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천시 화북면 상송리에 있는 남연허브에서.
▲ 내가 막내여서였는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학식까지 단 한번도 찾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대학교 졸업식
(90년 2월)에 참석하셨다. 이때만 해도 무척 젊으셨는데 결국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셨다.
▲ 94년 3월, 큰아들 동열이 100일 때 인듯! 이때만 해도 아주 젊고 건강하셨다.
(1.4)
아버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신지 15시간여 지났지만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아버지, 이제 당신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야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빈농의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동생 넷과 자식 셋을 성장시켜 사회로 내보내놓고 좋은 시절이 왔는데 지금 떠나시면 어떻게 합니까?
동열이가 첫 월급타서 할아버지 맛있는 것 사드리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잖아요! 정이 많으셔서 가족들과 주위를 찰 챙기셔서 어디를 가나 호인소리를 들으셨기에 당신의 그늘 속에 자란 자식으로서 부담감이 듭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1년 6월(음력 5월 10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만 해도 아버지가 남아계셨기에 든든했는데 이젠 누구를 의지해야할지 막막합니다. 살아오면서 당신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긴 했지만. 아버지가 짊어졌던 무거운 짐들을 이젠 저희들이 져야겠습니다. 당신의 명성에 흠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말입니다.
아버지는 복 받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들과 손주, 동생들,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임종을 맞이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버지가 평안히 돌아가실수 있도록 자식과 며느리가 기도와 찬송으로 천국 가는 문으로 인도했잖아요.
임종을 맞으신 당신의 얼굴이 무척 편안해 보였습니다. 고통 속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의식을 잃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시면서 안타까워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주위를 살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엄마처럼 예수님 영접하시고 천국에 가셨으니까 지금쯤 두 분이서 20년만의 상봉을 기뻐하고 계시겠네요. 아버지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는 한평생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의술이 발달한 시대에 74세를 일기로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게 억울할 따름이지만.
천국에서 두 분이서 함께 자식과 손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많이 격려해 주세요. 많은 분들이 오랫동안 아버지를 기억하듯이 아버지도 저희들 지켜주세요.
(1. 8)
아버지 장례식(5)과 삼우제(7)를 치르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 가족들도 놀랄 정도로 문상객들이 많이 찾아오셨어요. 원래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객들이 많아도 정승이 죽으면 손님이 없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생전에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신게 많았나 봅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친척, 친구, 지인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실 할머니, 엄마, 할아버지 장례식을 치를 때는 아버지가 든든하게 계셨기에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과연 우리 삼남매가 이렇게 큰일을 잘 치러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거든요.
다행히 작은아버지와 고모를 비롯해서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았고 아버지의 생전 활동, 형과 매형, 저까지 손님들이 아주 많이 찾아와서 위로해 주셨어요. 조의금은 둘째치고 함께 슬픔을 함께 나눈 분들에게 평생동안 큰 빚을 졌어요. 두고두고 갚아야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현실에 익숙해지겠지만 순간순간 많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특히 삶이 고달프거나 힘들 때.
오늘부터는 미뤄놨던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이 용기를 갖고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아버지도 보고싶어하실 테니까요. 엄마와 20년만에 만나서 많이 반가우셨죠. 이젠 두분이 천국에서 저희들 지켜주세요.
(1. 10)
어제(9일) 새벽에 처형한테서 처 큰외삼촌이 돌아가셨다며 전화가 왔어요. 약을 드셨다나봐요.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러셨을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나요. 잘은 모르지만 우울증에 걸리셨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셨는데... 건강만 허락되면 얼마든지 멋진 인생을 사실 수 있었는데. 아버지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이제 조금 있으면 새로운 해가 뜨려고 해요.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편안하게 살았는데 지금부터는 혼자서 서야 해요. 아버지! 천국에서 지켜주실거죠.
2010년도가 한참 지났는데 10일인 오늘 첫출근하려니 좀 어색합니다. 그렇지만 절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도리겠죠. 아버지도 이제 천국생활 일주일째가 됐네요. 먼저온 분들이 텃세 부리지는 않겠지요. 어머니도 잘 챙겨주실거고. "아버지! 사랑합니다." 눈물이 울컥 나오려고 해요. 하지만 지금부터는 참을 겁니다. 이젠 강해질 겁니다. 아버지처럼!
(1.12)
형이 깜짝 놀랐다네요. 그저께 낮에 아버지 다니던 경로당에 인사드리러 가자고 전화하면서 "형님!"이라고 불렀거든요. "누구냐?"고 해서 "동생"이라고 했더니 "상원이냐?" 그러는 것 있죠. 그래서 "친동생"이라고 했어요.
연년생이라서 어릴 때부터 존칭을 사용하지 못한 게 너무 오랫동안 끌어왔나봐요. 아버지가 여러번 말씀하셨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이제부터는 존칭을 써야겠다고 작정하고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처음이라 형이 오히려 많이 당황했나봐요. 형수와 동열이 엄마를 통해서 반응을 들었어요. 이제는 단순한 형이 아니라 아버지 대신 우리 집의 가장 역할을 해야되니 최대한 예우해야겠어요. 그래야 아버지도 마음이 놓이실 것 같아요.
지역신문에서 아버지 경력을 넣어서 광고를 내면 어떻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사양했어요. 가족사를 지면에 올리려니 부끄럽기도 하고 이젠 빨리 슬픔을 털고 씩씩하게 살려고요. 그저께와 어제 이틀간 많은 일들을 처리했어요. 사실 좀 많이 밀렸거든요. 일은 계속 이어지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하다보면 이번 주내로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 ‘큰가솔’
이원석
그립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직이 불러봅니다.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라고 가르쳐주신 큰가솔
지난해 추석을 맞아 친척들이 모인 문중 벌초날
이온수 장군의 유품을 묻어두었다는 무덤 앞에 서서
제게 귀중한 마음의 유산을 함께 물려 주셨죠
어느새 성큼 다가온 신묘년 한가위의 벌초
이번 행사에는 당신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체취가 남은 큰가솔이 있기에
더 큰 외로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큰가솔처럼 크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 큰가솔 : 영천시 화남면 대천2리 강당마을 안쪽에 있는 경주이씨 문중 산으로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칼, 활, 갑옷 등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온수 장군의 유물이 묻혀져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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