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뉴스24/답사와 여행이야기(이원석 편집위원)

[스크랩] 임고 삼매리(자양서당, 동인각)

이원석(문엄) 2007. 7. 15. 23:40

영천댐 바로 아랫마을 임고면 삼매리

영천댐  바로 아랫마을인 임고면 삼매리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공사가 끝나면 마을지도가 바뀌게 될 것 같다.매곡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맞은편 도로를 유심히 살펴야 동인각과 자양서당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몇 번째 실패 끝에 오늘은 운 좋게도 한번에 진입로를 찾는  행운이 따랐다.

며칠동안 내린 비로 제법 불어난 자호천 위에 설치된 다리를 건넌 후 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왼쪽 길을 따라 5백m 정도 들어가면 동인각과 함께 자양서당을 만날 수 있다.

동인각 사적비와 자양서당, 동인각 등이 어우러진 이곳에서는 뻐꾸기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청소가 안되어 좀 지저분하긴 해도 방문이나 마루 등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동인각(유형문화재 제77호)은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운 이순신과 부장 김완 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원래는 자양면 노항동에 세웠으나 정조 9년(1785) 5월 소실되어 정조 11년(1787)에 재건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동안 퇴락하여1960년 자양면 성곡동으로 이전·복원하였으나 영천댐 수몰지구가 되어 1976년 7월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이 집은 중앙에 정면 2칸의 대청을 꾸미고 후벽 1칸에는 위패를 봉안토록 하였고 기둥은 네모, 여덟모, 원형  등 세 종류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원출방의 철리(哲理)를 응용한 것으로 높은 격조를 지니고 있다. 공포는 익공계 주심포 양식으로 안동, 영천지방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수법으로 짜여져 있다.

이 건물은 중앙에 정면 2칸의 대청을 꾸미고 후벽 1칸 전면에 신주(神廚)를 두고 있다. 그래서 평면구성이 보통의 공청과는 약간 다르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3칸이다. 이 12칸의 평면 중에 마루가 깔린 면적이 6칸으로 전체면적의 반을 차지한다. 평면 좌우의 끝은 각각 2칸씩의 방이 있고 방 사이 2칸에 신주가 있는데 바닥은 역시 마루이다. 이러한 평면구성에서 신주가 없다면 도처에서 널리 보이는 사랑채의 모습과 흡사한 평범한 것이 된다.

신주 2칸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고 띠살 무늬의 사분합비(四分閤扉)가 달려있다.

밑으로 궁판이 있는 문비여서 키가 크고 갸름하다. 신주 2칸을 구분하는 기둥, 사분합이 좌우 주간(柱間)에 설치하게 된 중앙기둥은 특이하게도 팔각주이다. 사분합의 좌우측 기둥, 즉 대청과 방과의 접합상의 기둥은 방주(方柱)이다. 그 외 나머지 기둥들은 모두 둥근 기둥이다.

결국 이 작은 집에 모나거나, 팔각 또는 둥근 세 가지의 기둥이 있는 셈인데 원출방(圓出方)의 철리(哲理)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과정에 채택되는 팔각의 도입은 건축주가 상당한 수준의 학식을 지녔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노항동에서 태어난 김완 장군(1551∼1607)은 선조 22년에 선전관 벼슬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진에 종사하여 옥포, 당포에서 대첩을 하니 절충장군의 직책과 포상을 받았다. 또한 장군은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갔으나 굴하지 않고 탈출하여 귀국하니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이 하사되고 함안군수로 제수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였으나 해전으로 인한 심한 여독으로 고향에 돌아와 생을 마치니 원종훈1등에 책록되었다.

동인각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자양서당(유형문화재 제78호)은 조선 명종 원년(1546) 호조참의 김응생, 정윤양, 노수가 향리의 후진교육을 위해 노항동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1976년 7월 영천댐 수몰지구에 편입되어 현 위치에 이건하였는데, 이때 건물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일각문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서당건물은 전퇴(前退)가 있으나 이 건물에는 없으며 서생들이 모여 글을 읽는 대청과 숙박을 위한 방으로 평범하고 소박하게 짜여져 있다.

서당 내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동인각에 봉안하고 있는 김완 장군은 김응생의 셋째아들이다. 김응생(1496∼1555)의 자는 덕수, 호는 명산, 본관은 경주로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성인과 같았으며 장례 후에 여묘살이를 하니 큰 호랑이가 밤새껏 지켜주었다고 한다. 향중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했으며 진사에 올랐으나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면산의 남쪽 기슭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서적을 번역하여 마을 청년들에게 보급하니 학업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문전에 모이는 지라 노촌 정윤양, 소암 노수와 함께 “우리 향중은 정포은이 출생한 곳이라 실지로 해동 백록동이라” 하고 공동으로 재물을 모아 집을 건축하고 태학의 제도와 같이 하여 퇴계 이황에게 묘우(廟宇)의 액(額)을 청하고 학규를 정하여 임고서원을 창건하게 되었다.

자양서당에서 공부하는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은행나무 밑에서 학문을 장려하려는 뜻에서 지은 이 시에 그의 사상과 유업이 담겨있는 듯하다.삼매리는 동북으로 자양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으로는 화북면과 접경하고 남쪽으로는 덕연리와 접하고 있다.평천리에서 북동쪽으로 5㎞쯤 가면 큰 반석이 있고, 좋은 청석과 바위가 많아 반곡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벌바우(봉암)에도 바위와 토종벌이 많으며 마을 앞쪽에는 오미산이 있다.

반곡 동쪽에 있는 용천은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고 앞으로 자양천의 맑은 물이 흘러 그런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은행나무 밑에서은행나무 가지가 봄 뜻을 머금고뜰 앞에 차 있으니둘레는 가히 두 아름이요높이는 열 길이 넘네때를 따라 능히 열매 맺음을 보라나고 나서도 바꾸지 아니하고매양 처음과 같으니라삼매리에는 뒤티고개에 얽힌 전설이 남아있다.

뒤티마을 뒷산에 있는 뒤티고개는 고개가 낮아서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름에도 ‘추운 고개, 바람고개, 귀신고개, 슬픈 고개’라고 한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에 만약 샛바람이 불게 되면 젊은 여자나 색시가 바람이 나고 그 해에 여자가 먼저 고개를 넘게 되면 마을사람들 중에서 중병이 걸리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 동네의 시어머니들은 자기 며느리나 딸이 바람나지 않도록 하려고 자애로운 마음가짐으로 오미산 골짜기 신바위에 치성을 드린 연유로 그 산골짜기를 산자고곡 또는 산자골이라고 부른다.

출처 : 영천뉴스24(yc24.kr)
글쓴이 : 에디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