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마을 서쪽에 있는 금오산(金鰲山)의 일지맥이 동으로 뻗어 갑자기 낮아져서 구릉을 형성하고 북안천의 주류와 지류가 합수되어 서북쪽으로 흐르고 평지를 넘어 동쪽에는 방산(方山)이 솟아있으면서 넓은 평야가 전개되니 교통이 편하고 농작물 생산이 많아 예부터 인류가 정착하기에 적합했다.
2) 마을의 역사
원래 영천군 비소면(比召面)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읍면 폐합 시 고지, 신계(新溪), 팔암(八岩)의 일부와 경주시 서면 일부가 합해서 고지리가 되었다.
▶ 고말ㆍ고지리(庫旨里) 980년 경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형상이 창고형이라 해서 고말ㆍ고지리로 불리어졌다 하며, 오천정씨가 많이 살고 있다.
▶ 팔바우ㆍ팔암(八岩) 옛날 중국의 진시황제 때 성을 쌓는데 돌이 부족하여 중국인이 우리나라 경주까지 와서 바위를 구하여 회초리로 바위를 몰고 가던 중 성축 공사가 완료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그대로 두고 갔다고 하며 지금도 마을 앞에 바위 8개가 있다. 이로 인하여 팔암(八岩)이라 부르며 밀양박씨가 많이 살고 있다.
▶ 지경(地境)ㆍ신계(新溪) 개척 당시 연대 및 인물 등은 알 수 없으나, 경주와 영천의 경계에 위치하였다하여 지경이라 불렀으며 현재 온양방씨(溫陽方氏)가 많이 살고 있다.
4) 마을의 특징
- 팔암(八岩) 전설 :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각국에서 돌을 회초리로 몰고 갔다고 하는데 멀리 이곳(당시는 경주땅)까지 와서 돌을 몰고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성이 완료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대로 둔 것이 이 8개의 바위라고 전하며 그래서 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8개의 바위가 있으며 이곳에 정성껏 기도드리면 환자는 소생하고 부녀자는 생남(生男)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바위의 크기는 대략 160㎡정도가 된다.
- 모원재(慕遠齋) : 세조 당시 40세에 성균관 전직, 사헌부 지평, 예조좌랑, 사간원 헌납, 홍문관교리, 풍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훌륭한 학문을 지닌 청풍당(淸風堂) 박영손(朴英孫, 1442~1486) 선생의 재사
- 만취정(晩翠亭) : 박시원(朴始元) 선생의 정자
'영천 문화유산 자료 > 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4. 도유리(道有里)| (0) | 2011.11.14 |
---|---|
173. 당리(堂里) (0) | 2011.11.14 |
북안면(北安面) (0) | 2011.11.14 |
171. 칠전리(七田里) (0) | 2011.11.14 |
170. 덕암리(德岩里) (0) | 2011.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