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67. 치산리(雉山里)

이원석(문엄) 2011. 11. 13. 09:33

1) 마을의 자연환경

팔공산에서 북으로 뻗은 2개의 지맥이 갑자기 낮아져 구릉지를 이루고 구릉지 사이에는 큰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남쪽이 높게 가로막혀 있으며 구름 낀 날은 바로 앞산에 흰 구름이 나부끼고 있다.

진불암에서 발한 계천(溪川)이 중간에 공산폭포(公山瀑布)를 형성하여 떨어지는 낙수소리는 우레 같고 천길 낭떠러지에 백척의 물기둥을 볼 수 있다. 계곡은 흰 반석이 깔려있으며 좌우의 광경은 선경을 연상케 하고 있다. 폭포, 반석, 광경, 맑은 물 등이 있으니 예부터 위인들의 행적이 많은 곳이다.

2) 마을의 역사

▶ 귀천ㆍ구천(龜川)ㆍ내포(內浦) 중리(中里) 남쪽 언덕진 곳에 있으며, 옛날에는 언덕아래에 있던 내에 자라가 많아서 귀천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농업용 수로인 보로 변하였다. 320여 년 전 안동권씨(安東權氏)들이 개척하였으나 지금은 갑현(甲峴)으로 모두 이주하였다.

▶ 동지(東池) 중리 북쪽의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동편에 저수지가 있어 동지라 하였으며, 320여 년 전 예천임씨(醴泉林氏) 등이 개척하였다.

▶ 신시내미ㆍ신시암(新是岩)ㆍ신암(新岩) 320여 년 전 김해김씨(金海金氏)가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신선한 자연암석이 많았다고 하여 신암(新岩)이라 전한다. 그 후 약 70년 후에 치산이라 개칭하였다. 마을 입구 앞산에 꿩이 엎드려있는 모양<복치형(伏雉形)>으로 되었기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한다.

오랏골ㆍ오락골ㆍ오내리(梧乃里)ㆍ오락골(梧落谷) 옛날 골안에 오동나무가 많아 오내리라 불러오고 있으며 입구에 오락지(梧落池)가 있다.

▶ 중리(中里) 치산리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중리라고 한다. 이 마을 주위의 지형이 마치 꿩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여 치산이라는 법정동명이 붙게 되었으며, 중리는 420여 년 전에 의성김씨(義城金氏)들이 개척한 후 인동장씨(仁同張氏), 해주최씨(海州崔氏) 등이 함께 대를 이어 거주하고 있다.

▶ 진곡(晋谷) 중리 남쪽에서 팔공산 정상까지 약 13㎞의 김 골짜기를 말하며, 420여 년 전 김광준(金光俊)이라는 선비가 개척한 마을이다.

▶ 양지(陽地) 동쪽을 보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치산면 당시에는 이리(梨里), 직리(稷里), 중리(中里), 음지(陰地), 남원(南院), 잔천(殘川), 도근(道斤), 신시(新是), 남미(南彌), 의천(義川)이 이에 속했다.

3) 마을의 특징

문화유적으로는 귀천서원(龜川書院)이 있으며 안동 권씨들의 중시조이자 임란공신인 화산군(花山君) 권응수(權應銖, 1556~1608) 장군과 당시 영천ㆍ경주 복성 때 공을 세운 분들을 봉향하고 있다.

- 치산성지 : 팔공산 산정에 있는 것으로 높이 1.7m의 토성으로 길이가 1.1㎞ 정도 남아있다. 신라를 방어하던 고려군과 후백제의 치열한 격전장이었으며 아울러 임진왜란 당시에도 전투를 치른 곳으로 미뤄 그 당시의 성인지 아니면 신녕현의 외성(外城)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 구천서원 :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군위, 하양, 의흥, 추평, 영천복성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적을 세워 화산군으로 봉해진 권응수 장군의 향사를 드리는 곳으로 일명 경덕사(敬德祠)라고도 부른다. 이 건물은 숙종(1676) 때 창건되었다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강당 4칸, 영정각(影幀閣) 3칸을 비롯하여 4동이 있으나 상당히 허물어진 상태이다.

- 수도사(修道寺) : 신라 선덕왕 14년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 충렬왕(1296) 때에 중창하고 순조 때 이건했다.

- 진불암(眞佛庵) : 고려 문종 때 혼수국사(混修國師)가 창건한 암자로 1637년에 이응선(李應善씨)가 중수하고 1813년에 등월(燈月), 월장(月長) 두 스님이 다시 중수했다. 1944년 대구에 소위 80연대라는 일본병영에서 용감한 우리 학병이 5명 탈출해 이 절의 다락에 숨어 있었다. 일본 해병대가 마침내 이 암자에까지 닥쳐왔다. 그때 노스님의 태도가 너무나 태연하여 왜병들은 스님의 태도를 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이리하여 젊은 학병 5명은 무사히 생존할 수가 있었다.

- 어사영각(御賜影閣) :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2등공신인 권응수 장군의 향사(享祀)를 지내던 곳인데 서월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영정각(影幀閣)으로 사용되었다가 화남리(華南里)에 경충사(敬忠祠)를 지어 향사를 올리게 됨에 따라 빈각으로 보존되어 있다.

- 관광명소 : 치산은 모과단지로 전국에서도 유명하다. 늦가을 이곳을 지나가 보면 향기가 풍길 정도로 유명하다. 또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주위는 온통 돌 천지다. 마을을 지나 시루봉으로 가는 동쪽으로 수도사가 있다. 다시 올라가면 팔공산에서 가장 명승지인 팔공(치산)폭포에 이른다. 계곡입구에는 1987년 9월 20일에 처음 솟았다는 온천이 있는데 개발하다가 현재 재원관계상 중단상태에 있다.

신녕-치산-(모과)-수도사-온천-물가의 반석(盤石)-여름의 녹음-가을의 단풍-겨울의 설경 등 영천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지이다. 퇴계 이황, 북계 조용석, 금계 황준량, 전암 김경기, 아헌 권치규, 연호 김진성, 소계 정태하 등의 찬미시들이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이 산 정기를 받고 장차 좋은 인물이 날 것이라는 우려에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맥을 끊었던 곳이라고도 전해지는 흔적을 지금도 폭포위의 반석에서 볼 수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삼존불 봉안했던 석굴 확인_______________

봄비가 대지를 적시는 가운데 염불골 계곡의 물소리가 만들어내는 청아한 소리와 한가롭게 산새들이 일대를 날아다니면서 평온함을 선사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식산국 산림과에서 임야 가운데 있는 고적 유물을 조사해 고적대장을 만들고 그것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이 책의 영천군조의 불상항에 “팔공산 아래 진불암 계곡의 암석지내(巖石地內)의 일부에 수도사에서부터 약 20정(약 2.2km), 진불암에서 수정(數町 : 1정은 약109m)의 산중턱에 거대한 화강암 굴속에 자연석에 조각한 높이 3척, 흉폭 1척8촌의 좌불상 1구, 높이 3척4촌 흉폭 1척2촌과 높이 2척5촌, 흉폭 1척2촌의 수호불 각 1개가 있는데 표면에 균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다른 두 구는 일부 파손된 곳이 있어도 거의 완전에 가까우며 근처에 분쇄되어버린 2, 3구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공산폭포를 지난 후 현수교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직진하면 진불암 1.3㎞, 동봉 3.2㎞, 수도사 1.7㎞ 지점에 6ㆍ25동란 이후 산판을 했던 제재소 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개울을 건너지 않고 등산로를 죽 따라가다가 갈림길에서 위로 올라가면 거대한 화강암 석굴이 우뚝서있다.

석굴은 입구 폭 230cm, 높이 140cm, 굴 안 가로 폭 470cm, 최고높이 190cm, 길이 490cm의 아치형으로 성인 7~8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입구 우측의 바위에 넘어진 나무뿌리로 인한 파손이 있어 보수가 필요하고, 굴 안의 바위도 손으로 당기면 떨어지나 대체로 양호한 상태이다.

수도사에서 동남쪽으로 약20정(2.2㎞)이지만 직선거리는 650m 정도이며 GPS로 측정해보니 해발은 620m정도였다.

석굴은 찾았지만 삼존불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일본으로 건너갔을 수도 있고, 6ㆍ25사변 후 산판(벌목 또는 벌목을 하는 곳을 가리키는 강원도 사투리)을 하면서 누군가가 가져갔을 경우 등으로 추측되지만 삼존석불의 존재는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고려 말 승려 신돈이 실각하면서 일대의 불상을 부처굴에 모두 숨겼다고 합니다. 좋은 불상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산판 당시 인부들이 ‘저안에 부처 들었다’며 굴을 향해 손가락질하면 반드시 다쳤어요.”

내려오는 길에 산 아래 마을인 치산리에서 자랐다는 대한불교 태고종 영지사 주지 이상열(72)씨를 방문하니 어릴 때 기억을 이야기했다.

이씨는 이어서 일설에는 우리나라에 3개의 석굴암이 있는데 경주석굴암이 제3석굴암이고 군위삼존석굴이 제2석굴암이며, 치산계곡에 있는 석굴암 즉, 부처굴이 제1석굴암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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