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환경
영천시의 중심지에 나지막하면서도 길게 동서로 펼쳐진 산이 마현산(馬峴山)이다. 이 산의 동편 끝자락에 자리 잡은 부락이 야사동이다. 남쪽으로는 조금 떨어진 상류에서 합류한 자호천과 고경천이 동네 앞을 흐르면서 제법 큰 남천(南川)을 형성하고 있으며 강 건너편에는 주남평야가 멀리 도동까지 연결되어 있다.
2) 마을의 역사
▶ 버드나무골ㆍ보목동(甫木洞) 바깥야사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촌락으로 망정동 미륵딩이와 인접하여 있다. 옛날에 버드나무숲이 크게 우거져 있었다고 해서 일명 버드나무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바깥마ㆍ바깥야사 야사동 중앙지인 큰길가에 새로 번성된 마을로 지금은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고 아파트와 상가가 정비되어 있다.
▶ 안마ㆍ안야사 이곳은 야사동 본동에서 북동쪽에 위치하며 이 지역 내에 영동중ㆍ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 야사골 안야사 북쪽 골 깊숙이 들어가 있는 마을이다.
영천의 옛 지명이 절야화군(切也火郡)이다. 그러므로 절야화군과 야사(也史)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또한 강 건너편의 금강산성은 신라시대의 성이고 보니 이 지역은 고대문화의 중심지라 믿어진다.
이 동네는 보목골, 화지대골, 죽은나무골, 분통골 등의 속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목골은 일명 버들골이라고도 부르며 버드나무숲이 무성하여 지칭하였다고 하며, 화대지골은 화전으로 이룩된 지역이라서 불러진 이름이라 전한다.
그리고 죽은나무골은 원래는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었는데 어느 해 3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나무들이 모두 말라죽었다고 전해진 명칭이며, 분통골은 농사를 원만히 짓기 위해 저수지를 막았으나 장마철만 되면 못둑이 무너져 주민들이 화가 치밀어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그 후 1914년 면, 리ㆍ동 폐합조정 때 내동면 소재 야사동과 보목동(甫木洞) 일부를 합하여 야사동으로 칭하고 영천면에 할속되었다. 그 후 1981년 영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새로 구성된 동부동(東部洞)에 속하였다.
탕건바위 전설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남천이 흐르는 금호강 둔치에서 야사동 대현아파트로 올라가는 언덕에 우뚝 선 탕건바위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 야사동에 서씨 성을 가진 부호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월례라는 아리따운 무남독녀가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마음 또한 착하여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 밤 월례는 탕건바위에서 산책을 하다가 그만 실수로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한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치던 가난한 집 총각에 의하여 간신히 구명되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월례의 집은 이름난 토호의 집이요, 총각은 소작인의 아들이어서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서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혼은 생각지도 못할 처지였다.
월례는 드디어 죽기를 결심하고 탕건바위 밑으로 몸을 던졌다. 서씨 집은 말할 것도 없고 총각 또한 한없는 슬픔에 잠겨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총각도 함께 죽기로 결심했다. 월례가 벗어둔 두 짝의 짚신을 가슴에 쓸어안고 막 물길로 뛰어들려는 순간 난데없이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월례의 음성이었다. “어찌 죽으려 하느냐! 그 힘으로 탕건바위를 깨뜨려 버려라”라는 소리였다.
총각은 그날 탕건바위를 깨뜨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처럼 당당하던 서씨 집은 차차 몰락하기 시작했고 총각의 집은 우연한 일에도 행운이 찾아들며 융성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총각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다. 밤마다 떠오르는 월례의 환영에 사로잡혀 그도 결국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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