후
존재도 오지 않고, 존재의 추억도 오지 않네
차표 한 장 들여다 보네, 종착역이 진한 글씨로 누워있는 차표 한 장.
아, 모든 차표에는 종착역이 누워있네.

 

 

차표를 끊는 순간, 길게 누워있는 기다림이 보이네

아, 그렇습니까? 차표 한 장에는 ‘공기들의 탄식소리만 가득 찬 길 위, 오지않는 것투성이’입니까? 아, 그래서 차표를 움켜 쥔 손들이 외로워지는 것이었군요. 역시 기다리는 것들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뿐이군요. 그렇다면 차표를 끊고 난 이후의 마음을 외롭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바꾸어야겠군요.

외로움에도 향기가 있는 것이겠지요?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기다리느냐에 따라서 외로움의 빛깔에도 차이가 있는 것 맞겠지요? ‘차표 한 장 들여다보네, 종착역이 진한 글씨로 누워있는 차표 한 장, 아, 모든 차표에는 종착역이 누워있네.’ 아무래도 기다림의 눈썹이 짙을수록, 종착역 또한 진한 글씨로 각인되겠지요.

 

   
▲ 장병훈 편집위원

시인 장병훈은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통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동리목월문학관의 ‘詩作나무’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화룡동 산 7번지의 선화여고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문학동아리 ‘좁은문’지기를 하고 있다.

* 영천뉴스24 블로그인 <별빛촌닷컴>(http://www.01000.in)을 방문하면 장병훈의 <시와 연애를 하자> 전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