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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답사 58] 서울 정동 ‘손탁호텔’ 터를 찾아 | |||||||||||||||||||||||||||||||||||||||||||||||||||||||||||||||||||||||||||||||||
권기봉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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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커피 광고 모델은 안성기나 심은하, 한석규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요즘엔 이미연과 이정재가 나오기도 한다. 여하튼 텔레비전을 옆에 끼고 살다시피 하지만 아직 커피 광고에 조형기나 신신애, 양동근이 나온 것은 보지 못했다. 전원주? 물론 못 봤다. 얼굴 예쁘고 몸매 멋진 연예인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도 유독 안성기나 한석규 등이 커피 광고 모델로 장수하고 있는 이유는 무얼까? 짐작하다시피 이른바 ‘분위기 있는’ 사람이라야 커피 광고 모델로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커피를 포함한 차(茶)라는 것이 결국 여유가 있어야 즐길 수 있는 것이기에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이들이 안성맞춤인 듯싶다. 그들이 정말로 커피를 즐기는 지야 알 수 없지만. 러시아, 대한제국에 진출하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보급된 것은 겨우 1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신라 (수로왕 때부터라는 설도 있으나) 선덕여왕 때부터 마시기 시작한 녹차나 (엄밀히 말해 차는 아니지만) 둥굴레나 결명자 등에 비하면 정말 일천한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짜 차 파는 곳은 ‘전통찻집’이라 하여 유망업종 목록에서 밀려난 지 오래고, 다방에서 서양 음악 들으며 마시기 시작한 커피는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커피숍과 카페, 테이크아웃 전문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린 것이다. 그것도 트리플 스코어 차 이상으로.
가슴 아프게도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 등 열강이 각축을 벌이던 19세기 후반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전혀 고요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희망을 이야기하는 아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좌절과 패배에서 오는 암울함만이 느껴졌을 뿐. 이미 1882년 청의 주선으로 미국과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어 영국이나 독일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했지만 유독 러시아와는 어떤 협정도 맺질 않고 있었다. 아마도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청의 방해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떻게든 대한제국에 선을 대고자 했던 러시아는 당시 중국 톈진에 있던 웨베르(Waber)로 하여금 직접 조선으로 가기를 청했고, 결국 당시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있던 �렌도르프를 매수, 통상협정을 맺게 된다. 바야흐로 러시아의 한반도 간섭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서울 최초의 호텔식 다방을 차린 손탁 마담
실제로 친로파(親露派)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홍륙이란 자가 고종과 세자가 마시는 커피에 독을 타 살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 것을 보면, 고종이 양식과 함께 달콤쌉싸름한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 같다. 한편 4개 국어에 능통했던 손탁은 당시 친로파에 속했던 이범진이나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과 함께 고종에게 직접 외교 및 국제 문제에 대해서도 조언을 하는 등 국정에 관여했던 것으로 전해져 가히 그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이 같은 신임 덕인지 손탁은 1895년 고종으로부터 경운궁 근처 현 이화여고 자리에 있던 184평짜리 집을 하사받아 외국인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광무 6년인 1902년 10월 들어 이 집을 헐어 버리고 2층으로 된 양옥집을 지었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서울 정동(貞洞) 32번지에 세워졌던 ‘손탁호텔’이다.
그러나 자못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손탁호텔의 운명은 그리 길지 못했던 것 같다. 을사조약의 모의처로 이용되기도 했던 이 건물은 1918년 이화학당에 매각돼 교실과 기숙사 등으로 이용되다가 1923년 들어 아예 건물이 헐리고 프라이 홀이 들어섰다. 그러나 결국 1975년의 화재로 전소, 지금은 이화여고 교정 안에 단촐한 기념비만이 유일한 기억의 코드로서 남아있을 뿐이다. 그때 들어온 것이 비단 ‘가배’뿐이었을까? 그런데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때 손탁이 들고 온 것이 비단 ‘가배’뿐이었을까? 당시 ‘검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인지 몰라도 커피만 가지고 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은 그저 커피에 불과했지만, 이것이 당시 대한제국인들의 의식 수준과 교묘히 잡종 교배된 결과 새로운 종(種)이 출현한 것은 아닐까? 서양에서 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막연한 추종(種).
말하자면 무얼 이야기하려고 해도 손탁호텔 등 시쳇말로 ‘때깔 나는’ 곳에서 점잖게 앉아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해야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당시 권세가와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나 일본 등지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그곳에서 느꼈던 분위기를 조선 땅에서도 찾고자 했을 것이란 것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손탁호텔과 커피뿐만 아니라 훨씬 이후이긴 하나 1920년대 초반, 지금과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로 완공된 서울역 2층의 양식당에도 서재필이나 김지미, 최무룡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자주 출입했다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게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경향은 굳이 커피와 양식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양복은물론 신식 군대나 신식 학교 등 ‘따라가야 할’ 대상들은 넘쳐났고, 고종 역시 경운궁 안에 그리스풍의 석조전을 비롯한 서양 건물들을 지은 바 있다. 물론 이런 양상은 비단 권세가나 지식인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어서 일반인들 역시 이른바 ‘신식(新式)’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모든 서양 문물을 가리지 않고 동경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신은 길손의 편협함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번 잘 보시라. ‘빅맥’이나 ‘코카콜라’가 단순히 햄버거와 탄산음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손탁이 가져온 커피 역시 ‘커피’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나영이 탐스런 구름을 땄던 곳도 우리나라는 아니요, 이미연과 이정재가 끝났던 사랑을 다시 시작하려는 곳도 유럽 한복판 체코 프라하의 카를다리 위다. 그러니 “당신은 국수주의자에 지나지 않아!”하고 욕하기 전에 한번쯤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우리네 무의식 속에 ‘신식’이라는 애칭을 얻은 무조건적인 서구 추종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나저나… 이미연과 이정재의 사랑은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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