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답사와 여행이야기(이원석 편집위원)

[스크랩] 임고 양항리 임고서원

이원석(문엄) 2007. 7. 15. 23:45

 

'동방이학지조' 만고의 충신 포은 정몽주 배향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지난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성역화 사업을 통해 웅장한 규모를 갖춘 임고서원을 다시 방문하니 경상북도기념물 제63로 지정된 은행나무의 잎사귀들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서원 옆쪽의 논에서는 농부가 지난해 이맘때와 같이 볏단을 묶으며 결실을 마무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해동에 의인이 났다’(목은 이색), ‘나는 비로소 학과 행에 있어서 스승을 만났다’(이존오)며 당시의 대학자들이 추앙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굳은 절개가 살아 숨 쉬는 서원 내에도 만추의 계절 가을향이 물씬 느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영주의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사액된 임고서원은 진사 노수, 생원 김응생, 향로 정윤량, 생원 정거 등 4현이 중심이 되어 1555년 원래 선생이 태어난 우항리 인근 부래산 아래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3년 이곳에 중창했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65년 다시 지었으나 협소하고 서원법규에 맞지 않아 영천유림들이 합심하여 국비지원으로 지금의 서원이 완비되었다.뒤쪽에 자리 잡은 묘우는 선생의 시호를 따서 문충사라 하고 예전에는 포은선생을 주향으로 여헌 장현광과 지봉 황보인을 추배했으나 지금은 포은선생과 지봉선생만을 모시고 있다. 강당인 흥문당과 동서재,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과 유물보호각인 진영각과 문루인 영광루가 있어 서원의 면모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 현판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윤봉오 군수가 썼고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임고서원에는 선생의 영정과 소장도서가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5백여 년 풍상을 겪으며 묵묵히 서있는 은행나무와 우항리의 효자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소장전적은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 회찬송악무목왕정충록, 논어언해, 심원록, 임고서원 전곡십물범례등록, 임고서원 장악계안 부 절목, 환성사결입안, 임고서원 범규, 서원규범 등이고 인조기사모본 정몽주 영정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337년(고려 충숙왕 6) 외가인 임고 우항에서 아버지 고려 수문하시중 운관 공과 어머니 변한국부인 영천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릴적 몽란, 몽룡으로 불리다가 관례 후에 이름을 몽주라 고쳐 불렀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한 아들의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장차 대성시키기를 결심한 나머지 백로가(白鷺歌)를 지어 간곡히 훈계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올세라 /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러 일까 하노라” 이 시에는 이씨부인의 고절한 인품과 자식교육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선생은 백로가의 훈계를 늘 가슴에 새겨 대의를 지켜 물욕에 초연했다. 1355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산소 곁에 움막을 짓고 기거를 하면서 살아계실 때 못다 한 효도를 하면서 3년동안 여묘살이를 했다. 당시만 해도 부모상에 대한 예법이 미비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백일상을 지냈으나 1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 사람들이 행하지 않는 3년상을 여묘살이로 마치면서 효에 모범을 보였다.

또한 여진족과 왜구정벌에 큰 공을 세웠고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어려운 외교문제를 해결했는가 하면 성균관에서 경서를 강의하니 이색은 선생이 성리학에 밝음을 극구 찬양하여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까지 했다.

또 주자가례를 준수하고 사당을 지어 부모와 조상들의 제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지냈으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이방원이 아버지인 이성계를 문병하러온 포은선생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술자리에서 하여가를 부르니 선생이 단심가로 화답하며 일편단심 충성심을 보이자 1392년 4월 4일 선지교(選地橋)에서 심복 조영규 등을 시켜 선생을 살해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다리의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 하여 다리 이름을 선죽교(善竹橋)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굳게 지켜 마침내 만고의 충신으로 우리들 가슴속에 충절의 사표로 남게 된 것이다.조선 태종 원년(1401)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된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깊어가는 가을, 자녀들을 데리고 포은 선생의 사당인 문충사를 참배한 후 이씨부인이 남긴 백로가를 들려주고 선생의 충절이 아로새겨진 단심가를 함께 읊으면서 충과 효를 가르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출처 : 영천뉴스24(yc24.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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