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비, 황성옛터 노래비, 사현대… 영천문화 일번지
경찰서가 금호로 이전하고 시ㆍ군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군청마저 없어져 창구동 일대의 상권이 많이 위축되었다. 그러나 조양공원 내에 문화원이 있고 이 일대와 조양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강변 둔치에서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활발히 열리면서 창구동은 여전히 영천문화 일번지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창구동은 예부터 영천지역의 가장 중심부를 이룬 동네로 북쪽으로는 마현산 주봉이 버티고 있고 남으로는 남쪽천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문내동과 인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교촌ㆍ과전동과 접하고 있다.
특히 이 동네는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옛날 남문과 북문이 모두 있었던 지역이다. 타지역에서 온 손님과 조양공원을 찾게 되면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너무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또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서세루에 올라서서는 “원래는 주남평야를 가로질러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채약산 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하던데 앞을 답답하게 만드는 저 고층아파트는 누구 작품이냐”는 핀잔도 자주 듣게 된다.
처음에는 명원루(明遠樓)라고 불렀다고 전하는데 사가 서거정이 지은 기문에 ‘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遠目增雙明)라는 당나라 명문장가 한퇴지의 시에서 따온 말이라고 적혀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보현산에서 원류가 된 남천과 북천이 영천 중심지에서 합류하여 금호강을 이루는 남천의 절벽 위에 지은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누각으로 진주 촉석루,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 울산 태화루, 양산 쌍벽루, 김해 연자루와 더불어 영남 7대루의 하나로 손꼽힌다.
1482년 군수 신윤종이 동서 별실을 고쳐서 동을 청량당, 서를 쌍청당이라 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1637년 군수 한덕급이 그 자리에 누각 15칸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朝陽閣)이라 이름했다.
조양이란 시경 대아권아편에 “봉황이 우는도다! 저 높은 언덕에서 오동나무가 자랐도다! 저 산의 동쪽에 잎새가 싱싱하다 오동나무여! 화창히도 우네 봉황새여!”란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예로부터 영천의 지세가 ‘나는 봉황새’모양이라 “봉황은 조양에서 운다”는 권아편의 싯귀를 따서 누각이름을 조양각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봉황이 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니 ‘서세(瑞世)’인 것이다. 다시 1742년(영조 18) 당대의 명필인 군수 윤봉오가 조양각을 중창하여 손수 서세루(瑞世樓)란 현판을 써 달았다.
현재는 좌우 별실 등 부속건물은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조양각 건물만 포은 정몽주, 사가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율곡 이이, 노계 박인로 등 당대 명현들의 시액 70여 점을 간직한 채 날아갈듯 웅장하게 서있다.
문화재 지정 당시 건물의 현황을 살펴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그 중 한 칸이 구둘 방이다. 구둘 방은 전면에서 건물을 향하고 서서 어간(御間) 다음의 협칸(挾間)에 있는데 고주(高柱)에 전단(前端)을 의지하여 전퇴일칸(前退一間)이 형성되어 있다.
방의 천장은 평천장(平天障)이나 우물로 꾸몄고 단청을 했는데 원형이 이런 모양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주(高柱)에는 벽선을 세워 문얼굴을 구성했다. 여기에 문짝을 설비했다.
현재 4면의 벽이 모두 열려져 있는데 이것 역시 원형인지 불분명하다. 보통의 경우는 후면벽은 벽체가 되는 것이나 여기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방 이외의 마루는 모두 우물마루이다. 우물마루는 마루가 큼직하여 청판이 길쭉길쭉하다.
이들 청판은 고색이 짙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보수된 것 같다. 방의 고주 주간(柱間)의 인방(引枋) 위는 흙벽이다. 지금은 분벽(粉壁)이나 원래는 사벽(沙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퇴량(退樑)은 고주에 걸렸다. 고주는 더 높이 솟아 중대공이 되었는데 이는 매우 견실한 가구법(架構法)이다. 청의 가구는 오량가(五樑架)이다.
긴 대량(大樑)이 결구(結構)되었는데 그 단면이 두형(頭形)에 가까운 원형이다. 이는 구형(口形)의 선박처럼 생긴 조선조 일반적인 대량(大樑)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형상이다.대량상(大樑上)에 종량(宗樑)이 있다.
삼분변작(三分變作)한 기법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중대공은 일종의 포대공이다. 대량상에 주두(柱頭)를 놓고 보아지를 두공(頭工)처럼 짜고 중도리 및 바침 장혀를 받는 이중의 첨자를 결구시켰다. 토대공으로도 그리 흔한 양상은 아니다.종대공(宗台工)은 거대하다.
판대공(板台工)인데 종량의 길이만큼을 다 차지하는 범위에 안좌(鞍坐)를 정하고 삼각상(三角狀)으로 솟아올라 종도리를 받았다. 파연대공(波蓮台工)의 일종이다. 천장은 연등이다. 방을 제외한 부분에서 전부 서까래를 올려다 볼 수 있는데 단지 층량보 위에서만은 눈썹천장에 가려졌다. 측면이 3칸이어서 충량(衝樑)은 두 가닥 휘어 올라 대량(大樑)에 걸렸다. 자연히 중대공에 결구되게 되었는데 그것이 포대공의 일원이 되는 방안은 그리 흔하지 않은 기법이다.
우미량처럼 충량이 휘어 올라서 중도리의 왕찌 부분이 충량의 등에 타고 앉게 되었다. 따로 바침을 두지 않게 된 것도 흥미 있는 구성이다. 눈썹천장은 우물이고 소란천장이다. 평주상(平柱上)의 공포구성은 익공형(翼工形)이다. 쇠서의 존재로 보아서는 이익공형(二翼工形)이나 실제의 구성에서는 전형(典形)에서 벗어났다.
귀공포에서 쇠설을 절단 생략한 기법도 특색이 있으며 익공(翼工)의 전형적인 양식에서도 벗어나는 양태이다. 창방머리가 점차로 발전한 예도 보기 드문 법식이다. 이런 양식은 익공도 아니며 그렇다고 주심포도 아니다. 결국 절충형인데 창방과 짜인 주두 아래의 헛점차와 대량바침의 보아지가 뒤쪽에서는 한 몸의 보아지가 되었고 앞머리에선 그것이 이제공(二諸工)이 되었다. 이 구성으로 익공 전형의 두 주두의 설치는 벗어나고 말았다.
주심포계가 아니어서 외목(外目)이 없다. 그리고 주간(柱間)에는 화반(華盤)이 있다. 앙화반(仰華盤)이다. 각간(各間)에 2매씩이나 전후 퇴간만은 1매씩이다. 누 아래 기둥은 짧고 원형으로 된 나무기둥이다. 손질한 주초(柱礎)에 정초(定礎) 좌우 우주(隅柱)는 콘크리트 두 겹을 씌워 주초도 보이지 않는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樓)는 전면이 고상식(高床式)이고 배면은 접륙(接陸)하였는데 이 부분의 화강석 기단은 후에 설치한 이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 때인가 반드시 없어져야 할 구조물이다. 인조 15년(1637)에 군수 한덕급이 명원루 터에 누사 15칸을 중건하고 조양각이라 했다. 숙종 2년(1676)에 군수 이만봉이 중수하고 26년 후인 1702년 군수 권영경이 중창했고 영조 18년(1742) 군수 윤봉오가 세 번째로 중창했다.
윤봉오 군수는 중창한 누사에 서세루(瑞世樓 : 현재 배면에 현판되어 있음)라 편액하고 내문(內門)을 남덕문(覽德門), 외문(外門)을 곤구문(崑邱門)이라 했다. 이후 영조 38년(1763), 정조 21년(1797), 순조 10년(1810), 고종 7년(1870), 고종 23년(1886)과 1921년에 각각 중수했다고 전한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영천 심상소학교를 지을 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건축물을 철거하여 지금과 같이 위축되고 말았다.
이후 영조 38년(1763), 정조 21년(1797), 순조 10년(1810), 고종 7년(1870), 고종 23년(1886)과 1921년에 각각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영천 심상소학교를 지을 때 누사의 내외문을 비롯한 건축물을 철거하여 지금과 같이 위축되고 말았다.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간에 걸친 영천지구 공방전은 한국전쟁의 국운을 바로 잡는 큰 전투였다.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1만5천여명(아군 7개 연대, 적군 5개 연대)이었고 화력은 아군이 60미리포 26문과 57미리 대전차포 6문에 비하여 적군은 76미리포 38문과 12미리포 12문, 전차 12대였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 적 사살 6,799명, 포로 309명, 전차 7대, 차량 85대, 화포 14문, 소총 2,327정을 노획하는 등 혁혁한 공과를 올렸다. 문화원 뒷마당에 있는 영천지구 전승비는 이와 같은 전공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비신의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조양공원 내에 건립된 황성옛터 노래비는 황성옛터, 대한팔경 등의 작품을 남긴 왕평 이응호(1908∼1943)를 기려 지난 1989년에 세웠고, 백신애 표지비는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며 꺼래이, 적빈, 아름다운 노을 등의 작품을 남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백신애(1908∼1939)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94년 우리문학 기림회에서 세운 것이다.
또 산남의진비는 구한말 의병으로 연일, 죽장, 영천 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산화한 산남의진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상북도의 후원을 받아 1963년 3월에 세워진 것으로 화산암 2층 기단 위에 비문의 글은 풍산 유석우가 지었고 해주 오규석이 썼다.
조양공원 오른쪽에는 지금까지 영천을 다스린 목민관 중에서 업적이 분명한 사람들의 선정비를 모아둔 사현대(思賢臺)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지역의 지도자들이 줄줄이 중도하차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곳을 찾는 시민들의 감회가 새로울 것으로 생각된다.
‘선정 베푼 목민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어진 이를 생각하게 하는 조양공원 ‘사현대’
“고을 사람들 괴로움이 한(限)인들 있으리요. 기병대(騎兵隊) 불공평 편입, 무당(武堂 : 병역 사무를 담당한 관청)에 부림 받고, 엉뚱하게 화를 입어 고역도 많거니와 돈조차 자주 찾네. 두회(頭會 : 사람의 머리수에 따라 내는 세금)에 시달려서 눈병조차 돌볼 겨를 없네. 우리 원님 인명(仁明 : 어질고 사리에 밝음)하사 혜택이 많기도 하다. 고질을 두루 소생시키고자 자기 몸같이 보살필 세 4,000문(文 : 돈의 단위)을 던져서 22방(坊 : 마을)에 나눈 후 이식(利息)을 불려서 저것(두회 세금)을 갚으니 그 폐단이 멎었네. 일군(부당하게 군포를 바쳐야 했던 사람)이 포덕(飽德 : 은혜를 많이 입음)하여 미칠 듯이 춤추네. 무엇으로 이 은혜 갚사오리. 이 비석아 무궁하라!”
1825년(순조 25) 정월에 대구판관으로 있다가 영천으로 와서 선정을 베푼 조재만 군수의 불망비로 1827년 11월에 세워졌다.
단풍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늦가을의 정취를 뽐내고 있는 창구동 1번지 영천조양공원 오른쪽 언덕위에는 영천을 다스린 역대 목민관들의 선정비를 가지런히 모아둔‘사현대(思賢臺)’가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영천보건소(구 영천군청) 입구 서편에 서있었으나 2004년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옮겨왔다.
조선 인조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목민(牧民)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관찰사(觀察使), 군수 현감들의 송덕비로 영천읍 문내동 152번지 담장 밑에 무질서하게 서 있던 것을 1972년 4월 10일 당국이 현 위치로 옮겨 배열한 후 단장하고 비군(碑群)을 통칭하여 사현대(司縣臺)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관찰사 박상공영세불망비 외 21비가 있다.
정도영씨의 글에 신억씨가 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군수의 이 장거는 정부의 문화보호책에 호응하는 동시에 선민들이 거사한 좋은 풍속을 세상에 천명한 것이니 뒤에 이 고을에 와서 성을 지켜, 이 비를 보는 사람은 반드시 본받을 마음이 있어 선정할 것을 다짐할 터인즉 신 군수의 뜻이 바로 여기 있지 않았겠나. 군수가 전번에 나에게 이일을 의논하더니, 준공에 이르러 군내의 선비들이 군수의 공적을 기리고 장차 비를 만들어 대(臺)를 표시하고자 내 집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곡식을 얻고 솥을 얻어도 그 해를 기록하고 책에 기록하여 잊지 않음을 보였거늘 지금 군수의 이 대도 곡식과 솥에 못하지 않음으로 원컨대 그대가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또한 글도 지어 주게나.” 하므로 좋게 여겨 마침내 ‘사현대’라 이름 지으니 ‘사현’은 촉(蜀)나라의 정각(亭閣) 이름이고, 여기 그 전말을 써서 영천의 고사로 삼을 따름이다.
“두시(杜詩) 노인같이 힘써 다스리고 문옹(文翁) 같이 교화했네. 그 은덕을 보답코자 하나 비석이 오히려 부족하네.”(이만직 군수 선정비)
이만직 군수는 1707년(숙종 33) 2월에 임파 현령으로서 왔다가 1709년 5월에 청주목사로 옮겨갔다. 이 군수는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나주목사와 광주(廣州)부사,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철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념했다. 후에 형조참의까지 지냈다.
“예의는 양로(養老 : 노인을 존경하여 대접함)함을 먼저하고 은혜는 가난한 이에게 두루 베풀었다. 세금을 줄여 부담을 덜어주고 치안유지에 그 몸이 수고로웠다. 고을의 병폐를 다 없애니 백성의 숨은 사정이 시원히 풀렸네. 영원토록 경앙(景仰 : 존경하여 우러러봄)하니 그 빗돌아 높거라!”(이장용 군수 거사비)
이장용 군수는 1901년(광무 5) 8월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서 부임하여 결복(結卜 : 현 토지소득세에 해당함) 단위를 41량 6전 7푼으로 정하고 이듬해 3월에 장기군수로 떠났다. 이해 8월에 함열에서 다시 영천으로 왔다가 1905년 정월 장흥군수로 갔다. “실정에 맞도록 정치를 하였고, 남이 칭찬해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청간(청백하고 검소함)하게 몸을 던져 한결같이 3년을 보냈다.”(박봉화 현감 선정비)
박봉화 현감은 1859년(철종 10) 3월에 은진현감으로서 부임했다가 1861년 6월에 원주판관이 되어 갔다. “선비의 집에 태어나서 학문이 뛰어나 벼슬하였네. 사재를 털어 백성을 돕고 감선(減繕 : 흉년에 백성을 걱정하여 지방장관이 반찬을 줄이는 것)하여 주려 죽은 백성을 조문하였네. 백성은 걱정 없고 선비는 스승을 두었네.”
“공이 고을에 오신지 이제 몇 해던고 유림의 표준이라. 백성을 사랑하고 정성스레 다스려서 행동이 모두 격당(格當)하여 윤리와 기강을 유지하였다. 떠나심을 아낀 한 조각비는 만 가지에 하나도 은혜를 갚지 못했는데 남쪽 땅 한 모퉁이에서 다 스러져가네. 여론에 따라 비각을 세우고 여기 옮기니 공의 유덕을 사모함을 오늘에도 보겠네. 끊이지 않는 은택이 오래도록 이어지리.”(성근묵 군수 휼민비)
성 군수는 1828년(순조 28) 후릉령(厚陵令)으로서 왔다가 1831년 6월에 청송부사로 옮겨갔다.
“물이 맑아지려고 공이 오셨고, 은혜가 태산도 가벼운데 공이 가셨네. 천금으로 은혜를 베풀었는데 한 조각 비문이 어찌 말을 다하리.”(이범석 군수 거사비)
이 군수는 1902년(광무 6)4월에 김제군수로 있다가 와서 8월에 다른 곳으로 갔다. “4년의 맑은 바람(청백한 행정)에 염평(廉平 : 청렴하고 공평함)이 이르는 곳마다, 만인이 가송(歌誦 : 노래하고 칭송함)하고 백폐(百弊 : 여러 가지 쇠퇴한 일들)가 다 흥왕해졌네.”(청백군수 박세병 불망비)
박 군수는 1880년(고종 17) 7월에 남평현감으로 있다 와서 1883년 12월에 김해부사로 떠났다.
“공평하게 다스림에 청숙(淸肅 : 청백하고 엄숙함)함이 기풍이요 조정에 삼계(三啓 : 세번 상소함)하여 재해를 막아주고 10조로서 궁함을 구제하니 고마운 은혜는 바다보다 깊고 산보다 높구나. 백성이 모두 즐겁다 하니 사마온공(司馬溫公)을 다시보네.”(박제인 관찰사 불망비)
“구슬 같은 자질이요, 빙옥같이 빛나네. 훌륭하다 우리 원님, 죽도록 못 잊겠네.”
“이는 나의 외증조부 영의정 만사(晩沙 : 심지원 군수의 호) 심공의 유애비(선정비와 같은 뜻)다. 공은 숭정계유(崇禎癸酉‧1633)에 사인으로서 여기 나와 군수 질 하다가 갑술년(1634)에 중승으로 소환되었다. 원님으로 1년 있으매 후택(厚澤 : 두터운 은택)이 흡족하여 읍민이 비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 뒤 82년 만에 소자가 또한 여기 고을살이하매 글자도 희미하게 마태가 끼어서 흠감(欽感 : 두렵게 느낌)함을 금할 수 없네. 비각을 짓고 다시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니 그 청덕을 감히 이어 닮기 못하지만 공을 사모하는 백성들이여, 게을리 하여 욕될까 두려워 할지로다. 실로 을미(1715) 3월일이라. 외 증손 군수 이명희 지음”(심지원 군수 청덕비)
심 군수는 1633년(인조 11) 7월에 의정부 사인으로 왔다가 이듬해 7월, 사헌부집의로 갔다. 효종 때 영의정이 되고 영천의 송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외 증손인 이명희 군수도 뒤에 선정하여 청덕선정동비(淸德善政銅碑)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이 외에도 비문은 전해지지 않지만 1702년(숙종 28) 9월에 와서 조양각을 중창하고 청량당(淸凉堂 : 조양각 부속건물)의 단청을 다시 했으며 내별당(內別堂 : 군청안채의 별당)을 새로 지은 권수경 군수의 선정비와 1886년(고종 23) 12월 영천(榮川 : 현 영주)군수로 있다가 본군에 부임, 조양각을 다시 수즙(지붕을 고쳐 이음)하고 각 관청을 수선했다.
1890년 고려현감으로 전출 간 임시익 군수의 청덕비, 1848년(헌종 14) 2월에 광주판관으로서 왔다가 1851년(철종 20)에 그만둔 이계영 군수의 거사비, 김병완 군수 불망비, 박준성 군수 불망비, 철종 때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서희순 관찰자 청덕비, 이헌영 관찰자 거사비가 있다.
또, 1881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을 시찰하였고 1903년경에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이헌영 관찰자 거사비, 장승원 관찰자 선정비, 이만직 어사 선정비, 심지원 군수 청덕비, 이학래 군수 불망비, 홍순형 군수 청덕비 등이 세월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남아있다.
어진 이를 생각하게 하는‘사현대.’영천 지역민들을 편안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목민관들을 기린 21좌의 선정비가 조양공원 한편에 우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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