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변천사

19. 쌍계동(雙溪洞)

이원석(문엄) 2011. 11. 13. 08:43

1) 자연환경

글자의 뜻 그대로 두 강이 합한 곳이란 뜻이다. 팔공산 부근에서 발원된 신녕천과 보현산 부근에서 발원된 고현천(古賢川)이 마을 앞에서 합류한다. 동쪽으로는 조그만 평야를 지나 금호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사모산(思母山)이 우뚝 서있다.

남쪽으로는 오수동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역시 굽어 도는 강 건너편의 화룡동과 경계를 이룬다. 신녕천과 고현천이 마을의 서북쪽에서 합류하여 북동방향으로 ‘ㄱ’자형으로 흐르고 사모산과 유봉산이 ‘ㄴ’자형으로 서남쪽을 감싸고 있다.

2) 마을의 역사

▶ 쌍계(雙溪) 팔공산에서 근원하여 영천시 화룡동으로 흐르는 신녕천(新寧川)과 고현천<古賢川, 일명 화북천(華北川)>의 이수(二水)와 봉화산(烽火山)ㆍ사모산(思母山)ㆍ유봉산(遊鳳山)의 삼산(三山) 사이에서 합류되는 그 지점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임진왜란 때 영천의 16의사와 함께 영천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우고 경주의 서천(西川)으로 나아가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쌍계(雙溪) 이영근(李榮根) 선생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이 쌍계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 산제ㆍ산저(山底) 마을 뒷산에는 남쪽으로 경주시 아화면(阿火面) 봉수대(烽燧臺)와 북쪽으로 청통면 신덕리 봉수대와 연결되어 있는 쌍계 봉수대가 마을 뒷산인 봉화산정(烽火山頂)에 자리 잡고 있으며, 봉화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산저(山底)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쌍계동에는 한림지(翰林趾), 성지곡(聖知谷) 등이 있다. 한림지는 고려시대에 성명미상의 한림학사가 거주하던 지역이고, 성지곡은 국풍(정부에 소속된 풍수지리관)인 성지(聖知)가 이곳을 살피고 돌아갔다 하여 지어진 명칭이라 한다.

이 마을은 원래 산저동(山底洞)이라 불렸다. 이는 사모산(思母山) 동쪽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던 것이 근대행정체제가 성립되면서 쌍계동이라 부르고 역시 이 동네의 명칭인 산저는 면 명칭이 되어 산저면 쌍계동이 된 것이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산저면이 폐지되고 신설된 청통면에 속하였으며 다시 1983년에는 영천시에 편입되어 교동에 속하였다가 지금은 서부동에 소속되어 있다.

전설 - 사모산의 모정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옛날 영천고을에 어떤 군수가 부임하였다. 집이 서울이라 모든 가족이 함께 이주할 수는 없고 성숙한 딸아이와 임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딸아이의 거처에 건장한 도령이 드나들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청년은 전임군수의 요절한 아들의 혼령이었다. 처녀는 밤마다 혼령과 사랑을 속삭였고 어느덧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가연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혼령의 실토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연을 알게 된 처녀는 드디어 몸져눕게 되었다. 이름 있는 의원을 불러 진료를 하고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하여 구완하였으나 결국 처녀는 죽고 말았다. 죽기 전 처녀는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유는 소녀의 마음이 부실하여 어머니도 뵙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멀리서라도 비록 혼령이지만 사모하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그 산을 사모산이라 부르고 산 정상에는 무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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