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문화유산 자료/영천문화유산 답사기

5. 아! 전삼달 장군… 이제는 편히 쉬소서!

이원석(문엄) 2011. 11. 13. 07:59

묘소 이장과정 371년된 미라 수습, 유물 국립민속박물관 기증

임랑의병장, 효자, 목민관으로 ‘불꽃같은 삶’ 살다간 충절의 사표

 

 

지난 2004년 1월 15일, 용궁전씨 문중은 화산면 화산리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전삼달 장군의 묘소이장 작업을 벌이던 도중,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송진 10여㎝ 두께에 둘러싸인 관에서 장례를 치른 지 371년이 지난 장군의 시신이 미라 상태로 보존된 채 나왔기 때문이다.

 

장군의 11대손인 대한노인회 전영대 영천시지회장(78)이 여러 친족들과 더불어 전 도의원 김종덕씨의 조언을 받아 무학대사의 비결에 나오는 영천 10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히는 천마시풍(天馬嘶風)인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 백산으로 이장하는 과정에 무덤에서 유기로 구운 묘지명(가로 20㎝, 세로 20㎝, 폭 1㎝) 2개가 발견되었다.

 

시신은 수의 10습을 입고 있었다. 문중에서는 발견된 유물중 수의 1습과 지석 2점 등 총 2건 3점을 지난 6월 10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고 2천여 만원의 예산을 들여 비석, 문인석, 사자상, 석등, 망주 등을 세워 묘역을 단장하여 장군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편히 잠들게 했다.

 

미라(mirra)는 천연적 또는 인공적인 처리로 오랫동안 원형에 가까운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인간 또는 동물의 시체를 일컫는 말로 지난 2002년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에서 430년 만에 발견된 파평윤씨 모자 미라 및 유물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돼 세간의 화제가 된 바 있다.미라가 되기 위해서는 밀폐된 공간에서 습기가 거의 없어야 하고 미생물이 살 수 있어서는 안 된다.

 

파평윤씨 모자 미라가 추운 겨울인 12월에 사망했고 시신 전체를 정결한 옷으로 꽁꽁 사맸으며 매우 두꺼운 이중목관을 사용했음을 미루어볼 때 전삼달 장군의 시신도 이와 비슷한 환경요인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또한 두꺼운 송진으로 둘러싸인 관도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산 넘어 천리 계신 왕이 어찌 아시리요

북쪽을 바라보며 잠 못 이뤄 아픈 가슴

구국 향해 맹세한 의병장의 큰 뜻은

죽는다 하더라도 어찌 목숨 아끼리요

 

이 글은 영고정 전삼달 장군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안강 진중에서 쓴 글이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왜병을 상대로 정규군이 아닌 의병들을 모집하여 대치한 23살의 젊은 의병장이 죽음으로서 보국하겠다는 뜨거운 충정을 표현한 것이다.

 

1570년 녹전동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치밀하여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연마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의 충정으로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사천(沙川)전투와 영천복성전투, 경주전투에 참가해 큰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 관계에 첫발을 디뎠고 1612년 함평현감으로 있을 때 북쪽 변방지역에 오랑캐가 나타나 노략질을 자행하므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북방 경비책으로  심양(瀋陽)에 급파되어 이를 쳐부수며 큰 전과를 올렸다.

 

1616년 정3품인 절충장군에 봉직되었고 용양위부호군 영흥대도호부사, 장단진도호부사가 되었다. 재직하는 곳마다 성을 쌓거나 보수하고 군기 정비와 군사 확충으로 적의 출입처나 염탐꾼을 봉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토록 했다. 장군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장단에 선정비(善政碑), 황주에 거사비(去思碑)가 각각 세워졌다.

 

1626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배명 받는 자리에서 광해군은 “경은 이미 임지에서 온 힘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였으므로 상으로 임직을 특명하니 용렬한 일을 경계하고 군율을 바로잡아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더욱이 경은 학식이 높고 검도와 궁술이 출중하니 그 무예를 바탕으로 영남지방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훌륭한 의용군이 되도록 훈련을 시켜라. 이가 곧 나라와 종묘사직에 충성하는 길이요, 스스로 명성을 얻어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하고 교시했다.

 

이는 장군이 격전장에서 치른 용맹은 물론이거니와 주도면밀한 작전계획과 사전 방어계획을 훌륭하게 세웠음을 반증하고 있다.

 

1625년 4월 용양위부사, 7월 장단진병마첨절제사겸 도호부사, 1628년 황주목사와 황해도병마절도사, 2년 후에 행용양위부사와 김해도호부사를 거치며 장군이 소임을 다하자 조정에서는 크게 기뻐하여 인조대왕이 친히 말 한 필을 하사하기도 했다.

 

“가선대부 황해도병마절도사 전삼달에 이르노라. 경은 국방에 맡은 책임이 중하므로 병졸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히 하고 도적을 막는데 최선을 다하라. 혹 나와 독대할 일이 있으면 비밀로 하라. 만약 간모한 일이 있을지 모르니 비상시는 합의한 후에 시행하기로 하고 21명부를 하사하니 경은 잘 보관하여 때가 오면 실행하여 국가에 더욱 충성하라”

 

지금까지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어서각(금호읍 약남리 소재)의 유서내용으로 지략과 무예를 겸비한 장군을 인조대왕이 신임하여 오만불손한 청나라를 응징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나 불행히도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유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633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전삼달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지덕장으로 나라를 위해 구국의 충정을 바쳤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3년 상을 마친 효자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 한 평생을 불살랐다. 371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에 의해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로 이장된 장군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에게 전하고픈 말이 떠올랐다.

 

아! 전삼달 장군… 이제는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