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단다. 장지가 고향 선산이 되다 보니 문상 온 이들 대부분이 고향에서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라, 모이니 장례는 뒷전이고 반가운 마음에 모두 수인사 하기에 바쁘다. 상주 역시 그랬지만 다들 그만그만한 나이에 이르렀는지 세월의 무상함이 얼굴에 묻어나고 있다. 장례 또한 이제는 치루어 나가야만 하는 인생사 중 하나라는 모습들이고...
하릴없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遠願寺址로 차를 몰았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향하다 만나는 외동읍 모화리, 산줄기가 토함산 남쪽으로 이어지는 봉서산 기슭에 절터는 자리잡고 있다. 속설에 전하길 불국사의 승려가 되기 위해선 이 곳에서 머리를 깎아 불에 태워야만 했대서 毛火이고, 여기서부턴 경주나 불국사 영역에 들어선 꼴이 되어 그 첫 마을의 이름이 入室이 되었단다.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 제법 녹음이 우거진 즈음에 새로 지은 사우와 작은 종각이 나타났건만, 이들은 뒤로 하고 먼저 오른쪽 높은 언덕받이 장대를 오르니 아름드리 소나무 뒤로 책에서 익히 보아 낯설지 않은 동서 삼층석탑과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 한 기가 서있고, 뒷편 작은 기단 위엔 초석만 남아 휑덩그레한 원래의 금당자리를 소나무가 에워싸고 있다.
원원사는 신라 神印宗의 개조인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 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신인종의 중심도량이었던 유서 깊은 사찰로 밀교의 후계자들인 안혜, 낭융 등과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이 함께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신라의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다.
더운 여름날 굳이 심산유곡에 자리한 이 절터를 찾은 건 심상한 마음을 유허지에서 삭여도 볼겸 얼마전에 읽었던 강우방 선생의 글을 현장에서 곱씹어 보고파서였다. 우연일까. 靑馬의 발자취를 쫓아 이곳을 찾았던 허만하 시인의 글을 "청마풍경"이라는 산문집에서 읽었는데 그 역시 거기에서 강우방 선생의 논지를 언급하고 있다. 청마는 56년도 봄에 이 곳을 찾았더랬고...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약사불의 권속인 十二支像이 불교석탑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의 효시로, 이후에는 탑의 하층기단부에 십이지상이 보이는데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과 안동 임하동 석탑, 그리고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등의 예가 있다.
무릇 탑에 사천왕과 십이지상을 새긴 것은 초층탑신은 정방형에 가까운 사각형이어서 사천왕을 배치하기에 적합하고, 기단부의 상대중석은 이미 구조적으로 한 면이 탱주에 의해 2구로 분할되어 있어서 여덟 개의 면석에 팔부중을 조각하기에 안성맞춤이며, 하대중석 역시 두 개의 탱주로 한 면이 3구로 분할되어 있어 열두개의 면석에 십이지상을 배치하기에 적절했던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唐의 예에서 십이지상은 평복으로 소규모 俑(인형)으로 만들어 방위신이라는 상징적 의미로서 무덤에 부장되는데, 신라는 이러한 관습을 뛰어넘어 매우 외향적인 성격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경덕왕대에 왕권확립의 일환으로 당제에 의한 대개혁이 있었으며 이때에 왕릉제도를 수입하여 성덕왕릉에 실현하였고, 이에서 더 나아가 십이지상의 대규모 배치를 서둘러 전제왕권의 상징으로 삼고 있을뿐만 아니라 무서운 형상을 한 武腹의 십이지상에서 보듯이 표현의 다양성을 가미하여 십이지상 미술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산출해 나가는 것으로 강우방 선생은 보고 있다. 왕릉의 경우엔 양식적으로 이 곳 원원사지 이웃의 괘릉(원성왕릉)과 안강 흥덕왕릉이 그 정점에 서있는 것이 될 터이다.
또한 원원사지탑의 경우 비천이나 사천왕상 등에 보이는 天衣의 흩날림이 표현되어 있고 연화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이 점 경주지방 여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입상의 무인복장을 한 십이지상과는 대조되는 바, 강 선생은 다소 춤추는 듯한 跳舞像에서 신라문화의 근간으로서의 샤머니즘까지도 확인하고 있다.
청태낀 석탑은 깨지고 마모된 채 빈 터에 서 있어도, 앞에 마주한 채 이러저러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더없이 느꺼웠다. 비둘기 울음을 뒤로하고 칡덩굴 뻗어나는 장대를 내려서니 그제야 더위와 시장끼가 한꺼번에 밀려든다. 절집 앞 석간수를 한 됫박 들이키고 급할 것 없이 마당 앞 아담한 종각을 구경한다.
무릎까지 오는 주초 위에 나지막한 기둥을 세웠는데, 창방끼운 평방 위를 주두가 타고 내민 쇠서 위 연꽃에 봉황이 놀고 있다. 안을 들여다 보니 서까래 대신 부채살 선자로 곱게 모아 자그마한 반자로 마감한 모습이 앙증맞다.
맞은편 내7 외5출목으로 포를 짜올린 솜씨가 돋보이는 천불전을 돌아보고 절집을 나서며 다시 되뇌어 본다. 밀교가 성했던 그 시절 절을 창건한 이들이 그토록 멀리 원하였던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