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25. 도동(道洞)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47

1) 자연환경

도동은 서원산(書院山)을 등 뒤에 두고 서향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동쪽으로 북안천(北安川)이 흐르는 연안에 깎아 세운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서원산을 등지고 질펀한 금호강이 서쪽으로 펼쳐져 있다. 강 건너편에는 역시 유봉산이 높다랗게 멀리 막고 있다. 영천 중심지에서 서서히 시작된 주남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며 남쪽은 금호강이 다시 북안천과 합류하여 길게 흐르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 큰마을ㆍ전촌 옛날 화폐 주조소가 있었다 하여 유래된 부락명이다.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현 도남동과 함께 도동화현의 소재지로 전통문화의 요람지였으며 지금도 큰 마을로 부른다.

▶ 구역(舊驛) 원래는 갯터였다. 1914년 대구선 철도가 부설되어 영천역이 있었는데 1938년 현재 역으로 옮겨간 뒤부터 역이 있었던 지역이라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한다.

▶ 삼거리(三巨里) 경주로 가는 국도에서 구역쪽으로 가는 길이 세 갈래로 되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 옹기점(甕器店) 도동 고개에서 구역(舊驛) 부근에 이루어진 자연부락이다. 조선후기부터 질그릇 류를 구워내는 도요지(陶窯地)로 성업하였다.

▶ 동댕이<동당(東塘)> 전촌(錢村) 동쪽에 조그마한 못이 있어 불려지게 되었는데 동(東)이란 동쪽을 이르며 댕이란 덩이란 뜻으로 동쪽에 있는 웅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상산(上山) 경주로 통하는 고갯길의 제일 높은 지점을 이르는 자연부락 이름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요도 옛날 죄인의 유배지로서 금호강과 북안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연적으로 삼각주가 만들어진 곳이다.

도동은 원래 도남동과 같은 문화권에 있었다. 신라시대에는 도동현(道同縣)에 속하여 있었으며 당시로는 상당한 문화지역이었음이 몇몇 유적이나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도동이라 불렀으며 완산면에 속하였다. 그러나 1914년 행정개편으로 완산면이 폐지되고 새로 구성된 영천면에 속하고 그 후 1981년 영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다시 주남동에 속하였다가 1998년부터 남부동에 소속되었다.

전설 - 요도와 목리미 산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옛날 영천땅에 구씨 성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어느 해 고을의 사또가 처녀를 탐하여 갖은 회유로 유혹하였다. 그러나 처녀와 처녀아버지는 완강히 거절하였고 결국 난폭한 사또는 품팔이로 간신히 생활하는 소작 구씨를 역모로 몰아 요도로 위리하였다.

요도는 도동에 있었으며 사방 푸른 강물로 둘러싸인 삼각주로 죄수를 격리시키는 곳이었다. 구씨가 위리된 그날부터 처녀와 약혼자는 멀리 유봉산에 올라가 요도를 내려다보며 안타까워했다. 낮이면 비록 개미처럼 작게 보이지만 서로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밤에는 그렇지 못하여 서로가 목이 터져라 부르며 확인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 처량한 울부짖음은 온 산을 더듬고 들판을 거슬러 인근사람의 오관을 녹이며 가슴을 적셨다. 결국 구씨는 굶어죽었고 죽던 날 밤 갑자기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괴변이 일어났다. 죽어있어야 할 구씨의 시신은 온데 간 데 없어졌고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던 딸과 약혼자는 산 아래로 내려와 나란히 돌이 되어 서 있었다. 그리고 사또는 벼락을 맞아 갈가리 찢겨져 동헌 뜰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구씨가 죽는 날까지 딸이 있는 유봉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고 해서 무리미산이라 부르고 두 남녀가 돌이 된 마을은 입석이라고 했다. 또한 구씨의 원혼이 비가 되었다고 믿어 가뭄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