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을의 자연환경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로 서남쪽은 팔공산의 산맥들이 눈앞에 와 닿아 있으며 동은 다시 이들이 감돌고 있다. 북쪽은 작은 모퉁이를 돌아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인근 산에서 발한 계천(溪川)은 연중 마르지 않으며 마을 앞을 지나 저 멀리 신녕천의 지류와 합해진다.
2) 마을의 역사
▶ 남원리(南院里) 520여 년 전에는 이곳이 부산(釜山)에서 한양(漢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역과 역의 중간지점에 관리들이나 행객들이 쉬어가는 원(院)이 있었다. 또 군위(軍威)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 남쪽에 있어 남원(南院)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320년 전 쯤부터 함안조씨(咸安趙氏)들이 청송에서 이주하여 주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 배골ㆍ이곡(梨谷) 제주고씨(濟州高氏)가 320여 년 전에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배나무가 많아서 배골이라고 하였다.
▶ 새터ㆍ신기(新基) 420여 년 전 달성배씨(達城裵氏)가 새로운 개척하여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 새뜸 1930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막거리와 사기점(沙器店)이 유실되어 그곳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이다.
▶ 윗뜸ㆍ신당(新堂) 남원리 서쪽 둔덕진 곳에 있는 마을로 옛날 관리가 묻힌 무덤을 관리하던 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1930년 대홍수로 인하여 남원리에 있던 성황당이 유실된 것을 이곳에 건립하게 되면서부터 신당(新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핏골<직곡(稷谷)> 남원리 남동방에 있는 부흥산(富興山) 뒤편 골짜기를 말하며 420여 년 전 경주이씨(慶州李氏)가 개척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이곳이 피란지였다고 하여 핏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부흥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통칭해서 부산리라는 법정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3) 마을의 특징
- 부산리 봉수 : 남쪽으로는 계지리 봉수와 응하고 북쪽으로는 군위와 응하는 이 봉수대는 둘레 234m, 폭 3.6m, 높이 2.7m로 길다랗게 생긴 토석혼축으로 만들어져 있다.
- 거목(巨木) : 뒷골의 느티나무는 유명하다. 도로변이 아니어서 잘 보존되어 있다. 부산리 전 336번지에 있으며 가슴높이 둘레가 8.1m, 동쪽으로 퍼진 가지 끝이 10m, 서쪽은 12m, 남쪽은 12m, 북쪽 7m이다. 높이는 대략 30m 정도이며 차지한 면적은 약 230㎡ 정도로 엄청나게 큰 나무이다. 임진왜란 때 이미 큰 나무가 되었다고 하니 줄잡아도 500년은 넘은 셈이다. 춘추로 마을에서 정성껏 제사를 지내며 근처사람들이 신목(神木)으로 추앙하고 있다. 국가에 큰 이변이 있을 때 이 나무가 운다고 하는데 일제의 강침 시, 6ㆍ25사변 때에도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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