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에
문태준 (1970~ )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시월에 빠져본다는 것, 괜찮은 일이다 어떻게 팽팽하게만 살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그라들고 무너져가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지 않는가? 시월은 쓸쓸한 것이 매력이다. 시월에 쓸쓸함을 지우는 행위란, 가을의 풍취를 죽이는 일이다. 눈에 힘을 풀고 ‘헐린 제비집 자리 같’은 텅빈 시간을 소유해보는 것이다. ‘해죽, 해죽 웃’으며 책갈피에 꽂힌 마른 꽃들이 와르르 가출해서 그대의 심장을 간질여줄 것이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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