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답사와 여행이야기(이원석 편집위원)

‘봉황은 조양에서 운다’ 영천문화 일번지

이원석(문엄) 2008. 10. 6. 10:41

‘봉황은 조양에서 운다’ 영천문화 일번지 

‘영남 7대루’ 조양각, 명현 시액 70여점 남아

 

영천경찰서가 금호로 이전하고 시ㆍ군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군청마저 사라져 창구동 일대의 상권이 많이 위축됐다.

   

 

그러나 조양공원 내에 문화원이 있고 이 일대와 조양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강변 둔치에서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활발히 열리면서 창구동은 여전히 영천문화 일번지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창구동은 예부터 영천지역의 가장 중심부를 이룬 동네로 북쪽으로는 마현산 주봉이 버티고 있고 남으로는 남쪽천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문내동과 인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교촌ㆍ과전동과 접하고 있다. 특히 이 동네는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옛날 남문과 북문이 모두 있었던 지역이다. 타 지역에서 온 손님과 조양공원을 찾게 되면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너무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또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서세루에 올라서서는 “원래는 주남평야를 가로질러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채약산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하던데 앞을 답답하게 만드는 저 고층아파트는 누구 작품이냐”는 핀잔도 자주 듣게 된다.

   
▲ 영천지구 전승비

처음에는 명원루(明遠樓)라고 불렀다고 전하는데 사가 서거정이 지은 기문에 ‘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遠目增雙明)라는 당나라 명문장가 한퇴지의 시에서 따온 말이라고 적혀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보현산에서 원류가 된 남천과 북천이 영천 중심지에서 합류해 금호강을 이루는 남천의 절벽 위에 지은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누각으로 진주 촉석루,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 울산 태화루, 양산 쌍벽루, 김해 연자루와 더불어 영남 7대루의 하나로 손꼽힌다.

1482년 군수 신윤종이 동서 별실을 고쳐서 동을 청량당, 서를 쌍청당이라 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1637년 군수 한덕급이 그 자리에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朝陽閣)이라 이름했다.

조양이란 시경 대아권아편에 “봉황이 우는도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가 자랐도다! 저 산의 동쪽에 잎새가 싱싱하다 오동나무여! 화창히도 우네 봉황새여!”란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예로부터 영천의 지세가 ‘나는 봉황새’모양이라 “봉황은 조양에서 운다”는 권아편의 싯귀를 따서 누각이름을 조양각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봉황이 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니 ‘서세(瑞世)’인 것이다. 다시 1742년(영조 18) 당대의 명필인 군수 윤봉오가 조양각을 중창해 손수 서세루(瑞世樓)란 현판을 써 달았다.

   
▲ 사현대

현재는 좌우 별실 등 부속건물은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조양각 건물만이 포은 정몽주, 사가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율곡 이이, 노계 박인로 등 당대 명현들의 시액(詩額) 70여 점을 간직한 채 날아갈 듯 웅장하게 서 있다.

이후 영조 38년(1763), 정조 21년(1797), 순조 10년(1810), 고종 7년(1870), 고종 23년(1886)과 1921년에 각각 중수했다고 전한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영천 심상소학교를 지을 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건축물을 철거해 지금과 같이 위축되고 말았다.

   
▲ 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간에 걸친 영천지구 공방전은 한국전쟁의 국운을 바로 잡는 큰 전투였다.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1만5천여 명(아군 7개 연대, 적군 5개 연대)이었고 화력은 아군이 60미리포 26문과 57미리 대전차포 6문에 비해 적군은 76미리포 38문과 12미리포 12문, 전차 12대였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 적 사살 6,799명, 포로 309명, 전차 7대, 차량 85대, 화포 14문, 소총 2,327정을 노획하는 등 혁혁한 공과를 올렸다. 문화원 뒷마당에 있는 영천지구 전승비는 이와 같은 전공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비신의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 건너편에서 본 조양각(사진제공 비바리)

조양공원 내에 건립된 황성옛터 노래비는 황성옛터, 대한팔경 등의 작품을 남겼고 올해 탄생100주년을 맞은 왕평 이응호(1908∼1943)를 기려 지난 1989년에 세웠다.

백신애 표지비는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며 꺼래이, 적빈, 아름다운 노을 등의 작품을 남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백신애(1908∼1939)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94년 우리문학 기림회에서 세운 것이다.

또 산남의진비는 구한말 의병으로 연일, 죽장, 영천 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산화한 산남의진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의 후원을 받아 1963년 3월에 세워진 것으로 화산암 2층 기단 위에 비문의 글은 풍산 유석우가 지었고 해주 오규석이 썼다.

조양공원 오른쪽에는 지금까지 영천을 다스린 목민관 중에서 업적이 분명한 사람들의 선정비를 모아둔 사현대(思賢臺)가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