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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사는 친구에게서 영천으로 오는 길인데 가벼운 산행이 하고 싶다며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김밥과 음료수를 준비해서 버스터미널로 마중 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선지를 두고 갈등이 많았다. 나름대로 영천을 대표하는 명소를 선정하느라 애를 먹었다. 은해사로 가서 백흥암~중암암이나 기기암 등 암자를 둘러볼까? 아니면 자양으로 가서 기룡산 묘각사를 구경하거나 정각리 별빛마을에서 보현산천문대를 올라갈까? 생각나는 몇 곳의 특징을 얘기해주니 친구는 마침 더운 날씨였던 터라 폭포가 멋들어진다는 말에 치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평일이어서인지 치산은 조용했다. 중단된 온천개발현장은 방치된 채 식수를 뜨러 온 몇몇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저수지공사에 동원된 덤프트럭들이 흙먼지를 날리고 있었다.팔공산에서 북으로 뻗은 2개의 지맥이 갑자기 날아져 구릉지를 이루고 구릉지 사이에는 큰 계곡을 형성하고 있는 치산마을은 남쪽이 높게 가로막혀 있다. 진불암에서 발한 계천이 중간에 공산폭포를 형성하여 떨어지는 낙수소리는 우레 같고 천 길 낭떠러지에 백 척의 물기둥을 볼 수 있다. 계곡은 흰 반석이 깔려 있으며 좌우의 광경은 선경을 연상케 한다.
치산은 수려한 산세와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있으며 영천시에서는 이 일대 8만 2천평에 대규모 위락시설을 만들어 도시민의 여가활동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국민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지난 88년부터 대형주차장 2개소와 수변 피크닉장 및 어린이놀이터를 조성해놓았다.치산저수지에서 1㎞정도 올라가면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수도사가 나온다. 두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 수도사는 원래 이름은 금당사였으나 화재로 소실된 뒤 사찰 명을 바꾸었다고 전한다. 이 절에서는 원통전에 있는 노사나불괘불탱(보물 제1271호)이 유명하다.조선 숙종 30년(1704)에 그려진 이 괘불은 그림길이가 8.36m, 폭 4.32m(전체길이 9.6m, 폭 4.8m)이다. 그림 테두리 맨 위쪽에 ‘원만보신노사나불’이라는 글씨가 둥근 원안에 쓰여 있어 노사나불임을 알 수 있다.둥근 얼굴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원만상의 보살 형태를 하고 있는 독존형식으로 연꽃줄기를 받쳐 들고 있으며, 보관 주위로는 삼신불 중 비노사나불 형태의 화불이 일곱 분 모셔져 있다.긴 네모꼴의 몸 광배에 둥근 머리광배를 하고 있는 노사나불은 밝은 육색에 팔 부분부터 머리 위 까지 오색의 방광으로 처리되어 있어 화려하며, 특히 둥근 어깨위로부터 팔꿈치까지 흘러내린 검은색의 보발로 상의 형태가 더욱 뚜렷이 보인다.
이 치산폭포는 팔공산에 산재해 있는 폭포 가운데 가장 낙차가 크고 낙수율이 풍부하다. 팔공산의 남쪽과 서쪽으로부터 에워싸고 있는 광활한 일대의 원시림지역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는 3단을 이루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온갖 형상의 기암석과 울창한 숲으로 풍치미 또한 뛰어나며,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을 자랑한다. 계곡의 맑은 물과 호수는 주변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어 경관이 좋다.고려 문종 때 혼수국사가 창건한 후 몇 차례 중수한 진불암은 1944년 대구에 소위 80연대라는 일본병영에서 우리 학병 5명이 다락에 숨어 있었고 일본헌병대가 암자에 들이닥쳤으나 노스님의 태도가 너무나 태연하여 학병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치산지구는 팔공산내에서도 자연훼손이 덜하고 찾는 사람 또한 그다지 많지 않아 호젓한 산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해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수도사~치산폭포~동봉~신녕재~수도사 원점회귀 산행이 주로 이루어진다. 수도사 주차장 기점으로 6시간 정도 걸린다.(2004. 5. 1, 경북동부신문 3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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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반석, 광경, 맑은 물 등이 있으니 예부터 위인들의 행적이 많은 곳이다.이 마을은 3백여년 전에 김한윤이라는 선비가 개척해서 신암이라 했다가 나중에 치산이라고 개칭했다고 하는데 마을 입구 앞산이 꿩이 엎드려 있는 모양이어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신암(신지냄)은 신선함 바위가 많기에 붙인 이름이며 이 골 중앙에 위치한 진곡은 개척당시부터 계곡이 긴 산중턱에 마을이 생겼다. 또 중리는 마을 중심지이고 양지는 동쪽을 보고 있으며 귀천은 예부터 개울에 자라가 많아서이다. 동지는 3백여년 전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했고 귀천은 내포라고도 하며 350여년 전 안동 권씨가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갑현으로 이거했다고 한다.치산관광지 못 미쳐 왼쪽 중턱에 자리 잡은 귀천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군위, 하양, 의흥, 추평, 영천복성전투 등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 권응수 장군을 향사하는 곳으로 일명 경덕사라고도 한다. 이 건물은 조선 숙종 2년(1676) 창건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강당과 영정각, 신도비가 남아 있으며 지금은 신녕면 화남리 유물전시관 뒤쪽에 있는 경충사에서 장군의 향사를 받들고 있다.
바탕이 거친 삼베바탕으로 윤곽선이 다소 굵게 표현되고 있지만 세부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묘사되고 있고 선 또한 치밀하게 구사되고 있어 선의 강약이 잘 나타나 세련미를 엿볼 수 있다. 색상은 붉은 색과 녹색 위주로 조선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몸 광배 바탕과 하의 자락을 하늘색으로 처리하여 중앙의 상을 훨씬 돋보이게 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이 불화는 순조 22년(1822)에 한 차례 개수한 적이 있긴 하나 다소 둥글 넙적해진 얼굴에 움츠린듯하면서도 풍부한 둥근 어깨, 약간 처진 눈썹 등 조선시대 효종·숙종대의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18세기 초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맑은 계곡물을 바라보며 김밥을 먹고 길 따라 1.5㎞정도 더 들어간 후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친구의 집에서 경탄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폭포는 처음 보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