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영천 골벌국 자료

이원석(문엄) 2012. 4. 6. 13:48

 

 

완산동은 신라초기의 골화소국(骨火小國)의 옛터며, 신라말기의 임천현지(臨川縣址)다. 안 완산동 동쪽 산언덕에 지금도 큰 옛무덤이 즐비하게 있다. 그 무덤에서 나오는 토기가 신라초기의 것이며, 골호(骨壺)와 고배(高杯)가 모두 즐문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영양지(永陽誌), 익양지(益陽誌), 최남선전집(崔南善全集)의 대동지명사전(大東地名辭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사실로 분명히 증명해주는 것이다. 제 기록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 삼국사기 지리조(三國史記 地理條)

조분왕 때 골화소국을 쳐 얻어서 현을 두다. 경덕왕이 임천현이라 이름을 고치다. 지금은 영주에 합속시키다.〔臨川縣 : 助賁王時, 伐得骨火小國, 置縣, 景德王改名, 今合屬永州〕

 

 

▪ 영양지(永陽誌)

본디 골화(骨火)라, 혹은 골화소국(骨火小國)이라고도 한다. 신라 조분왕 때 쳐 얻어 현(縣)을 두다. 경덕왕이 임고군 영현(領縣)으로 고치고, 고려초에 군에 영속(領屬)되다. 군의 동남쪽에 있다. 김유신이 고구려를 치길 꾀할 때 골화관(骨火館)에 나와 유숙(留宿)한 곳이 여기다. 삼국유사에 있다.

〔本骨火, 或云骨火小國, 新羅助賁王時, 伐取之, 置縣, 景德王改臨皐郡領縣, 高麗初屬, 在郡東南, 金庾信謀伐高麗, 出宿於骨火館, 此其地, 見三國遺事〕

 

 

▪ 익양지(益陽誌)

본디 골화소국, 신라 조분왕이 쳐서 얻다. 경덕왕이 고쳐 임고군 영현으로 삼다. 김유신이 고루려를 치길 꾀해서 골화관에 나와 유숙하니,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이 삼국유사에 보인다.

〔本骨火小國, 新羅助賁王伐取之, 景德王改爲臨皐郡領縣, 金庾信謀伐高句麗, 出宿骨火館, 此其地, 事見三國遺事〕

 

 

▪ 최남선전집의 대동지명사전(崔南善全集 大東地名辭典)

영천의 옛 속현(屬縣), 동남5리에 있다. 본디 골화소국, 신라 조분왕 때 쳐 얻어 현을 두다. 경덕왕이 ‘임천’이라 이름을 고치고 임고군의 영현으로 삼다. 고려초에도 그대로 영속되다. 삼국유사에 자세히 실려 있다.

〔永川舊屬縣, 在東南五里, 本骨火小國, 新羅助賁王時, 伐取之, 置縣, 景德王改臨川, 爲臨皐郡領縣, 高句麗예屬, 詳見三國遺事〕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본디 골화소국인데, 신라 조분왕 때 쳐 얻어서 현을 두다. 경덕왕이 ‘임천’이라고 고쳐 임고군의 영현으로 삼다. 고려초에도 그대로 예속되다. 영천군의 동남 5리에 있다. 김유신이 고(구)려를 치길 꾀해서 골화관에 나와 유숙하니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다.

〔本骨火小國, 新羅助賁王時, 伐取之, 置縣, 景德王改臨川, 爲臨皐郡領縣, 高麗初내屬, 在郡東南五里, 金庾信謀伐高麗, 出宿於骨火館, 此其地, 見三國遺事)

 

 

 

 

‘영천정신’ 결집할 골화소국 중심부 - 금강산성

김유신 설화ㆍ황보능장 기개 숨쉬는 천혜의 호국성지

 

〔전략… 유신랑은 그때 한창 고구려와 백제의 공벌 문제를 두고 밤낮으로 깊은 궁리를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백석이 그 계획을 알아차리고 유신랑에게 제의해 오기를, “공이 저와 함께 저쪽 적국에 잠입하여 먼저 적의 내정을 탐지하고 나서 일을 꾀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했다. 유신도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백석을 데리고 밤을 타서 적국을 향해 출발했다. …중략… 유신랑은 여인들과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 여인들은 별안간 신령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유신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내림ㆍ혈례ㆍ골화 이 세 곳의 호국 신이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그대를 유인해 가는 데도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따라가기에 우리들이 그대를 만류하고자 여기에 온 것이다.… 중략… 유신은 백석을 형벌하고, 갖은 제물을 갖추어 그에게 계시를 주었던 세 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 신령들은 모두 현신하여 제사를 받았다.… 후략] (삼국유사 ‘김유신 조’)

 

김유신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을 하고 나와 골화관에 들어 유숙하면서 유신은 백석에게 말했다.

 

"지금 타국으로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어 버리고 왔구나. 함께 집으로 되돌아가 문서를 가져오도록 하자" 백석을 타일러 집으로 되돌아오자 유신은 백석을 결박해 놓고 사실을 문초했다.

 

백석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우리나라 대신들에게 나는 이런 얘기를 들었다. 즉 신라 김유신의 전신은 우리 고구려 국의 복술가였던 추남이다. 한번은 국경에 물이 역류하는 일이 있었다.

 

왕은 그에게 점을 쳐 보게 했다. 추남은 점괘를 뽑아 보고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운이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은 놀라고 왕비는 대노하여 이것은 요괴스러운 여우의 말이라 하고 왕에게 고하여 추남을 다시 다른 일로 시험해 보아 알아맞히지 못하면 죽여 버리도록 했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합 속에 감추고서 추남에게 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추남은 그 속엔 틀림없이 쥐가 들어 있고 그 쥐는 여덟 마리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한 마리 쥐를 두고 여덟 마리라고 했으니 그것은 잘못 맞힌 것이라 하고 추남을 죽이기로 했다. 추남은 형장에 나아가 맹세했다.

 

‘내 죽은 뒤에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태어나 이 고구려를 꼭 멸하고 말리라' 고, 추남의 목은 베어졌다.

 

합 속에 넣었던 쥐를 꺼내 배를 갈라 보았더니 그 속엔 새끼 일곱 마리가 들어 있었다.

 

이리하여 앞서 추남이 했던 답변이 맞았음을 알았다. 추남을 처형한 그날 밤에 왕은 꿈을 꾸었다.

 

왕은 그 꿈에서 추남이 이곳 신라 서현공의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신하들에게 왕은 꿈을 얘기했더니 모두들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만, 과연 그 맹세대로 실현되나 보다고 하고, 그리고 나를 이곳에 보내어 추남의 복수심의 화신인 당신을 유인하는 계략을 쓰게 했던 것이다."

 

김유신이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세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다 현신하여 제사를 받아 흠향하였다.

 

[“신라 말 영남의 제주(諸州)가 견훤에게 함락될 때 황보능장이 골화·도동현 등에 성을 쌓고, 이 성에 의거하여 백성을 안심시키고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게 하였는데, 태조가 나라를 세우자 귀부(歸附)하였고 현재 성지가 남아있다고 한다” (영양지 ‘성곽조’)]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는 황보능장과 같은 시기, 같은 장소인, 경애왕 2년 10월 고울부에 능문이라는 장군이 나오는데 활동시기ㆍ지역ㆍ내용을 함께 고려해 보면 능장과 능문은 동일인으로 여겨진다. 9월에 견훤이 이곳에 침입했을 때 약 2개월 간 견훤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을 정도로 성의 견강함과 높은 전투력을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천시민들의 산책로와 운동코스로 올해부터 각광받고 있는 그린환경센터. 이 일대가 바로 김유신과 백석의 설화와 함께 영천을 주재하던 골화신의 호국정신과 통일신라 패망기에 자치세력을 형성하여 주민들을 보호하던 금강장군 황보능장의 기개가 숨쉬던 곳임을 아는 시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영화교에서 금호강을 따라 그린환경센터로 가다보면 입구 왼쪽 편에 여러 가지 운동시설을 갖춰놓은 체육공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무난히 금강산에 오를 수 있다.

 

비록 찾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길을 걸으면서 맑은 바람소리와 새소리로 자연을 음미할 수 있고 또 옛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며 1천5백년 전에 그들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보는 감회도 맛볼 수 있다. 

 

지금도 900여m의 토석혼축 성벽과 성내에 깨어진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웅장함을 짐작하게 하지만 무성한 나무와 풀들로 뒤덮여 흔적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다만 지난 95년 3월 영천향토사연구회원들과 보이ㆍ걸스카우트 1270 B.B.S 골벌지역대원들이 사방 20여 리를 조망할 수 있는 정상부분(186m)에 세운 금강산성 표석비가 길손들을 안내하고 있다. 표석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황보능장이 타고 다니다가 주인의 실수로 목 베임을 당한 용마의 발자국이 찍힌 말굽바위가 길손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완산동 뒷산을 일컫는 금강산은 금강골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도 대한불교 태고종인 금강사가 자리잡고 앉아 당시의 전통을 이어주고 있으며 고경면 대의동 쪽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절벽과 남천, 그리고 용마바위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특히, 단풍이 물든 가을과 봄, 겨울의 운치가 일품이다. 고려 태조로부터 좌승이라는 관직을 받았던 금강성주 황보능장의 묘는 3사관학교 내에 있으며 경북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직경 16m, 높이 5m의 원형분 앞에 상석과 향석을 두고 우측 전방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현존하는 신도비는 1947년에 건립한 것으로 조선 영조 43년(1767)에 세운 옛 비의 비문과 일치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3사관학교를 만들면서 당시 이곳에 있던 많은 묘를 이장하면서도 군인들의 귀감이 되는 황보 장군의 묘만은 그대로 두게 되었다고 한다.

 

영천의 중등학교 교사로 7여 년 간 근무하면서 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던 중 지난 90년 8월, 향토문화연구회에서 발간한 향토문화 제5집에 ‘골화성에 대하여-골화소국과 관련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던 이재수(61ㆍ문학박사, 경북대 강사)씨는 “금강산은 신라삼산의 하나로 비정 되는 곳으로 안 완산동의 구릉지는 골화소국의 중심부이고 대사(大祀)를 올린 곳으로 생각된다.”며 “안 완산 철길 건너편 산의 북쪽 사면에는 20여기 이상의 규모가 큰 고분들이 무리 지어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이 발굴되면 골벌국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자료가 출토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나말 여초의 대표적인 호족인 황보능장을 통해 당시 호족들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할 수 있는 이 일대에 산성공원과 옛길, 골화소국터, 고분공원 등 시민휴식공간과 역사교육 현장이 조성된다면 더없이 훌륭한 문화유적지이자 관광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후 각 지역마다 그 지방을 아우를 수 있는 상징을 찾아 만드는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 영천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삼국통일을 이끈 김유신 장군을 구해주었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한 금강산성이야말로 ‘호국충절의 고장’ 영천의 정신을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지역의 문화재를 모으고 발굴하여 영천의 중심부인 이 일대에 박물관을 지어 우리고장의 독특한 문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일부 시민들만의 욕심일까?

 

 

고대 영천문화의 중심지 완산동고분군… 대규모 유적 판명

 

고대 영천문화의 중심지 완산동. 완산동은 안완산과 바깥완산, 개고개, 말죽거리 등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영천에는 골벌국(骨伐國)이 존재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절야화군(切也火郡)이었다고 한다. 골벌국의 왕 아음부가 사로국에 항복한 것은 조분왕 2년(231)의 일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 일대의 많은 땅이 군부대에 수용되면서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저 길이 제가 어릴 때 개고개에서 작산 삼거리를 통해 경주로 버스가 통행하던 길입니다. 당시에는 영천에서 사람이 죽으면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다 묘를 쓴다고 말할 정도였으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토기를 발견했다는 신고가 수시로 들어왔습니다.”

 

박우락 전 영천시청 과장은“언젠가 제대로 된 발굴을 하게 되면 고대 영천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완산동고분군중 가장 규모가 큰 개고개와 공동묘지 일대에서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겼다.

 

지난 1996년 대구교육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완산동고분군 지표조사 내용을 요약했다.

 

1지구 고분군은 전체적으로 영천시에 접근해 있고 군부대 탄약창의 철조망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10여기의 봉분이 남아있고 채집되는 토기는 와질(瓦質)토기이거나 타날문이 시문된 고식(古式)의 경질(硬質)토기들이 많다. 2지구와는 지형적으로 작은 계곡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진다.

 

2지구 고분군은 1지구 고분군과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어 있으며 많은 지역이 계단식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2지구에서 확인되는 유물들은 대개가 6세기대 이후의 경질토기류가 많다.

 

완산동고분군은 조사결과 중대형분을 포함한 다수의 봉토분(封土墳)과 함께 많은 수의 토광묘(土壙墓)가 축조된 대규모의 유적임이 판명되었다.

 

1지구의 경우 구간의 전면에서 토광묘와 관련된 유물이 채집됨과 동시에 봉토분의 주위에서도 5~6세기 대의 유물들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서 동일구간 내에서 유구(遺構)들이 중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적의 상한연대는 적어도 2세기 중반까지 소급될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채집되는 유물 중에서 와질(瓦質)의 우각혈파수부호(牛角形把手附壺) 편(片)이 발견 확인된다든지, 와질의 노형토기와 횡침선이 조밀하고 태토질이 순수와질인 토기가 다수 확인되기 때문이다.

 

늦은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 단계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단계 이후의 유물들로 보아 무난할 것으로 판단된다. 즉 전기 와질토기의 요소를 일부 포함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후기 와질토기의 특징을 많이 가졌다고 판단된다.

 

완산동 1지구에서 채집되는 유물과 비슷한 시기의 유적으로는 창원 도계동 유적, 노포동 유적, 합천 저포A지구, 울산 하대 유적, 대구 팔달동 유적, 경산 임당·조영동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2지구에서 채집되는 유물은 1지구에서 채집되는 유물의 양상과는 차이가 있다. 대개 와질토기나 이른 시기의 타날문계(打捺文系) 경질토기 보다는 5~6세기 대 이후의 경질토기들이 많다. 정식조사가 아니라 명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전체적인 매장양상이 1지구에서 2지구로 옮아간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이번 조사에서 제법 많은 양의 토기 편들을 채집하였으나, 이를 형식적으로 분류하여 편년할 정도의 충분한 자료는 되지 못하였다. 단지 확인되는 몇몇의 기종을 기존 경남지역의 편년자료와 비교하였을 때 후기와질 토기단계에 속하는 유적으로 판단되어지며, 정식조사를 실시할 경우 이보다 연대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