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통문’ 만들어 사후에도 사랑 나눠
30여년 가까이 남남으로 살아오던 남녀가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뭉쳐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네의 일상적인 세상살이.
개중에는 알콩달콩 애틋함과 사랑으로 서로 의지하면서 한 평생의 반려자와 동지로 살아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며 원수 아닌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부부도 많이 있다.
가난했지만 젊은 시절 고생만 하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아내를 못잊어하며 지극정성으로 가꾼 한국판 타지마할, 고인돌 사랑무덤에서 부부사이를 한번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
봉분이 푸른 타일로 덮여있고, 그 위에 큰 돌로 만들어진 덮개까지 마치 고대 고인돌을 연상케 한다. 왕릉에서나 볼법한 장식물과 안으로 통하는 문도 이 무덤이 보통 무덤은 아닌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 옆에 자리한 굴처럼 생긴 무덤 역시 특이하다.
이 무덤은 대구에 살던 오원복 노인이 죽은 아내를 위해 10여 년 전 만들어놓은 무덤이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병으로 몸져누워 있을 때, 할머니가 지극 정성으로 할아버지를 돌봐드렸고 그 때문에 할아버지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병간호에 지쳐서일까, 할머니의 건강이 쇠약해져 결국 돌아가시고, 자신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할머니 무덤이라도 좋은 자리에 잘 꾸며주고 싶었으리라.
보현마을을 찾아 굴을 파고, 돌을 얹어 그 무덤을 만드는 데만 무려 5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무덤을 ‘한국판 타지마할’이라 부른다고.
인도의 한 남자가 자신의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22년간 만들었다는 신비의 무덤인 타지마할. 오원복 노인도 9년전 세상을 떠났지만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다.
“여보 땅을 치고 통곡도 하고 울어도 봤소.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 몸 건강히 잘 있구려 마누라”
자양면 보현4리(신기마을) 건너편 야산에는 연자방아와 장독, 화분 등 각종 조형물로 장식을 하고 시멘트 바닥에 보랏빛 타일로 봉분을 덮은 두 개의 무덤과 주위에 심겨진 밤나무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국판 타지마할, 사랑무덤’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무덤은 오원복 노인의 부부무덤으로 오 노인은 지난 81년 10월, 끔찍이 사랑하던 부인이 고혈압으로 숨지자 자신을 위해 고생만 하다가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해 가족들의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인묘소 옆에서 3년 동안 움막생활을 하며 당시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오 노인이 죽은 부인을 그토록 잊지 못한 것은 젊은 시절 척추 뼈가 썩어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당시 23세 꽃다운 나이였던 부인의 지극한 정성으로 자신의 생명을 건졌기 때문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부인이 오 노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새벽 3시에 경찰에게 잡혔으나 사정을 들은 경찰이 사실을 확인하고 돌려보내 주었다는 내용이 비문에 남아 있어 당시 부인의 애타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오씨는 죽은 부인이 생전에 피땀으로 모은 250만원으로 구입한 1천9백여 평의 터에 불쌍한 아내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고인돌무덤공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원조성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대구의 역 주위와 정류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불구의 몸을 이끌고‘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와 흘러간 가요들을 열창하며 한푼 두푼 모아 5년여에 걸쳐 결국 완전한 고인돌무덤공원을 완성하게 되었다.
고대 부족사회 때의 묘제인 우리나라의 지석묘는 지상에 탁자형으로 높이 세워진 북방식과 지상과 석반이 낮게 세워진 남방식의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오 노인이 만든 것은 이 두 가지 양식을 혼합한 형태이다.
3년 전에 작고한 오원복 노인도 자신이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부인의 묘 옆자리에서 안식하게 되었는데 무덤사이에 부부간 묘지의 연결통로인 내통문을 만들어 죽은 뒤에도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공원 내에는“부부간에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어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글귀가 새겨진 돌을 비롯해 부인이 동대구경찰서장에게 승공부녀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된 내용 등이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박 서방 어린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니 나는 죽어도 원이 없네. 큰 일하도록 빌어줌세. 우리 박 서방은 처갓집에 근10년 간 득을 주었다고 언제든지 동네사람을 만나면 장모는 자랑을 했다네. 그런 착한 사위도 드물다고”라며 사위사랑을 나타낸 글도 보인다.
입구에 있는 화장실을 비롯해 각종 조형물과 크고 작은 돌들의 조화, 잘 다듬어진 주위 경관들이 잘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이곳에는 더러 사람들이 찾아온 흔적들이 보이지만 이들 부부의 사랑에 감화되어서인지 아직까지는 말끔하게 잘 단장되어 있다. 그러나 묘 사이가 갈라지고 균열을 보이고 있어 머지않아 붕괴되지나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평생 동반자의 개념이 사라져 가고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서로의 길을 가려는 이 시대의 부부관에서 보면 당대의 기인으로 고집스런 삶을 살며 기어이 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오원복 노인은 우리들에게 특이한 사람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덤사이에 통로를 만들면서까지 함께 하고자 했던 이들 부부의 사랑 앞에 우리들은 진정한 사랑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03. 12. 6)
'영천 문화유산 자료 > 영천문화유산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둔촌과 천곡의 애틋한 우의 서려 - 북안 도유리 광릉 (0) | 2011.11.13 |
---|---|
7. 수도사 진불암… 새소리, 물소리 길손 반기는 고즈넉한 산사 (0) | 2011.11.13 |
5. 아! 전삼달 장군… 이제는 편히 쉬소서! (0) | 2011.11.13 |
4. 옛길 걸으며 영천읍성 자취 더듬어 - 영천읍성 (0) | 2011.11.13 |
3. ‘영천정신’ 결집할 골화소국 중심부 - 금강산성 (0) | 2011.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