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70. 화남리(華南里)

이원석(문엄) 2011. 11. 13. 09:35

1) 마을의 자연환경

팔공산에서 뻗은 일지맥이 북으로 뻗어 구릉야산을 이루다가 다시 높아져서 화산(華山)서 서쪽으로 뻗은 지맥과 합하여 앞뒤 산들이 되고 신녕천의 북부 발원지가 됨과 동시에 하나의 작은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는 깊은 골이다. 주위의 경관이 절경을 이루고 있으니 예부터 위인들의 유적들이 많다.

 

2) 마을의 역사

무암, 온천, 별이(別二)의 일부 상미(上彌), 갑현(甲峴)으로 된 마을이다.

 

▶ 갑티ㆍ갑현(甲峴) 갑령(甲嶺) 밑에 있는 동네를 말한다. 약 350여 년 전 안동권씨(安東權氏)가 개척한 이래 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귀천(龜川)에 살던 권씨들이 이주하여 함께 살고 있다.

 

▶ 두들ㆍ두들마ㆍ두야(頭野) 면천(勉川) 남편 높은 들의 복판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서 두들마라 칭하고 약 120여 년 전 갑현동 주민이 논밭이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개동되었으나 중앙선 철도와 영천-의성간의 국도가 마을 복판으로 개통되면서 폐동되기 시작하였다.

 

▶ 땅골ㆍ지곡(地谷) 온천(溫川) 북서쪽 4㎞ 정도의 골짜기를 칭하며 임진왜란 때 의성김씨와 무안박씨(武安朴氏) 등이 이 골짜기에서 피난을 한 후 대를 이어 살다가 140여 년 전 무안박씨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이어 의성김씨들도 이주하였다.

 

▶ 면천(勉川) 갑현 북쪽 고지대의 마을로 420여 년 전 경주손씨가 개척하였으며 그 당시 냇물이 마을 앞을 힘차게 흘러가서 면천이라 부른다고 한다. 지금은 상류에 화남지(華南池)를 축조하여 냇물이 흐르지 않는다.

 

▶ 무덤실ㆍ무암(武岩) 마을 뒷골 안에 고려장의 흔적이 4곳이나 있어 무덤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320여 년 전 청주한씨가 개척할 당시 앞산과 주위에 바윗돌이 많아서 무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불당골ㆍ불당(佛堂) 신라시대에 사찰이 있어 불당(佛堂)골이라 하였으나 고려말에 파손되었으며, 광복 전에는 여기서 띠집을 짓고 훈련을 하던 곳으로서 영천에 주둔하던 일본수비대에 의하여 폐동되었다.

 

▶ 온내골ㆍ원낙골ㆍ온천(溫川)ㆍ온내곡(溫乃谷) 의성김씨가 개척한 마을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 하여 온천동이라 부르며 안동권씨가 320여 년 간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 아랫동 무암(武岩) 아랫마을로 광복 전 과수원을 개간하면서 신녕면(新寧面) 소재지 주민들이 이주하여 개동되었다.

 

3) 마을의 특징

갑현은 안동권씨 중시조인 권응수 장군의 자손들이 세거해오면서, 충, 의, 열, 용 등 무인으로서의 정신을 그대로 그 자손들이 계승하여 오면서 살고 있는 마을이다. 입구에는 장군의 유물관이 있고 근처에는 고가들이 많으며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경충사(景忠祠) : 권응수 장군의 향사를 지내는 곳

- 권영달씨, 권영소씨, 권태인씨 등의 가옥

- 면천정사(勉川精舍) : 권치선(權致宣) 선생의 정자

- 송화정(松華亭) : 손수준(孫秀俊) 선생의 정자

- 청류당(聽流堂) : 권산보(權山甫) 장군의 사저

- 한광사(閑光寺) : 신라고찰로 마을 뒤 골에 있음

- 화남재(華南齋) : 순조 때 첨편(僉便)을 지낸 권재병(權載秉) 선생의 재사

- 화포정(華圃亭) : 고종 때 후진을 양성하던 정자

 

고찰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서 있는 고택들이다. 영천에서도 반촌으로서 명성이 높다. 권상현(權象鉉) 선생의 강학지소인 면와(俛窩)가 있다.

- 권응수 장군 영정 : 문화재지정 보물 668호로 조선 선조 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대장 권응수 장군을 위해 선조대왕이 하사한 영정이다.

- 용연 : 명나라 신종 만력 연간(조선 선조 연간)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병대장이던 이여송 장군이 화산군 권응수 장군에게 선물로 전한 것이다. 크기 : 가로 24cm, 세로 1cm, 높이 2cm. 벼루의 표면에 용모양이 투각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 일본도(日本刀) : 선조 임진왜란 이전 일본 대영(大永) 1년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을 복성할 때 왜장 법화(法化)에게서 노획한 것이다.<제조원 : 일본 비주국 우정(日本 備州國 祐定)>

- 화남리 성지(華南里 城址) : 조선시대에 지어졌고 신녕현의 내성으로 추측되며 주위의 길이가 670m이고 폭은 3.6m, 높이는 90cm~1.8m정의 토석혼축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상태는 모두가 허물어지고 군데군데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 한광사 삼층석탑(閑光寺 三層石塔) : 현재 하층기단 면석은 없고 잡석위에 하층기단 갑석을 깔고 그 위에 상층기단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을 각각 하나의 돌로 다듬은 전형적인 한국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옥신에 우주만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옥개석은 모두 4단 받침을 갖고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적당하고 전각의 반전도 무리가 없다. 상륜부에 노반만 남아 있고 그 위에는 자연석을 올려놓았다. 이 탑은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나 우아하고 정연한 조탑형식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한광사 석불좌상(閑光寺 石佛坐像) : 3층석탑 하단석을 뜯어내고 마치 감실처럼 만들어 그 속에 안치되어 있는 석불이다. 원래는 조금 떨어진 곳에 불좌대 위에 있던 것이다. 불좌대는 부분적으로 마멸되긴 했으나 8각 지대석 위에 연꽃무늬가 상하로 조각된 것이 선명하다. 불상은 지권인을 취하고 있으며 법의의 자락이 양쪽팔목까지 내려와 있다. 전체적인 윤곽은 뚜렷하지만 심하게 마멸되어 세부적인 조각 솜씨는 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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