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월령과 논곡은 모두 학서산맥(鶴棲山脈)의 지맥이 남으로 달리는 사이에 2개의 계곡을 이루고 남북으로 트인 골짜기에 자연환경이 형성되어 2개의 자연환경이 생겼으며 마을의 북쪽에 모두 큰 저수지를 형성하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 논곡(論谷)ㆍ논실(論室) 경주박씨가 320년 전부터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골짜기가 집 같이 우묵하며, 마을 안쪽에 큰 못이 있는데 이것이 논실(論室)못이다. 이 못은 마을에서 남으로 약 1.5km 지점에 위치하며, 못의 도감(都監)은 능계(陵溪)사람이 주로 맡아 하였다. 이 못에 대하여 의논할 때에는 도감이 항상 논곡까지 와서 의논했다하여 논곡 또는 논실(論室)이라 부르게 되었다.
▶ 월령(月嶺)ㆍ월곡(月谷) 320여 년 전 임진왜란을 피해왔던 경주이씨가 정착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산이 반달 모양을 한 것과 온달 모양의 두 가지 달의 형상을 하고 있어 월령 또는 월곡이라 부르고 있다.
▶ 점마을(店村) 1950년까지 점토를 이용하여 토기를 제작하는 도공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옹기점이란 점(店)자를 따서 점마을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논들뜸 월령의 북동편에 있는 작은 마을로 논이 많이 있는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논들뜸이라 부르고 있다.
3) 마을의 특징
지금으로부터 약 420년 전에 조성했다고 알려진 논곡(論谷) 못이 있으며 또 월령(月嶺) 달아골 못이 역시 420여 년 전부터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1939년에 조성한 월령 새 못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2km 지점에 있어 저수로 인한 농업용수는 충족된다.
- 추모재(追慕齋) : 월령에 있는 여주이씨(驪州李氏) 중시조인 이희창(李希昌) 장군의 재사
- 전적지 : 논곡은 6ㆍ25사변 때 인민군에게 반격을 했던 치열한 격전지로 마을 동쪽 산은 당시 인민군의 마지막 보루였으나 국군의 반격으로 모두 죽거나 도망친 곳이기도 하다. 안천1리에는 아군 중대본부를 두고 2km 떨어진 논곡 두현재에 인민군 중대본부를 두어 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17일간 싸운 곳이다. 당시 국군은 제2군단 제8사단 21연대 2대대 3중대가 있었고, 인민군은 제2군단 제15사단 제45연대의 어느 부대이다. 피아간의 진지에는 포탄이 떨어져 깊이 2m, 둘레 5~6m정도로 땅이 파여져 있고, 부상자와 전사자도 가득 차 있었다. 전쟁 후 이곳에서 벌채한 나무는 제재할 수 없으며, 지금도 탄두와 파편이 나무속에 박혀있기에 제재소의 톱이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 자원 : 논곡 못에는 송어, 가물치들이 많아 낚시꾼이 몰려들고 있으며, 뒤 너머에는 봉림사(鳳林寺)라는 사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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