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50. ‘황성옛터’ 작사가 왕평 이응호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이원석(문엄) 2011. 12. 1. 10:59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 묘소, 집, 노래비’

 

영천출신인 왕평 이응호(1908-1941)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혼을 일깨웠던 ‘황성옛터’의 노랫말이다.

 

1927년 어느 여름날 황해도 개성의 백천여인숙, 극단 연극사(硏劇舍)의 일원으로 공연하며 연일 쏟아지는 장마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와중에 문득 허물어진 옛 궁터인 개성 만월대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전수린이 바이올린 곡조를 오선지에 옮기며 작곡을 하고 이애리수의 노래로 그해 가을 단성사에서 무대에 올려지게 됐다. 슬프다 못해 절망적인 아픔으로 엄습해오는 이애리수의 애잔한 노래에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렸다.

 

왕평과 전수린은 일경에 불려 다니면서 모진 고초를 당했고 황성옛터는 공연 금지곡이 되어버렸지만 이 노래는 점점 더 민족가요로 사랑을 받았다.

 

왕평은 이후에도 민족성 강한 노랫말을 담은 대한팔경, 조선행진곡 같은 노랫말을 만들었으나 모두 금지곡이 됐고 1941년 평북 강계에서 연극 ‘아버지’를 공연하던 중 무대에서 쓰러져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왕평 선생의 생애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가요사 자료에는 1901년, 영천지역 신문과 기타 자료에는 1904년으로 나와 있지만 호적부에는 1908년으로 나와 있다.

 

또 사망연도도 1940년, 41년, 43년설 등이 있지만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본 결과 1908년 출생에 1941년 사망이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 연도를 기준으로 생애를 정리해봤다. 왕평 이응호 선생은 1908년 3월 15일 경북 영천군 영천읍 성내동 13번지에서 부친 동암 이권조(1885-1971)씨와 모친 김침동(1888-1913)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4년부터 1916년(6-8세)에는 수정사 주지를 맡았던 아버지를 따라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2번지 수정사 입구 마을의 민가에서 거주했다.

 

9세 때인 1917년 영천보통학교(지금의 영천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16세 때인 1924년 서울 배재중학교에 입학해 졸업 후 조선배우학교에 다닌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포리돌 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유행가 115편, 서정소곡 3편, 재즈송 3편, 민요·속요·신민요 33편, 합창·행진곡 5편, 극·극영화 30편, 난센스 21편, 스케치·만담 5편, 승방애화·전지미담 2편 등 작품 195편을 창작했으며 가요시가 전체의 58%이상을 차지했다.

 

만담가 나품심과 정식 혼례를 올리지 않은 채 동거생활을 했고 1930년대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두루 돌면서 악극단 공연에 중점을 뒀다.

 

1941년 평북 강계에서 극 공연 도중 고혈압으로 사망했으며 서울 태고사(현 조계사)에서 화장 후 수정사 앞에 묘소를 조성했다.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상억)에서는 왕평 이응호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일원에 남아있는 아버지가 주지로 근무했던 수정사와 묘소, 당시 살았던 집, 청송군에서 건립한 황성옛터 노래비를 보기 위해 청송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화북면에서 청송으로 가다가 길안 방면으로 핸들을 돌려 진보면에서 국도 31번을 타고 청송읍 방향-송강리 목계솔밭에서 좌회전해 계곡으로 2.3km 정도 지점에 위치한 수정사(파천면 송강리 2번지).

 

청송팔경중 하나로 꼽히는 수정사는 고려시대 공민왕대(1352-1374)에 나옹화상이 창건했는데,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산 속에서 흘러 내리는 샘물과 계곡에 흩어진 돌이 수정같이 깨끗해 수정사라 불렀다고 한다. 대웅전이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73호로 지정돼 있다.

 

한참을 머무르며 안내자를 찾아보았지만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수정사 앞산(송강리 3번지)에 왕평 선생의 묘소가 있다고 하는데 우거진 수풀로 인해 좀처럼 산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잠시 갈등을 하다가 김덕주 부회장이 앞장서기로 했다. 낫을 구해 가파른 길을 오르며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넘어지고 긁히기를 20여분 드디어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조금 큰 봉분 옆에 있는 작은 봉분 옆에 조그마한 비석이 서있었다. 앞면에는 ‘王平李應鎬之墓’, 뒷면에는 ‘황성옛터詩人, 近園金洋東書’라고 적혀있었다.

 

옆의 산소가 아버지 이권조씨의 산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마을에서 확인한 결과 왕평 선생의 윗대 어른 중 한명의 무덤일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볕이 잘 들지 않아서인지 무덤 군데군데에 이끼가 끼어 있었고 풀이 잘 자라지 않아 보였다. 회원들이 함께 산소의 벌초를 하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

 

청송에서 잠시 살았다는 집(송강리 119-139)으로 향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기웃거리고 있는 사이 이 집에 10년째 세 들어 살고 있다는 배성근(67)씨가 낯선 객들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주변에서 일하다가 다가왔다.

 

“틈틈이 사람들이 찾아와서 왕평 선생에 대해서 묻곤 합니다. 요즘은 가족과 군청에서도 자주 이곳 송강리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집은 현재 왕평 선생의 부친이 주지로 있었던 수정사 소유이고 집 아래에 왕평 선생 부모의 묘소가 있다.

 

송강리 입구 목계솔밭에 지난 2009년 10월 10일 (사)청송향토문화발전회의 후원을 받아 청송군에서 건립한 황성옛터 노래비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들은 기념촬영을 마치고 진보면 신촌식당에서 닭불고기와 백숙으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한 후 청송군이 자랑하는 야송미술관과 청송꽃돌수석전시관을 관람하고 영천으로 돌아왔다.

 

긴 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성내동 65번지 카 무인 모텔 건축현장에 모였다. 문화재와 교회 사이에 건축되고 있는 모텔공사현장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으로 성내동 13번지를 검색해보았다. 13번지는 잡히지 않고 숭렬당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왼쪽 편에 13-1번지가 나왔다. 지금의 65번지와는 제법 떨어진 거리였다.

 

긴 세월을 흘러오는 동안 도로가 새로 생기면서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지 영천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지혜를 짜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